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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풀이/역사 사료와 데이터

중국사에 나오는 한국사 자료들 - 양서 제이전 백제 전

중국사에 나오는 한국사 자료들 - 양서 제이전 백제 전

  백제란 그 조상은 동이다. 동이는 세 한국이 있으니 첫째 한국이요, 둘째 진한이요, 세째는 변한이다.

  변한과 진한은 각각 열 두 나라가 있고, 마한은 오십사국이나 되었다. 그 중에 큰 나라는 인가가 만여 호나 되고, 작은 나라는 수천 호가 되어 모두 합치면 도합 십여만 호가 되니 백제란 그 중의 하나이다. 그것이 뒤에 와서 점점 강대해져서 모든 조그만 나라들을 합쳤다.

  그 나라는 본래 구려와 함께 요동 동쪽에 있었는데, 진나라 때에 구려가 이미 요동을 침략해 차지하게 되자 백제도 역시 요서와 진평의 두 군 땅을 점령해서 스스로 백제군을 두었다. 진나라 태원년중에 왕 수와 의희년중에 왕 여영과 송나라 원가년중에 왕 여자가 모두 백성들을 보내서 바쳤다. 여자가 죽자 그 아들 경을 세웠고, 또 경이 죽자 그 아들 모도를 세웠으며, 도가 죽자 그 아들 모태를 세웠다.

  제나라 영명년중에 모태로 대도독 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 백제왕을 삼았다. 천감 원년에 다시 모태에게 정동장군의 호를 주었더니 이윽고 고구려에게 파멸되어 여러 해 동안 세력이 쇠약했다. 그리하여 남한 땅으로 옮겨 앉았다.

  보통 이년에 왕 여용이 비로소 다시 사신을 보내서 표문을 올려 신이라 일컬었는데, 여러 번 구려에게 파멸당했다가 이제 와서 비로소 함께 좋게 지내기 시작했고, 백제는 다시 강한 나라가 되었다.

  그 해에 고조가 조서를 내리기를, [행도독 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 백제왕 여융이 바다 밖을 지켜 왔고, 멀리서 공물 바치는 직책을 다했으니 그 정성이 간곡하기로 짐은 아름답게 여기는 바이다. 마땅히 옛법을 따라 영화로운 명령을 제수하여 그에게 지절도독 백제제군사 영동대장군 백제왕을 삼는다] 했다.

  오년에 융이 죽자 조서를 내려 다시 그 아들 명으로 저절독 백제제군사 유동장군 백제왕을 삼고, 그들이 있는 성을 고마라 하며, 그들이 있는 읍을 담로라고 했으니 이것은 마치 중국에서 군현을 말하는 것과 같았다.

  그 나라에는 이 담로가 모두 이십이개가 있는데, 모두 그들의 자제들이나 종족들이 나누어 점령하고 있다. 그 나라 사람들은 모양이 키가 크고 옷이 깨끗하다. 그 나라 사람들은 또 왜에 가까운 때문에 혹 몸뚱이에 먹물로 글씨나 그림을 넣는 자가 있었다.

  지금에 와서는 말하는 것이나 옷 입는 것이 대략 고려와 같으나, 길을 가는 데 팔짱 끼지 않고 절하는 데 발을 뻗지 않는 것만은 다르다.

  모자를 관이라 하고 저고리를 복삼이라 하며, 바지를 혼이라 한다. 그들의 말은 중하와 같은데, 이것은 역시 진한 때의 풍속이라 한다.

  중국 대통 육년과 대동 칠년에 여러 번 사신을 보내서 방물을 바쳐 왔고, 또 아울러 열반등의 경의와 모전, 그리고 여러 공장과 화사들을 청했다. 이에 중국에서는 칙서를 내려 모두 주도록 했다.

  태청 삼년에 경사에 적이 침범했던 것을 모르고 그들은 오히려 사신을 보내어 물건을 바쳐 왔다. 사신이 서울에 이르러 보니 성과 대궐들이 모두 허물어졌으므로 모두 통곡하고 우리 후경이 노해서 그들을 잡아 가두었는데, 이들은 경평 때에 이르러 비로소 풀려 본국으로 돌아갔다.(梁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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