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당 정치 관련 사료
선조 대 김효원이 전랑에 추천되었다. 이때 왕실의 외척이었던 이조참의 심의겸이 거부하여 효원이 전랑이 되는 것을 허가하지 않았다. 효원은 젊은 선비들의 환심을 크게 얻고 있었는데, 이에 선비들이 의겸을 공박하였다. 의겸도 일찍이 권력을 잡은 간사한 자를 물리치고 선비들을 보호한 공이 있었다. 이리하여 늙고 벼슬이 높은 사람들이 의겸을 옹호하였다. 이에 선배와 후배 사이에 논의가 갈라졌는데, 처음은 하찮은 일에서 점차 커지게 된 것이다. 효원의 집이 동쪽에 있었으므로 동인이라 하고, 의겸의 집은 서쪽에 있었으므로 서인이라 하였다. 붕당이 생긴 지는 벌써 오래이다. 옛적 구양수의 글을 보면 몰리 요순시대와 은, 주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온나라 사람들이 전부 붕당에 참여해서 둘, 셋, 넷으로 나뉘어 2백여 년의 오랜 세월이 지나오도록 옳고 그름의 분별이 합당하지 못하고 아울러 정론을 세울 수 없었던 붕당을 든다면 오직 조선을 들 수 있다. 신이 듣기로는 붕당의 설은 예로부터 있어 왔습니다. 그동안 군주가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을 분별하였을 뿐입니다. 대개 군자는 군자와 더불어 도를 같이 함으로써 붕(朋)을 삼으며 소인은 소인끼리 이익을 같이 하여 붕을 이루니 이는 자연의 이치입니다. 그러나 신은 소인에게는 붕이 없고, 오직 군자에게만 있다고 생각합니다. 임금이 이르기를 "무릇 정사를 행함에 편당을 힘써 없애야 한다."고 하였다. 붕당은 싸움에서 생기고 싸움은 이해관계에서 생긴다. 이해관계가 절실하면 붕당은 깊어지고 이해관계가 오래될수록 붕당이 견고해지는 것은 당연한 형세이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지금 열 사람이 함께 굶주리고 있는데, 한 그릇의 밥을 같이 먹게 되면 그 밥을 다 먹기도 전에 싸움이 일어날 것이다. 조정의 붕당도 이와 다를 것이 없다. 대개 과거제도가 번잡하여 인재를 너무 많이 뽑으며 애증에 치우쳐 진퇴가 일정치 못했기 때문이다. 당파가 생긴 뒤로 운우가 번복하듯하여 아무리 총명해도 제대로 판단하기 어렵다. 중립을 지켜 시비를 가리는 자를 용렬하다 하고 붕당을 위해 죽어도 급히지 않는 자를 절개가 뛰어나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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