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무열왕의 등극
진덕왕(眞德王)이 돌아가매 뭇 신하들이 알천(閼川) 이찬(伊瑗)에게 섭정(攝政)을 청하였더니 알천이 짐짓 사양하되 "나는 나이 늙고 이렇다할 만한 덕행도 없다. 지금 덕망이 높기는 춘추공(春秋公)만한 이가 없으니 그는 실로 제세(濟世)의 영웅이라 할 수 있다."고 하였다. 군신(群臣)이 드디어 춘추를 추대하여 왕을 삼으니 춘추는 재삼 사양하다가 마지못하여 왕위에 올랐다. - 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 태종무열왕 - |
사료해석 : 645년 상대등에 취임한 비담은 647년 선덕여왕이 정치를 잘못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스스로 왕위에 오르려고 염종 등과 더불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신라 최고의 관직인 상대등이 일으킨 반란이므로 그 규모가 컸고, 사태도 매우 위급하게 전개되었죠. 반란의 와중에 선덕여왕이 죽고 진덕여왕이 즉위하는 등 왕실이 위기를 맞이하였습니다. 신라사회에 여왕들이 등장한다는 것 자체가 약간 여성무당(샤머니즘)의 냄새가 나면서, 그만큼 사회가 안정적이지 못한 증거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김춘추(金春秋) ·김유신(金庾信) 등의 도움으로 반란을 진압하고 비담 등 주모자의 구족(九族)을 멸하였습니다. 이 반란은 단순한 왕위쟁탈전이 아니라 신라 정치사에서 한 획을 긋는 사건이었는데, 신라는 중고기(中古期:법흥왕~진덕여왕)에 들어가면서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정치사회이념으로 불교를 받아들이면서 왕권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화정책을 강력히 추진한 것과 연관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선덕여왕 이후는 귀족에 의해 폐위된 진지왕의 손자인 김춘추와, 가야 멸망 이후 신라의 새로운 김씨로 포섭된 가야왕실의 후손 김유신이 손을 잡고 이러한 정책을 더욱 강하게 밀고 나갔습니다. 이에 자신들의 위치가 불안하게 된 귀족은 불만을 표출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이것이 대대적으로 표출된 것이 바로 귀족의 대표인 상대등이 중심이 된 이 난이였습니다. 이 난은 비담과 알천의 난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승리는 결국 김춘추 ·김유신에게 돌아가, 이들이 중심이 되어 더욱 강력한 왕권강화와 중앙집권체제에 필요한 여러 시책들이 실시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김춘추가 태종무열왕으로 즉위함으로써 귀족연합체제를 이루던 상대(上代)가 막을 내리고, 중대(中代)가 시작되면서 왕권 중심의 중앙집권체제가 이루어집니다. 이 때 부터를 삼국사기는 전제왕권의 확립기로 규정하면서 <신라 중대가 시작되었다>라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 난은 신라 상대 말기에 왕권을 견제하려던 귀족세력과 왕권강화를 통한 중앙집권체제를 수립하려던 왕실세력의 싸움이었고, 여기서 김춘추 ·김유신 등의 왕실세력이 승리함으로써 장차 신라 중대 왕실이 성립되는 계기를 마련해 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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