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사다함 열전 사료
사다함은 그 계통이 진골 출신으로 나밀왕의 7세 손이요, 부친은 구리지 급찬이다. 본래 높은 가문의 귀한 자손으로서 풍채가 청수하고 지기가 방정하여 당시 사람들이 그를 화랑으로 받들기를 청하므로 마지 못하여 화랑이 되었다. 그를 따르는 무리가 무려 1천 명이나 되었는데 사다함은 그들 모두의 환심을 얻었다. 진흥왕이 이찬 이사부에게 명하여 가라[가야라고도 한다.]국을 습격하게 하였는데, 이 때 사다함은 나이가 십 오륙 세로서 종군하기를 청하였다. 왕은 나이가 어리다 하여 처음에는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요청이 간절하고 의지가 확고하므로 마침내 그를 귀당비장으로 임명하니 그의 낭도로서 그를 따라 나서는 자가 많았다. 국경에 이르자 원수에게 청하여 그 휘하의 병사를 거느리고 먼저 전단량[전단량은 성문 이름이다. 가라의 말로 문을 양(돌)이라 하였다.]으로 들어 갔다. 그 나라 사람들은 뜻밖에도 군사들이 갑자기 들어닥치자 놀란 나머지 방어를 하지 못했으므로, 대군이 이 틈을 이용하여 마침내 그 나라를 멸하였다. 군사가 돌아오자 왕은 그의 전공을 책정하여 가라 인구 3백을 주었다. 그러나 그는 받는 즉시로 전부 석방하여 한 명도 남겨두지 않았다. 그에게 또한 토지를 주었으나 굳이 사양하므로 왕이 받을 것을 강권하니 알천에 있는 불모지만을 요청하였다. 사다함은 애초에 무관랑과 목숨을 같이하는 벗이 되기를 약속하였는데, 무관이 병들어 죽자 너무나 슬프게 울다가 7일 만에 자기도 죽으니 당시 나이가 17세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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