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추의 고구려 외교
11년…7월에 백제왕 의자(義慈)가 크게 군사를 일으켜 나라 서쪽의 40여 개 성을 공취(攻取)하였다. 8월에 또 고구려와 공모하여 당항성(?項城)을 취하여 당으로 통하는 길을 끊으려 하므로 왕이 사신을 보내어 당 태종(唐太宗)에게 급한 사정을 고하였다. 이 달에 백제 장군 윤충(允忠)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대야성(大耶城)을 공격해 빼앗아가니 도독(都督) 이찬(伊瑗) 품석(品釋)과 사지(舍知) 죽죽(竹竹)·용석(龍石) 등이 전사하였다. 겨울에 왕이 장차 백제를 쳐서 대야(大耶)의 일을 보복하려 하여, 이찬 김춘추(金春秋)를 고구려에 보내어 군사를 청하였다. 처음 대야에서 패할 때에 도독 품석의 처(妻)도 죽었는데 그녀는 춘추의 딸이었다. 춘추가 듣고 기둥에 기대어 서서 종일토록 눈을 깜짝이지 않고 사람이나 물건이 그 앞을 지나가도 알지 못하더니 얼마 후에 말하기를 "슬프다. 대장부가 어찌 백제를 멸하지 못하랴."하고, 곧 왕에게 나아가 말하되 "신(臣)이 고구려에 사신으로 가 그 군사를 청하여 백제에 대한 원수를 갚고 싶습니다."고 한즉 왕이 허락하였다. 고구려왕 고장(高臧)이 본래 춘추의 이름을 들은지라 군사의 호위를 엄중히 한 후에 그를 보았다. 춘추가 나아가 말하기를 "이제 백제가 무도하여 장사봉시(長蛇封豕)가 되어 우리 나라 땅을 침범하므로 저희 임금이 대국의 병마를 얻어 그 치욕을 씻으려 하여 하신(下臣)으로 하여금 하집사(下執事)에게 귀의함이라."고 하였다. 고구려왕이 이르되, "죽령(竹嶺)은 본시 우리 땅이었으니 네가 만일 죽령 서북의 땅을 돌려 보내면 원병을 보내겠다."고 하였다. 춘추 대답하되 "신은 임금의 명을 받들어 군사를 청하는 것인데, 대왕께서는 환난을 구원하여 이웃과 친선하려는 데는 뜻이 없으시고 단지 사신으로 온 사람을 위협하시니, 신은 죽을지언정 다른 것은 알지 못합니다."고 하매, 왕이 그말에 노하여 별관에 가두었다. - 삼국사기 5권, 신라본기 5, 선덕왕 11년 - 춘추가 훈신(訓信) 사간(沙干)과 함께 고구려에 사절로 가는데 대매현(代買縣)에 이르니 고을 사람인 두사지(豆斯支) 사간(沙干)이 청포(靑布) 300보(步)를 주었다. 고구려의 지경 안으로 들어가니 고구려왕이 태대대로(太大對盧) 개금(蓋金)을 보내어 맞아 객관(客館)을 정해 주고 잔치를 베풀어 우대하였는데, 누가 고구려왕에게 고하기를 "신라 사자는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이번에 온 것이 아마도 우리의 형세를 살펴보려는 것이오니 왕은 도모하시어 후환을 없애소서." 하였다. 왕은 무리한 질문을 하여 그가 대답하기 어렵게 함으로써 욕을 보이려고 일러 말하기를, " 마목현(麻木峴)과 죽령(竹嶺)은 본래 우리나라 땅이니 우리에게 돌려주지 않으면 돌아갈 수 없다."고 하였다. 춘추가 대답하기를 "국가의 토지는 신하된 사람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은 감히 명령을 좇을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왕이 노하여 그를 가두고 죽이려 하여 아직 수행하지 않았는데 춘추가 청포 300보를 비밀히 왕이 총애하는 신하 선도해(先道解)에게 주었다. 도해(道解)가 음식을 가지고 와서 함께 술을 마셨다. 한창 술이 무르익을 무렵에 우스개 소리로 말하되 < 그대는 일찍이 거북과 토끼의 이야기를 들었는가? > <옛날 동해 용왕의 딸이 심장을 앓았는데 의원의 말이 토끼의 간을 얻어 약을 지으면 치료할 수 있으리라고 하였다. 그러나 바다 가운데에는 토끼가 없으니 어찌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이 때 한 거북이가 용왕에게 아뢰어 자기가 그것을 얻을 수 있노라고 하고 육지로 나와서 토끼를 보고 하는 말이 바다 속에 하나의 섬이 있는데 맑은 샘물과 흰 돌에 무성한 숲, 아름다운 열매가 있으며 추위와 더위도 없고 매나 새매가 침입하지 못하니 네가 가기만 하면 편히 지내고 아무 근심이 없을 것이라 하고 이어 토끼를 등에 업고 헤엄쳐 2·3리쯤 가다가 거북이 토끼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지금 용왕의 딸이 병이 들었는데 토끼의 간이 있어야 약을 짓기 때문에 이렇게 수고로움을 무릅쓰고 너를 업고 오는 것이라 하였다. 토끼가 아아 나는 신명의 후예라서 능히 오장을 꺼내어 씻어 넣을 수가 있다. 일전에 속이 좀 불편한 듯하여 간을 꺼내 씻어서 잠시 바위 밑에 두었는데 너의 감언을 듣고 바로 왔기 때문에 간이 아직도 그곳에 있으니 어찌 돌아가서 간을 가져오지 않을 것인가 그렇다면 너는 구하는 것을 얻게 되고 나는 간이 없어도 살 수 있으니 어찌 이쪽 저쪽이 다 좋은 일이 아니냐 하니 거북이 그 말을 믿고 도로 나가 언덕에 오르자마자 토끼는 풀속으로 도망치며 거북에게 말하기를 너는 어리석기도 하구나 어찌 간 없이 사는 자가 있을 것인가 하니 거북이 멍청하여 아무 말도 없이 물러갔다고 한다> 하였다. 춘추가 그 말을 듣고 그 뜻을 알게 되었다. 왕에게 글월을 보내어 말하기를 "두 령(嶺)은 본래 대국의 땅입니다. 신이 귀국하면 우리 왕께 청하여 돌려 드리겠습니다. 내말을 믿지 못한다면 저 해을 두고 맹세하겠습니다." 하니 왕이 그제야 기뻐하였다. - 삼국사기 41군, 열전 1, 김유신 上 - |
사료해석 : 김춘추의 외교에 대한 유명한 사료입니다. 김춘추는 의자왕 원년부터 시작된 백제의 공세로 신라가 위축되자 타개책으로 고구려에 원조를 요청합니다.
그런데 이 사료를 보면 김춘추식의 초기 외교의 한계를 엿볼 수 있습니다. 신라가 국제 관계 및 국제 외교에 미숙함을 잘 보여주고 있지요. 고구려에 가서 원조를 청하나, 그 대가로 무엇을 줄 지 고민한 흔적이 없습니다. 또 고구려에게 땅을 주겠다고 약조한 뒤 약조를 지킬 지는 훗날 결정해도 될 일이지만, 김춘추는 그냥 감옥에 가는 것을 택하네요.
이후 고려시대 서희가 언어로써 강동 6주를 획득한 국제 외교의 노련함을 볼 때 이 당시 신라의 외교는 고구려나 백제의 외교에 비해 한참 떨어집니다. 이러한 미숙함을 김춘추가 깨달은 후 당에 가서 외교할 때에게 고구려에게 주어야 할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주고 원조를 성사시킨다는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김춘추가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를 듣고, 외교적인 미숙함을 깨닫는 다는 이 이야기는 설화로도 구전되는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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