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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정통론

한토막 역사 5화. 대한제국이 <광무>를 연호로 정한 이유는? 대한 제국을 반포하는 고종의 조서와 광무의 의미 - 대한 제국의 반포 “봉천 승운 황제(奉天承運皇帝)는 다음과 같이 조령(詔令)을 내린다. 짐은 생각건대, 단군(檀君)과 기자(箕子) 이후로 강토가 분리되어 각각 한 지역을 차지하고는 서로 패권을 다투어 오다가 고려(高麗) 때에 이르러서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을 통합하였으니, 이것이 ‘삼한(三韓)’을 통합한 것이다. 우리 태조(太祖)가 왕위에 오른 초기에 국토 밖으로 영토를 더욱 넓혀 북쪽으로는 말갈(靺鞨)의 지경까지 이르러 상아, 가죽, 비단을 얻게 되었고, 남쪽으로는 탐라국(耽羅國)을 차지하여 귤, 유자, 해산물을 공납(貢納)으로 받게 되었다. 사천 리 강토에 하나의 통일된 왕업(王業)을 세웠으니, 예악(禮樂)과 법도는 당요(唐堯)와 .. 더보기
이익의 삼한 정통론으로 본 고조선의 기원 이익의 삼한 정통론 주장 1. 이익의 삼한 정통론 동국의 역대 흥망은 대략 중국민족과 그 기원을 같이 한다. 단군은 중국 요임금과 같은 시기에 흥하였다. 주나라 무왕대에 이르러 기자가 와서 조선왕에 책봉되었다. 그 뜻한 무엇인가? 단군조선의 후예들이 점점 쇠퇴하여 미약하였고, 국가의 임금이 돌아오지 못하였으므로 기자가 와서 새롭게 문을 연 것이다. 여기에 8조의 교를 내리니 지금 전하는 바가 3개조이다. (중략) 무릇 문명의 개화는 실로 기자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후손들이 그 국가의 업을 제대로 하지 못하여, 위만이 와서 간사함으로 준왕을 몰아내었다. 준왕은 오히려 군대를 이끌고 남으로 내려가 영토를 다시 넓히니, 준왕에게 복속한 나라가 50여국이었다. 이로서 동쪽 국가의 정통은 끊기지 않게 된.. 더보기
고조선과 단군을 우리 조상들은 어떻게 인식하였을까? (삼국 ~ 일제시대) 고조선과 단군을 우리 조상들은 어떻게 인식하였을까? (삼국 ~ 일제시대) 1. 삼국시대에는 고조선에 대한 생각을 하지 못하였다. 삼국시대의 고구려, 백제, 신라의 지배층들은 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었습니다. 삼국 시대 기록들을 살펴보면, 거의 자신들의 계통을 철기 시대 국가들로부터 찾고 있습니다. 삼국은 모두 독자적 건국신화를 가지고 있고, 자신들의 뿌리는 북방에서 왔지만, 독자적인 영역국가임을 주장합니다. 사실 삼국사기라는 우리 역사서의 편찬 태도 자체가 고대 고조선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다는 것을 볼 때, 고조선에 대한 삼국시대 지배층들의 인식은 지금 우리가 삼국사기를 통해 읽어서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삼국시대의 지배층들이 고조선에 대한 인식을 하였다는 근거는 삼.. 더보기
제왕운기의 3조선설 제왕운기의 3조선설 본기에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상제 환인은 서자가 있었으니 이름이 웅이였다고 한다. 이 웅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려가 삼위태백에 이르러 크게 인간을 이롭게 할 수 있을까”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웅이 천부인 3개를 받고 귀신 3천명을 거느려 태백산 마루에 있는 신단수 아래에 내려왔다. 이분을 단웅천왕이라 이론다고 한다. 손녀로 하여금 약을 먹여 사람이 되게 하여 단수신과 결혼시켜 아들을 낳게 하였다. 이름을 단군이라 하니 조선 땅을 차지하여 왕이 되었다. 이런 까닭에 시라, 고례, 남북옥저, 동북부여, 예와 맥은 모두 단군의 자손이다. 1038년을 다스리다가 이사달에 들어가니 신이 되어 죽지 않은 연고이다. - 제왕운기 전조선기 - 사료해석 : 제왕운기는 3조선설을 제시합니다. 단군은 .. 더보기
이익의 삼한 정통론 이익의 삼한 정통론 동국의 역대흥망은 대략 중화와 서로 시작과 끝을 같이한다. 단군과 요임금은 같은 시기에 일어났으며, 무왕이 천명을 받을 때 기자가 봉군으로 정해졌다. 그 뜻은 무엇인가? 단군이 후에 쇠퇴하고 약해지고, 군왕이 다시 일어나지 못하자 기자가 다시 그것을 이어 업을 다시 일으킨 것이다. 기자는 8조의 조목(교화)가 있었는데, 그중에 지금 3가지만 전해지고 있다.(8조법 내용은 중략) 무릇 어질고 현명함의 문화는 실로 기자로부터 시작된 것이니 후에 자손들의 업이 끊기지를 않았다. 위만은 사이한 방법으로 그것을 훼손하였으니, 준왕은 오히려 그 사람들을 이끌고 남으로 달려가 강역을 다시 개척하였고, 50여국이 복속하였다. 이것은 즉 동방의 전통이 끊기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삼국의 설명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