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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풀이/역사 사료와 데이터

임오군란 관련 사료

 

임오군란 관련 사료

임오년(1882) 6월 초 9일, 한성 영군들이 큰 소란을 피웠다. 갑술년(1874) 이후 궁궐, 경비가 다하여 기강이 없으며 호조와 선혜청 창고도 바닥나 한성 관리들은 봉급을 못 받았으며, 오영 병사들도 가끔 결식을 하여 급기야 5영을 2영으로 줄이고 노병과 약졸들을 쫒아냈는데, 내쫓긴 사람들은 발붙일 곳이 없으므로 팔을 끼고 난을 일으키려 하였다. 이 때 군량이 지급되지 않은 지 이미 반년이 지난 데다가 호남세선 몇 척이 도착하여, 한성 창고를 열어 군량을 먼저 지급하라는 명이 떨어졌다. 이 때 선혜청 당상관 민겸호의 하인이 선혜청 고지기가 되어 군량을 내주었다. 하인이 쌀을 벼껍질과 바꾸어 이익을 챙기자 많은 백성들이 크게 노하여 하인을 때려눕혔다. 민겸호는 주동자를 잡아 포도청에 가두고 곧 죽여버리겠다고 선언하였다. 수많은 군중들은 더욱 분함을 참지 맛하고 칼을 빼 땅을 차며, “굶어죽으나 법으로 죽으나 죽기는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차라리 죽일 사람이나 하나 죽여서 원한을 씻겠다” 고 하며 서로 고함으로 호응하여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고함으로 땅이 꺼질 듯 하였다. 무리는 곧바로 민겸호 집으로 쳐들어가 순식간에 집을 부수고 평지로 만들었다. 집에는 진귀한 보물들이 가득 차 있었다. 군중들은 “돈 한 품이라도 훔치는 자는 모두 죽인다” 고 하고 보물을 뜰에 모아놓고 불질렀다. 비단과 구슬이 타서 불꽃은 오색을 띄고 인삼과 녹용과 사향 냄새가 수리까지 풍겼다. 이 때 민겸호는 담을 넘어 대궐로 도망쳤다.

- 매천야록, 제 1권, 갑오이전 -

군졸들은 먼저 교동 이최응의 집을 부수고 벌벌 떨고 있는 이최응을 죽였다. 군병들은 다시 살아날까 염려하여 긴 창으로 항문을 찔러 창날이 머리와 뺨에 나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멈추었다. 그리고 나서 <장안의 민가놈은 다 죽이겠다>고 호언하면서, 민겸호, 민태호, 민규호, 민두호, 민영익, 민치서, 민치상, 민영목, 민창식을 종루로 끌고나와 난자하여 죽였다. 또 김보현의 큰 집, 작은 집과 신관호, 한성근, 윤흥렬, 홍완, 이태응, 내영집사 등속과 중인통왜자(일어통역관)의 집들을 모두 부수어버렸다. 홍안을 포박해 죽이려들자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하였다. 그 밖에도 민가와 친근한 사람이나 궁궐에 출입하는 점쟁이 무당들 집까지도 모두 파괴하여 이날 살해된 사람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 저상일월, 1992년(임오년, 고종 19년) 6월 10일 -

임오년 6월 10일 대원군에게 군국사무를 처리하라는 명이 내려지자 대원군은 궐내에서 거처하며, 기무아문과 무위, 장어의 2영을 폐지하고 5영군제를 복구하려는 명을 내려 군량을 지급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난군은 물러가라는 명을 내리고 대사령을 내렸다. 난병들은 대궐에서 물러나 사방으로 흩어졌다.

- 매천야록 제 1권, 갑오이전 -

참고글 :  임오군란은 1882년 구식 군대의 차별 대우에 항거하여 일어난 군란입니다. 이 군란은 당시 개화와 척사의 흐름 속에서 구식군대의 차별이라는 상황이 사회 전반적인 문제점들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당시 조선이 점차 서양식 도시화를 추구해가면서 군란에 도시 빈민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었는데, 이 점도 주목할 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