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 사료
권양 변호인단의 변론 요지서(부천서 성고문 사건)
변호인들은 먼저 이 법정의 피고인석에 서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권양-우리가 그 이름을 부르기를 삼가지 않으면 안되게 된 이 사람은 누구인가? 온 국민이 그 이름을 모르는 채 그 성만으로 알고 있는 이름 없는 유명인사, 얼굴 없는 우상이 되어버린 이 처녀는 누구인가. 그녀는 무엇을 하였는가.. 그 때문에 어떤 일을 당하였으며 지금 까지도 당하고 있는가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국가가, 사회가, 우리들이 그녀에게 무엇을 하였는가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눈물 없이는 상기할 수 없는 '권양의 투쟁'-저 처참하고 쓰라린, 그러면서도 없이 숭고하고 위대한 인간성에의 투쟁에 대하여, 그리하여 마침내 다가온 '권양의 승리' 우리 모두의 승리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진흙탕 속에서 피어난 해맑은 연꽃처럼 오늘 이 법정을 가득히 비치고 있는 눈부신 아름다움, 그 백설 같은 순결, 어떤 오욕과 탄압으로도 끝내 꺾을 수 없었던 그 불굴의 용기와 진실을 위한 눈물겨운 헌신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그리하여 지금 이 법정에서 이룩되어야 할 일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본 변호인단은 이 젊은이들이 노동현실에 관심을 가지고 노동현장에 뛰어들고 있는 것 자체에는 아무런 문제삼을 것이 없으며, 오히려 이 젊은이들이 보여주고 있는 놀라운 도덕적 용기야말로 우리 사회의 밝은 내일을 예감케 하는 무엇보다도 소중한 징후이며, 본의건 아니건 알게 모르게 기성사회의 부패와 사악에 동참하고 있는 우리 기성세대들 중 누구도 이 때묻지 않은 순결한 젊은이들을 일방적으로 매도하거나 단죄할 수 없다는 것을 선언합니다. 만약 정부당국이 진실로 사회의 안녕 질서와 평화를 이룩하는 데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이 새로운 세대를 섣불리 백안시하거나 이단시하기 이전에 무엇보다도 먼저 뜨거운 애정으로 이들을 포용하여야 할 것이며, 물리적인 탄압과 처벌로 이들을 꺾으려는 헛된 시도를 할 것이 아니라 마땅히 우리 사회의 누적된 비리와 병폐를 척결함으로써 근원적인 해결을 모색하여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충심으로 권고하고자 합니다. 이 자리에 피고인으로 서 있는 권양은 이 같은 새로운 세대의 젊은이 중 한 사람입니다. 그녀는 성실한 공직자 가정의 막내딸로서 이렇다 할 생활의 어려움을 알지 못한 채 순탄한 성장과정을 밟았으며 타고난 명민한 자질로 원주여고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서울대학에 진학하였습니다. 변호인들은 당시 원주법원에 재직하였던 어떤 분으로부터, 권양이 서울대학에 합격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법원 직원들이 권양의 부친에게 경사라고 축하의 인사를 하고 권양의 부친이 흐뭇해하던 일이 눈에 선한데 그 권양이 이런 일을 당하게 되다니 실로 감개가 무량하다고 하는 말을 들은 사실이 있습니다. 어느 모로 보나 권양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양명하고 축복 받은 환경과 여건 속에서 자라난 젊은이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1979년 10월 26일 박대통령 피살소식이 전해졌을 때 당시 여고 2년생이었던 권양은 동급생들과 함께 목을 놓아 통곡을 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학교와 사회에서 가르친 대로 '유신만이 살 길'이며 유신만이 우리 나라의 현실에 맞는 유일한 정치체제라고 조금도 의심 없이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이 순진한 소녀에게, 박대통령의 피살 소식은 너무나도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더욱 충격이었던 것은, 박대통령이 피살된 바로 그 순간부터 아무도 더 이상 유신체제의 정당성에 대하여 말하지 않게 되었으며, 오히려 날이 갈수록 유신체제를 공공연히 비판하고 부정하는 목소리들이 높아졌으며, 엊그제만 해도 그토록 유신만이 살길이라고 외치고 박대통령을 위대한 영도자라고 추켜세우던 세상사람들이 일변하여 박대통령의 장기집권욕과 독재, 그리고 그 아래서의 부패와 비리를 거론하게 된 사실이었습니다. 국민학교 시절이래 여고 2년생이 되기까지 기성세대로부터 귀에 못이 박히게 배웠고 그래서 의심 없이 믿어왔던 것이 거짓이었으며 속은 것이었다는 이 어처구니없는 진실 앞에서, 기성세대와 사회에 대한 그녀의 신뢰는 산산조각으로 부서지고 말았습니다. 권양은 이때부터 상당히 오랜 기간동안 신문을 보지 않게 되었으며 이것이 계기가 되어 정의와 진실에 대한 관심, 정치와 사회의 현실에 대한 의식이 싹트기 시작했다고 술회하고 있습니다.대학에 진학한 후 권양은 노동자들이 아픈 현실에 대하여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번민을 거듭하던 끝에 같은 세대의 다른 많은 젊은이들처럼 대학생으로서의 특권을 포기하고 스스로 노동자가 되어 노동자들의 권리를 증진시키는 데에 헌신하기로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가명으로 어떤 공장에 취업하였고 그로부터 불과 며칠만에 가명 입사 사실이 발각될까 우려한 나머지 자진 퇴사하였습니다. 이것이 권양이 한 일의 전부입니다. 변호인들은 여기에 무슨 잘못이 있는지를 묻고자 합니다. 누가, 무슨 권리로, 이러한 권양의 행위를 그 양심의 표현을 단죄할 수 있는가를 묻고자 합니다. 경찰은 아마도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권양은 노동현장에 취업하였기 때문에 구속된 것이 아니라, 취업과정에서 주민등록증 변조 등 범법행위를 하였기 때문에 구속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일는지는 몰라도 진실은 아닙니다. 우리는 문귀동이 당초에 그토록 당당하게 범행사실을 부인하고 나서고, 만천하를 상대로 감히 터무니없는 조작된 알리바이까지 들고 나오면서 권양을 조사한 회수와 시간 등 가장 기초적인 사실에부터 거짓말을 일삼고, 심지어는 후안무치하게도 권양을 상대로 명예훼손죄와 무고죄로 고소까지 제기하는 것을 보고, 이것이 과연 막강한 경찰조직의 뒷받침을 배경으로 삼지 않고서도 있을 수 있는 일인가, 문귀동 한 개인의 결단만으로 가능한 일인가하는 의혹을 품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니나다를까, 우리의 이러한 의혹은 검찰수사과정에서 명백한 현실로서 입증되었습니다. 경찰은 그 명예와 위신의 실추를 막기 위하여 성고문의 범행을 은폐하려고 하였던 것인지 모르겠으나, 이제 경찰의 명예와 위신은 정작 성고문 범행 자체보다도 오히려 그 범행을 은폐하려 들었던 경찰의 부도덕성 때문에 여지없이 실추되었습니다. 경찰이 그 실추된 명예와 위신을 조금이라도 회복하려면, 지금이라도 이 같은 범행은폐의 과오에 대하여 국민과 권양 앞에 사과하고 경찰조직 내부의 성고문 범행 관련자는 물론이요 그 범행은폐 책동에 공모 가담하였던 일체의 관계자들도 남김없이 적발하여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의법 처단하여야 할 것이며, 우리는 바로 이것이 경찰에 요구합니다. 만약 경찰이 이것을 끝내 거부할 때에는 우리는 경찰에 대하여 도덕적 파산을 선고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범죄수사의 주체이며 인권옹호 직무의 담당자인 검찰은 무엇을 하였는가-이것을 생각할 때에는 우리들 변호인들은 분노보다도 먼저 슬픔이 앞선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검찰이 이 성고문 사건의 수사에 있어서 전례 없이 진지하고 성실한 자세로 진실을 추구한 사실을 알고 있으며 그 노고가 많았던 것을 인정합니다. 이 사건에서 검찰은 인천지검의 수사인력을 총동원하다시피 하여 사건당사자인 권양과 문귀동, 그리고 43명의 참고인들을 상대로 연일 불철주야로 집중적인 조사를 전개하였습니다. 그 결과 검찰은 문귀동과 부천서 간부진 및 형사들이 조작해낸 모든 거짓 진술들을 낱낱이 타파하였고 권양의 모든 주장이 진실임을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명백하게 드러내었습니다. 그런데 "폭언, 폭행은 있었으나 성모욕은 없었다"는 검찰 수사결과 발표는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서울고등법원 재정신청 사건 재판부는 다른 독자적인 증거조사는 일절 시행하지 않은 채 오로지 검찰수사기록에만 의거하여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문귀동의 성추행 사실을 인정하였습니다. 우리는 권양의 변호인들로서, 언론에 대하여 우선 무엇보다도 권양의 명예회복을 위한 조치를 취할 것을 요구합니다. 검찰발표 내용이나 '공안당국의 분석'내용이 전혀 터무니없는 것으로 드러났음을 분명히 밝혀주기를 요구합니다. 그동안의 모든 편파보도를 시정하고 권양을 근거 없이 비방, 중상하는 숱한 기사들이 보도된 경위를 일일이 해명할 것을 요구합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이것을 해낼 때에만 언론은 자신이 그동안에 권양에게 가한 부당한 박해, 한 연약한 처녀로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박해에 대하여 책임을 면제받을 수 있게 될 것이며, 무엇보다도 언론 스스로의 존재이유를 되찾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제 이 사건을 계기로 하여 우리는 국가와 권력의 존립 근거에 대해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국가란 그 구성원인국민의 인간적인 존엄과 가치를 보장하고 실현하기 위해서만 존재할 정당한 이유를 지니는 것입니다. 만약 국가의 공권력이 거꾸로 국민의 인간적 존엄성을 훼손하고 인간적 가치의 실현을 제약하는 파괴적힘으로 작용하게 된다면, 그 같은 공권력은 더 이상 존재하여야 할 의의를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성고문은 사건의 진전과정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 국가와 사회의 모든 기성의 권력과권위들이 심각한 도덕적 위기에 봉착하고 있음을 똑똑히 볼 수 있었습니다. 이제까지 우리가 경찰과 검찰과 사법부 그리고 언론에 대하여 말한 것은 우리 국가와 사회가 권양에게 가한 온갖 부도덕하고 비열한 박해와 일단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우리가 봉착하고 있는 전반적인 도덕적 위기의 한 징후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본 변호인단은 확신하거니와 이 도덕적 위기야말로 그 어떤 군사적, 정치적 혹은 사회 경제적 위기보다도 앞서는 우리 국가와 사회의 가장 근본적인 위기인 것이며, 이것이 정당하게 극복되지 아니하는 한 우리들과 우리 자녀들의 앞날은 실로 암담한 것이 될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위기의 순간에 권양은 하나의 기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왔습니다. 지난 7월 7일 변호인들이 인천 소년교도소로 그날까지 열흘째 단식을 계속하고 있던 권양을 찾아갔을 때, 권양은 배가 쓰리고 머리가 어지럽다고 하면서도 "이 분노를 그대로 삭힐 수가 없다. 차가운 교도소 마룻장을 베고 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까지도 진실을 밝혀 내고야 말겠다."고 말했습니다. 이 목숨을 건 진실에의 열정 하나만으로 권양은 끝내 이 불의한 세상의 온갖 권세를 이겨내었습니다. 권양이 그토록 열망하였던 진실, 다시는 이땅의 딸들이 자신과 같은 불행을 겪는 일이 없어지도록 하기 위하여, 국가 공권력에 의하여 인간의 존엄성이 이처럼 여지없이 짓밟히는 사태가 더 이상 지속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권양이 그토록 밝히려고 열망하였던 진실은 마침내 그 모습을 드러내었습니다. 이 진실을 밝히기 위하여 권양이 바친 그 모든 눈물겨운 희생과 헌신은 우리 나라 인권의 역사에서 두고두고 뜨거운 감사의 정과 더불어 기억될 것입니다. 권양은 우리에게 '진실에의 비밀은 용기뿐'이라는 교훈을 온몸으로 가르쳐주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이미 이 혼탁하고 타락한 세대의 신화가 되어버린 권양의 투쟁에서, 일찍이 김수영 시인이 노래하였듯이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흐르는가'를 배웠습니다. 권양이 처음으로 우리에게 다가왔을 때는 슬픔과 절망으로 왔으나, 이제 우리는 가슴 가득한 기쁨과 희망으로 권양의 승리에 대하여 증언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권양이 이미 도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고 말한 바 있으나 이제 머지 않은 장래에 현실적으로도 완벽한 승리를 거두게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이 엄청난 사건의 진실은 만천하에 낱낱이 공개될 것이며, 그 진실을 왜곡하고 은폐하려 들었던 모든 어리석고 비겁한 책동은 하나도 남김없이 타파될 것입니다. 이 진실의 최종적인 승리를 위하여 지금 이 자리에 선 우리 모두는 권양이 우리에게 바친 헌신에 만의 일이라도 보답할 수 있도록 각자의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하여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제 저 잔혹하였던 여름과 가을을 지나 권양은 이 법정에 섰습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눈물로써 호소하고자 하는 것은 빛나는 영혼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순결 무구한 처녀는 이 시대의 모든 죄악과 타락과 물의를 속죄하는 재물로서 역사의 제단 앞에 스스로를 받쳤으며, 우리들 중 그 누구도 이 시대에서 가장 죄가 없는 이 처녀는 더 이상 단 한시라도 차디찬 감옥 속에 갇혀 있게 하는 죄악에 공범자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권양, 온 국민의 가슴 속 깊은 곳에 은밀하고 고귀한 희망으로 자리잡은 우리의 권양은, 즉각 석방되어야 합니다 변호사 고영구 변호사 김상철 변호사 박원순 변호사 이돈명 변호사 이상수 변호사 조영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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