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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풀이/역사 사료와 데이터

관동대지진 한인학살 보고서(1923)

관동대지진 한인학살 보고서(1923)

  2만의 동포가 왜노의 총칼에 죽어갔다.

  동포들이여! 왜도 관동에서 2만의 동포가 왜노의 총칼에 참혹히 죽어갔다.  동포들이여! 다리를 꺾이고 배를  갈리어 죽은 우리 동포의  최후의 애호는 다만 '아이고 어머니' '아이고 아버지' 뿐이었다.

  동포들이여! 우리의 전도에는 이보다 더한 학살! 살육의 참화가 박두할  것이다. 동포들이여! 왜노를 박멸하자! 노소남녀 구별없이 모두 살육하자! 모두 굳은 결심과 빈 주먹만  있으면 된다.

  동포들이여! 우리들은 이를 조사보고함과 동시 하루속히 최후의  결사전투를 개시할 것을 절원하는 바이다.

  형제여, 알거나 모르거나 청천도 낯을 찌푸리고 백일도 빛을 잃었다. 개천 4256년 9월 1일부터 동 15일경까지 2주일간 장시일 계속하여 왜지 관동에서 왜족이 한인들 학살한 그 참상을 무엇이라고 평할 것인가. 우리 인류사회에 있어서는 공전절후의 참변일뿐더러 폭랑, 독사와 같은 동물계에서도 희유의 만행으로써 우리 동포 수만을 도살한 그 잔인비참한 정형에는 요귀악마도 눈을 감고 고개를 돌리지 않을 수 없다.

  동 1일 왜정부는 동경시 선교 무선전신을 경유 관동부 6현전반에 대하여 한인박멸을 명령하였다. 그 이유는 한인은 당시 당지의 진화를 기회로 각처에 방화 또는 폭탄으로써 제반의 건축물을 파괴하고 혹 음료수에 독약을 투입하여 인명을 살해하고 혹은 권총, 장총,  폭탄을 휴대 혹은 대를 지어 일본인을 습격하는 등 관동지방의 전멸을 도모한다라고 하여 동경, 횡빈을 시발점으로 하여 병대와 경찰관을 2부 6현에 일제히 나포하여 한인박멸을 종횡으로 선전하니 왜족은 장약을 가리지 않고 손에 닿는 대로 눈에 띄는 대로 장총, 단총,  장검, 단검, 철창, 죽창, 곤봉, 추자, 소화구의,  건어찍기 등 형색의 흉기를  휴대하고 "조선인을 박멸하자"고 외치며 그 함성 천지를 진동하고 벌떼와 같이 일어나니 이가 소위 청년단  혹은 자경단이라 칭하는 것이다.

  집의 내외 촌락, 시가는 물론 산, 야, 천, 초원까지도 빈틈없이 수색하여  한인이라고만 하면 남녀노유를 가리지 않고 만나는 대로 보는 대로 불문곡직 살육하니 선혈과 양심뿐인 우리는 어떻게 죽음을 면할 것인가? 우전 부근에서는 기병대에 의해 2천 명이 죽었고 우전천변에서 4백 명이 총살을 당했고 신나천 부근에서 3백여 인,  기옥현 취상역 부근 및 동경시 본소 부근의 4백여 명, 동경시 구호경찰서 구내에서 2백여 명, 중선도 본압정 부근에서  1백여 명이 죽었고 동경시 상야경찰서 구내에서 150인, 학견경찰서  부근에서 1백여 명을 살육하니 우리 동포 1만 다수의 선혈은 보람없이 왜지 관동 전바을 피로 물들였고 우리 동포  2

만 다수의 육체는 하릴없이 왜지 관동 전반의 비료로화하였다.

  살육의 참상

  하동 광장에 한인을 다수 포접하여 기천기백  인을 한꺼번에 난사하고 병영 또는  경찰서 구내에 기백기십 인을 집합시켜 살해하였다. 더구나 노상에서 보는  대로 병력 내지 경찰관이 총살 자살한 것은 물론 보통의 살인수단이라고 할 수밖에  없게 소위 자경단, 청년단 등은 '조선인'이라고 외쳐 부르는 한 마디에 백이 응하여 낭의  군과 같이 동서남북에서 모여와 1명의 우리 동포에 대하여 수십인의 왜노가 달라붙어 검으로 찌르고 총으로 쏘고 봉으로 때리고 발로 차서 쓰러뜨리고 그 위에 죽은 사람의 목을 묶어 끌고다니면서 찌르고 차면서 시체에까지도 능욕을 가하였다.

  부인 등을 보면 양편으로 좌우의 다리를 벌려 생식기를 검으로 찔러 일신을 4분5열로 자르며 여자는 이렇게 하여 죽이는 것이 묘미가 있다고 웃으면서 담화하였다. 우리 동포를 전차궤교하에 목을 매달고 양다리를 끝으로 묶어 좌우에서 다수인이 끈을 잡고 신호하여 호응하면서 '그네'와 같이 흔들어 죽인 것도 있다. 신체를  전신주에 묶고 처음 눈알을 도려내고 코를 찔러 그 애통한 광경을 충분히 구경한 후에 배를 찔러 죽인 것도 있다.  각 기차 중에서는 다수의 왜노 등이 4지를 잡고 창 밖으로 던져 역살하였고 남녀 수십 인을 발가벗겨 보행시키고 또는 춤을 추게 하여 수시간 동물적 희롱을 감행시킨 후 찔러 죽인 일도 있었다. 이러한 괴악한 수단은 우리의 뇌수로는 도저히 상상을 할 수 없는 바이다.

  한인 중에도 왜어에 능통한 자가 왜족으로 오인되어 보명할 것을 염려하여 정정가가 기차 중에서도 통행인에게 왜국문의 탁음자의 발음을 시킴으로써 한인을 색출하고 왜인 중에서도 자기에게 관계있는 한인을 은닉 또는 보호하여 살해당한 자도 1, 2인뿐이 아니다. 이렇게 우리 동포를 주밀히 학살하니 왜지 관동에 있는 우리의 형제 내지 주중의 사람은 모두 적뿐인 곳에서 어디에 가서 생을 구할 것인가?

  동네 앞을 흐르는 것은 우리 동포의 선혈이고 이곳저곳에 흐트러진 것은 우리 동포의 시체이다. 우리 동포의 사체가 퇴적하여 우전천은 유통도 막혀 아  동포의 피가 썩는 그 악취는 통행인의 호흡도 막힐 정도이다.

  왜족이 자인한 학살의 동기, 왜족이 한인학살의 이유를 내세운 왜지 관동의 전멸계획이라는 것 혹은 난폭한 행동이 과연 우리 인간에게 이런 일이 있었던가?

  전혀 무근의 허설로써 왜족 중 "사회혁명을 도모하는 일파가 당시 왜지의  진화재를 기회로 방화, 약탈 등의 난행을 하였던바 이와 같은 허언을  선포하여 자체의 죄를 한인에게 전과하려고 하였다"라고 한다. 이는 동 6일에 왜국  내각총리 및 경시총감의 유고로써 공표한 바이다.

  왜정부의 간책

  왜정부로서는 한인학살의 사실을 엄폐하여 한인을 보호한다고 외계에 대하여 선전하던 유일의 빙자는 "한인으로써 잔명을 보존한 것은 대개 병영 내지 경찰에서  보호를 받는 자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처음에는  경찰관 내지 병대도 한인을 만나는  즉시 그 장소에서 살육하였으니 그후에는 일정한 장소에 집합시켜 편리한 방법으로 죽이려는 생각과 또한  학살을 시작하였던 바 본래 다수의 한인인  고로 관동지방 전반에 총성, 갈성, 애호의  소리는 천지를 진동하고 난타난자하여 피가 바다를 이루고 시체는 산더미가 됨에 이르러  외인들에게 보이는 것을 겁내어 각처의 한인을 병영 또는 경찰서 구내에 집합시킴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병영, 경찰서에 온 사람은  임시 잔명을 보존하였다 하나 도중에서  대개 모두 중상을 입었다.

  더구나 중상을 입은 자는 과연 몇 시간이나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을 것 같은가? 혹은 광장, 하변에 끌고나가, 혹은 그 안에서 기백기십인을 일시에 죽였다. 그리하여 동 6일에 이르러 한인이 죄없음이 밝혀짐에 따라 외계의 여론이 점차로 일어나니 왜정부는 각 경찰서 구내 또는 병영에 한인을 집합한 것은 보호를 위한 것이다라고 선전함과 동시에 각 소에 한인수용소를 설치하여 한인을 그곳에 이송,  집합시켜 병대 또는 경찰관으로써 감수를  삼았다. 따라서 7일부터는 이 참극이 점차 감소하였으나 왜관민 공히 학살을 계속한 것은 15일경까지이다.

  당시 조선 내의 각 언론계 출판물은 물론 왜지의 각  신문, 잡지의 한인학살에 대한 보도를 일절 금지하고 오히려 한인의 이재자를  구재하는 일에 전력을 다한다는 선전적  기재를 장려하고 각처에 한인수용소를 설치하여 실지로는 감금하면서 외계에 대하여는  "조선인 보호이다"라고 선전함과 동시에 한인이 귀국하여 이 참변의 실황을 설포할 것을  겁내어 정부의 비밀통첩으로써 각 경찰서에서 한인의 귀국을 금지시키고 외계에 대하여는 도중의  위태로움을 염려하는 때문이라 하였다.

그후에 이르러 귀국을 허가하였으나 이들 귀국인의 신변은 순사가 비상한 사찰을 가해  지인에게 자기가 겪은 경력담을  하면 즉시 '유언비어'라고 엄벌을 가하는 등 요악한 정책과 가혹한  압박으로써 조선 또는 외지에 한인학살의  정황이 전포되는 것을 방지하고 간사한 수단으로써 한인보호의 형식으로 꾸며 세계를 기만하려  했다. 현로한 사실을 정책과 압박으로써 그 영향을 소멸하려고  세계 공지의 참극을 수단으로써 호도하려고 했다.

  왜정부에서는 당시 외국인으로서 한인학살의 실황을 목격할 것을 방지하기 위해 외국인을 각 소에 집합시켜 경찰관 또는 병대로써 감수하고 외출을 금하고 그 주변에서 왜노들은 총을 쏘고 또는 싸움을 하면서 "이 총성은 한인이 쏘는 총성이며 이 싸움은  한인이 습격하는 소리다"라고 기만하는 동시에 이곳저곳에 한인의  폭행 또는 습격 등이 사실이  빈번하다고 선전하였다.

  왜노의 궤변

  왜정부 산본 내각총리의 유고 중에 "금회 조선인에 대한 사건은 일반인민의  오해로 인해 발생한 바이다"라고 말했으나 왜정부 당국에서 동경시 선교 무선전신을 통해 관동지방 전반에 대해 한인박멸을 명령한 것은 동년 10월 중 왜국 임시국회 중의원에서 공인된 바이다.

  더구나 왜노의 상투어인 "진화재의 당시 관민을 논할 것 없이 일본인은  이지력을 상실하였던 때인 고로 이러한 사건의 발생을 본 것이다"라고 하는 것은 자기의 죄를  타인에게 전과하는 것으로 이지력 상실자나 할 수 있는 행동 아닐까? 이지력을 상실하였다면 한인학살과 외국인 기만의 수단은 어떻게 그리 고착할 수 있었던가?

  왜족 중 소위 지식계급의 언론은 모두 "금회의 일은 조선인뿐만이 아니라  일본인 중에서도 사회주의자는 다수의 피해자를 낸 것인즉 조선인에 대하여 특수한 원한을  가진 경우다"라고 하니 그렇다면 한인 중에서도 사회주의자나 혹은 건설파괴 내지 인명살해의  행위자만 해하였는가? 한인이라고만 하면 불문곡직 도륙한 것은 무슨 이유인가?

  왜정부의 소위 조선총독은 동 6일에 왜지 각 신문에 공포하여 왈 "당시  관동지방에 재주하는 조선인은 노동자 3천, 학생 3천, 합계 6천명 중 조사의 결과 살해당한 자 2인뿐이다"라 했다. 관동, 관서 양지방에 가장 많이 재주하여 강축의 계산으로 전부의 5분의 1이 관동지방에 재주하니 그 수가 3만 이상에 달하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알고 있는 바이다.  수만 다수의 인명을 살육하면서 2인뿐이라고 발표한 것은 실로 수심의 궤변이 아닐 수 없다.

  구사일생의 우리 동포로써 잔명을 보존한 사람은 왜병영 내지 경찰서에서 요행히  살아남은 사람이 가장 많고 혹은 서까래 밑에서 10여 일간의  기한을 참고 견디어 살아남은 사람, 물 속에서 수일간 혹은 장시간을 은신하여 살아남은 사람,  양옥건축의 입주준비를 위해 둘러친 목통 속에서 수일을 경과하여  구명한 사람, 우리 동포의 시체  속에서 묻혀서 구명한 사람도 있고 왜노 등의 난행을 받아 사전에 전도하여 눈을 부릅뜨고 사지를 떨며 죽은 시늉을 하여 구명을 한 사람, 그 외에도 글로도 다할 수 없이 기막히고 비참한 경과로 살아남은 자도 많다.

슬프다 구사일생의  우리 동포여! 왜노의 괴악한  수중에 들어가 최후의 죽임을 시험하는 것은 과연 어떠한 심정일까? 이래도 최후의 동작 없을손가? 필사의 힘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형제들이여! 왜지 관동에서 모진 폭행을 당하는 것이 누구의 뼈며  왜지 관동을 진홍으로 물들인 것은 과연 누구의 피인가? 주를 같이하는 우리 형제의 손이요, 발이 아닌가? 거지동일하여야 할 우리 동포의 살과 피가 아닌가?  이는 우리의 치명상이 아닐 수 없지 않는가? 우리에게 위기일발 닥쳐온 것이 아닌가?  오인이 준충이 아닌 인류로서의 신경을  가져다면 최후의 분투 없을 수 없다.  오인이 야만이 아니고 신성한 역사를  가진 민족이라면 개인이 가진 모든 것을 민족적 위기에 처해 희생하여야하지 않은가?

  목이 천이 잘릴 때까지는 치행준동을 한탄만 하고 그물이 내게 던져질 때에 이르러 자기도 같은 우물의 고기인 것을 알아차릴  것인가? 특히 양두를 걸어놓고 개고기를 팔  시대적 사기배들아! 한시라도 속히 허예와 기만의 흑심을  씻어내라! 냉정한 고려로써 결렴한 양심을 회복하라! 배를 불리기 위해 안구를 빼먹고 개를 크게 하기 위해 팔을 잘라 다리에 있는 것과 같은 짓을 하면 아니되잖는가?

  형제들이여! 내일은 살아남은 각자 형제의 몸에 왜마의 독아가 범습하는  날인 것을 모르는가? 내일은 오인 전체민족에게 왜노의 괴조가 침박하는 날인 것을 모르는가?

형제들이여!

무엇을 준비하고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가? 죽은 후에  장사지낼 준비를 하는가? 하늘에서 별이 떨어질 것을 기대하는가?

  형제들이여! 주저하면 함몰시킬 때를 놓친다. 말할 것 없이 최대의 분발로써 최후의 결토를 행할 뿐이다.

  1924년 1월 조사원 일동 고백

  우 대표 김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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