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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풀이/역사 사료와 데이터

김춘추와 당태종간의 외교

 

김춘추의 대당외교

정관(貞觀) 22년(진덕여왕 2년; 648년)에 진덕(眞德)이 그의 아우인 국상(國相) 이찬간(伊贊干) 김춘추(金春秋)와 그 아들 문왕(文王)을 보내와 조근(朝覲)하였다. 조서를 내려 춘추에게는 특진관(特進官)을 제수하고, 문왕에게는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을 제수하였다. 춘추가 국학(國學)에 나아가 석전(釋奠) 및 강론(講論)의 의식을 참관하겠다고 청하므로, 태종은 이로 말미암아 친히 지은 《온탕(溫湯)》·《진사비(晋祠碑)》와 새로 편찬한 《진서(晋書)》를 내려주었다. 김춘추 등이 본국으로 돌아갈 때 3품 이상의 관원으로 하여금 전별연(餞別宴)을 베풀어 주는 등 예우가 극진하였다.

- 구당서 199 상, 열전 149 상, 동이 신라  -

왕이 이찬 김춘추와 그 아들 문왕(文王)을 보내어 당에 조알(朝謁)하도록 하였더니 태종(太宗)이 광록경(光祿卿) 유형(柳亨)을 시켜 교외(郊外)에서 춘추를 위로해 맞게 하였다. [춘추가] 도착하자 태종은 춘추의 거동이 법도가 있는데다 영특하고 뛰어남을 보고 후히 대접하였다. 춘추가 국학(國學)에 나아가 석전(釋奠) 및 강론(講論)을 참관하기를 청하니 태종이 이를 허락하고 자기가 지은 온탕비(溫湯碑)·진사비(晉祠碑)와 새로 찬술한 《진서(晉書)》를 주었다.

또한 직접 춘추를 불러 한가로이 만나 보고 금백(金帛)을 더욱 후히 주며 묻기를 "경(卿)은 마음에 깊이 품은 바가 있는가?"고 하였다. 춘추가 꿇어앉아 말하기를 "신(臣)의 나라는 바다 한 구석에 치우쳐 있으면서도 천조(天朝)를 섬겨 온 지 이미 여러 해입니다. 그런데 백제가 굳세고 교활하여 누차 함부로 침략하더니 급기야 지난 해에는 대대적으로 군사를 일으켜 깊이 쳐들어와서는 수십개의 성을 공격해 빼앗음으로써 조종(朝宗)의 길을 막았으니 만약 폐하가 천자의 군대를 빌어 그 흉악함의 싹을 베어버리지 않는다면 저희 나라의 인민은 죄다 사로잡히고 말 것인즉 앞으로 다시는 멀리 찾아와 조회하고 아뢰지(梯航述職) 못할 것입니다."고 하였다.

태종이 정말로 그러리라고 여겨 군대의 출동을 허락하였다. 춘추가 또 예복을 고쳐 중국의 제도를 따르겠다고 청하자 이에 진귀한 의복을 내어 춘추와 그 종자(從者)에게 주고, 조칙을 내려 관직을 제수하되 춘추는 특진(特進)을, 문왕은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을 삼았다. 춘추가 귀국할 때에는 3품 이상의 관리들에게 명하여 송별의 잔치를 열게 하니 그 우대하는 예법이 매우 극진했다.

- 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 5, 진덕왕 2년 -

사료해석 : 김춘추의 대당외교에 대한 사료입니다. 김춘추가 고구려에서 외교를 실패한 후, 고구려에서의 태도와는 사뭇 다른 모습으로 외교에 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문제는 당의 태도가 신라를 신하국로 생각하고 있음이 보이며, 의복과 관직을 제수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속국으로 여기는 생각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료는 당시 신라의 고립과, 당의 제국주의적 확장정책이 일치하여, 상호간의 협조가 필요했음을 보여주는 사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