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식읍과 늑읍
좌사록관은 문무왕 17년에 두었다. 우사록관은 문무왕 21년에 두었다. - 삼국사기 4권 38, 잡지 7, 직관 상 - 교령을 내려 내외관의 녹읍을 없애고 해마다 조를 차등있게 하사하는 것을 항식으로 삼도록 하였다. - 삼국사기 권 8, 신라본기 8, 신문왕 9월 정월 - 내외 군관의 월봉을 없애고 녹읍을 다시 지급하였다. -삼국사기 권 9 신라본기 9, 경덕왕 16년 3월 - 무열왕 4년(657년) 태종대왕이 김인문을 압독주(경산 지역)총관으로 제수하였는데, 이에 장산성을 쌓아 요새로 만드니, 태종이 그 공을 기록하고 식읍 300호를 주었다. - 삼국사기 권 44 열전 4, 김인문 - 문무왕 8년(668) 문무대왕은 인문의 영특한 계략과 용맹한 공로가 특이하다 하여 죽은 대탁각간 박뉴의 식읍 300호를 내렸다. - 삼국사기 권 44, 열전 4, 김인문 - 문무왕 8년 김유신에게 태대서발한의 직과 식읍 500호를 제수하고 여장(수레와 지팡이)을 하사하였다. -삼국사기 권 43 열전 3, 김유신 하 - |
참조글 : 식읍은 공신들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어 해당 지역의 지역 지배를 인정한 것입니다. 녹읍 역시 지역지배적 성격은 있었으나, 국가가 감시와 규제를 강화하기 위하여 끊임없는 규제책을 마련하면서 될 수 있으면, 면적 단위의 성격으로 바꾸려고 했던 부분들이 보입니다. 최근에는 녹읍을 <수조권적인 지배>형태로 보려는 관점이 있습니다. 녹읍은 국가가 하사한 땅이되, 식읍처럼 산천을 경계로 한 지역단위로 하사한 것이 아니라, 국가가 통제할 수 있는 일정 지역을 하사한 것이라는 견해이죠.
이러한 토지에 대한 통제가 극대화 된 것이 전제 왕권이 성립된 신문왕대 <관료전 지급 후, 녹읍 폐지>라는 결과입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귀족들의 반발로 경덕왕 대 다시 녹읍이 부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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