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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풀이/역사 사료와 데이터

중국사에 나오는 한국사 자료들 - 남제서 동남이전 고려 편

중국사에 나오는 한국사 자료들 - 남제서 동남이전 고려 편

  동이 고려국은 서쪽이 위와 접경이다. 송나라 말년에 고려왕 낙랑공 고련이 사지절 산기상시도독 영평이주제군사 거기기대장군 개부의동삼사가 되었다.

  태조 건원 원년에는 표기대장군의 칭호를 주었다. 삼년에 사신을 보내서 공물을 바쳤다.

  배를 타고 바다 위로 다녀서 사역이 항상 서로 통하고 역시 위에도 사신을 보내기도 하지만 그들은 강성해서 제약을 받지 않았다. 위에서는 여러 나라 사신의 거처하는 집을 두었는데 제나라 사신이 첫째이고 고려가 그 다음이었다.

  영명 칠년에 평남참군 안유명과 용종복야 유사효가 위에 사신 갔더니 위의 원회와 고려의 사신들이 서로 엇갈려 이르렀다. 이 때 유명이 위주의 객랑 배숙령에게 이르기를, [우리들이 중국의 명령을 받아 경의 나라를 찾은 것은 오직 적을 막으려는 것이 한 위일 뿐이고, 그 나머지 밖의 오랑캐들은 우리나라에 소속될 것을 바라지 않는 바인데 더구나 동이나 소맥이겠는가. 신하로서 중국 조정에 소속되었기 오늘날 감히 우리와 함께 왕래하게 된 것이다]했다.

  사효는 위남부상서 이사충에게 이르기를, [우리 성조가 위의 사신을 대접할제 일찌기 소국들과 마찬가지로 하지 않았으니 경도 응당 이를 알 것이라] 했다.

  사충은 대답하기를, [사실 그러하다. 다만 임금이나 그 다음 사람이 대궐에 올라가지 못했다. 그래서 앉아 있고 일어나는 것이 몹시 높았으니 어떠헥 서로 말할 수가 있겠는가] 했다.

  사효가 말하기를, [이도고는 옛날에 사신 올 적에 의관을 바르게 하고 왔었다. 위나라도 반드시 갓끈 늘이고 관 쓰고 왔더라면 어찌해서 내쫓겼겠는가] 했다.

  유명이 또 노주에게 이르기를, [두 나라가 서로 사이 좋게 지내는 것은 오직 제나라와 위나라뿐이다. 변방 국경이 작고 비좁은데 감히 신의 발꿈치가 다닐 수가 있겠는가. 고려 풍속에 의복은 바지가 짧고 절풍건에 양은 하나만 달아 쓰는데 이것을 책이라고 한다. 오경을 읽을 줄 알고 사람으로 하여금 서울에서 살게 한다] 했다.

  이 말을 듣고 중서랑 왕융이 희롱해 말하기를, [옷을 제대로 입지 않으면 몸에 재앙을 받는 법인데 머리 위에 쓰는 것은 그 무슨 물건인가] 했더니 대답하기를, [옷을 제대로 입지 않으면 몸에 재앙을 받는 법인데 머리 위에 쓰는 것이다] 했다.

  고련은 나이 백여 세나 되어서 죽으니 융창 원년에 고려왕 낙랑공 고운으로 사지절 산기상시도독 영평이주제군사 정동대장군 고려왕 낙랑공을 삼았다.(南齊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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