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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풀이/히스토리아 역사 스토리

그리스인 이야기 7 - 페르시아 전쟁과 아테네 민주정치의 모래성같은 전성기

페르시아 전쟁과 페리클레스의 민주정치

1. 아테네는 민주정치를 위해 돈이 필요했다.

자, 우리는 클레이스테네스 시기에 민주정치의 기반인 <전 시민의 완전한 평등권 확립>이라는 것이 완성된 것을 보았습니다. 이제 아테네는 완전한 민주정치사회로 나아갈 사상적 기반은 완성한 것이지요. 그러나, 이러한 민주정치를 하기 위해서는 모든 시민이 정치에 전념할 수 있다록 경제적 기반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마침 아테네에서는 이러한 경제적 기반을 마련할 수 있는 일대의 대사건이 그리스 본토에 터집니다. 그것은 바로 페르시아 전쟁이었지요.

2. 페르시아 전쟁이란 무엇인가?

페르시아 전쟁이란 말 그대로 동방의 맹주인 페르시아와 그리스의 폴리스들간의 치열한 전쟁을 말합니다. 이 전쟁이 발생한 원인을 살펴보면, 그 배경은 오리엔트를 통일한 페르시아가 서방으로 영토를 확장하면서 소아시아를 정복하기 시작하면서 시작됩니다. 이 소아시아와 이오니아 지방이 그리스의 식민시였다는 것은 지금까지 설명했었죠? 이 식민도시들은 페르시아의 침입에 당황하여 서로 뭉치지 못하였고, 폴리스 초기의 상황처럼 폴리스끼리 분립하고, 전쟁을 위해 각 도시별로 집주하면서 뭉치지 못하였습니다. 오히려 페르시아의 칩입을 막을 방도를 놓고 의견이 달라 내분만 일어났죠. 결국 소아시아의 식민도시들을 그리스 본토에 구원요청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채 정복당합니다. 이오니아 식민시들은 동방의 전제군주에게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잔인하게 진압당하였죠.

이렇게 소아시아를 정복한 페르시아는 지중해 진출을 놓고 폴리스 국가들과 정면으로 대립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페르시아 전쟁>이지요. 페르시아 전쟁 때 페르시아는 그리스 본토에 3번 침공하였습니다.

1차 전쟁 때 페르시아는 그리스를 침공하려고 대군단을 몰고 오다가 해상에서 폭풍을 만나 철수하고 맙니다. 이 1차 침입을 계기로 그리스의 폴리스 국가들은 소아시아처럼 정복당하지 않기 위해서 폴리스 연합을 견고하게 구축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 연합에서 아테네가 맹주를 차지하려고 하자 아테네에 적대적인 폴리스들은 전쟁 참가를 거부하면서 다시 내분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2차 전쟁 때 페르시아의 침공은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전쟁이 아니라, 아테네군과 페르시아의 전쟁이었습니다. 아테네는 오리엔트의 강대한 페르시아와 처절하게 전쟁을 벌였습니다. 아테네는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여 페르시아군을 괴롭혔고, 결국 그 유명한 <마라톤 전투>에서 극적으로 페르시아군을 괴멸시키면서 2차 페르시아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냅니다. 중요한 것은 이 페르시아 전쟁을 이끈 아테네군의 주력이 기병귀족이 아니라 달리는 중장보병이라 불리는 평민들이었다는 점이지요. 유명한 일화 아시죠? 전쟁에 승리한 아테네 병사가 승리를 알리기 위해 42km를 뛰어와 승리를 알리고 죽었다는 일화요. 그래서 마라톤이라는 올림피아 제전의 운동이 생겼다는 이야기가 있죠. 이 42km를 달린 이들이 바로 달리는 중장보병인 <새로운 팔랑크스>인 것이죠.

즉, 2차 전쟁으로 아테네가 얻는 것은 2가지입니다.

1번째는 이제 그리스 어떤 국가도 아테네가 맹주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혼자 페르시아랑 격전을 벌였으니까요. 2번째는 아테네의 승리를 이끈 평민계급의 시민들에게 훗날 혜택을 주지 않을 수 없다는 점입니다.

페르시아와의 3차 전쟁은 이제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 전체 연합군과 페르시아군의 가장 큰 대격돌이었습니다. 이 3차 전쟁은 아테네가 살라미스 해전에서 페르시아군을 격파하면서 승기를 잡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스파르타를 포함한 연합군이 플라타이아 육상 전투에서 페르시아군을 격파하면서 그리스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이 전쟁을 계기로 국력을 너무 소진한 페르시아는 점차 쇠퇴의 길을 걷게 됩니다.

이 전쟁에 대해 고대 유명한 역사가이자 역사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헤로도토스는 이렇게 평가하였습니다. 이것은 동방의 전제주의에 대항한 폴리스 자유시민의 승리였다고....

3. 페르시아 전쟁이 아테네에게 남긴 것은?

페르시아 전쟁이 끝나자 그리스 사회는 그 사회구조가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그 내용은 이제 각각 분립된 자유로운 폴리스 국가들이 주권을 가진 형태를 탈피하는 것이라 정의할 수 있습니다. 즉, 전쟁에 이긴 아테네가 그리스의 맹주가 되어 아테네가 제국화되어 버리는 현상이 생간 것이지요.

아테네는 페르시아 전쟁 중 <델로스 동맹>이라는 것을 체결하여 동맹국을 이끌고 페르시아를 격파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전쟁중 일시적으로 구성한 이 델로스 동맹은 전쟁이 끝난 다음에도 계속 존속하였다는 점입니다. 아테네는 페르시아가 다시 침략할 수 있다는 이유로 동맹을 유지하였고, 이것은 폴리스는 각각 자유로운 도시국가라는 전통적 분립주의 이념을 무시하는 것이었습니다. 아테네는 페르시아 재침 방지를 위해 동맹에게 계속 공납금을 걷어 델로스섬의 금고에 넣어두었는데, 이것은 점차 동맹국을 협박하여 얻어내는 강제적 공납금 성격으로 바뀌게 됩니다.

아테네 입장에서는 동맹을 해체하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왜냐면 동맹의 해체는 그동안 아테네의 경제를 지탱하던 경제적 자원줄이 줄어든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또, 동맹을 해체하면 아테네의 경제적 기반은 오로지 노예들의 노동밖에 없게 됩니다. 아테네 시민들은 자유를 추구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일을 안하거든요.

더욱이 페르시아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중장보병 밀집대 평민(달라는 기동적 팔랑크스)와 마라톤, 살라미스 해전에 참여한 수군들 역시 시민으로서 대우를 해줘야 하는 상황에서 더욱 돈은 많이 필요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아테네는 전쟁 중 평민들이 더 성장하여 시민적 대우는 높아졌는데, 민주정치를 위한 돈이 필요했으므로 델로스 동맹을 계속 유지하면서 주변국을 착취한 것입니다. 즉, 아테네 민주정치의 기반은 동맹국에서 빼앗아오는 공납금과 노예제도였던 것이지요. 따라서 주변국의 불만은 너무나 커졌고, 그리스의 멸망은 이 불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4. 겉으로는 완벽한 페리클레스의 민주정치 시대

자 이제 페르시아 전쟁으로 아테네는 완벽한 민주주의를 추구할 수 있는 경제적 자원줄을 얻게 되었습니다.

페르시아 전쟁 참여로 성장한 평민, 노동자 계급에게는 델로스 공납금을 통한 보상이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페리클레스가 집권하는 시기의 아테네는 너무나 찬란한 민주정치시대의 전성기를 맞이합니다.

이 페리클레스 시기의 민주정치의 기관을 먼저 한번 봅시다.

1. 입법권 - 민회의 권한 강화

클레이스테네스 시절의 500인회가 가진 권한을 축소하고 민회가 모든 입법권을 행사하도록 하였습니다. 500인회라는 행정부는 민회에 종속되었습니다. 즉, 500인회는 민회에 제출할 안건 준비, 민회의 결정을 집행하는 정도의 행정적 성격만을 남기고, 모든 입법권은 민회로 넘어갑니다. 민회는 최고 의결기관으로 18세 이상의 성인남자시민의 다수결로 모든 안건을 정하는 <직접민주주의>를 원칙으로 합니다. 민회는 외교, 전쟁, 식량공급 및 입법업무까지 다양한 업무를 포괄하였습니다.

2. 행정권 - 10인장군의 권한 확대

클레이스테네스 시기의 10인장군은 이제 모든 내외정책을 직접수행하면서 시민을 대표하는 최고 권력으로 부상합니다. 그들은 1년씩 임기를 정해 매년 재선으로 선출하였습니다. 이제 귀족회의인 아레오파구스회의는 있으나 마나한 회의가 되었고, 10인장군이 내각을 구성해 실무를 보게 되었습니다.

3. 사법권 - 시민법정

클레이스테네스 시기의 500인 시민법정은 이제 배심원 6000명을 가진 유일무이한 사법기관으로 성장합니다. 이 시민법정은 법관이 없이 시민들이 다수결로 배심하여 판결하는 직접민주적 성격의 법정입니다. 중요한 것은 아테네의 시민법정은 주변 동맹시의 소송까지도 취급하였다는 점입니다. 물론 주변국들은 불만이 많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요. 이 때는 아테네가 그리스 전체와 상대할 정도로 부유했으니까요.

이번에는 이러한 민주정치를 위한 제도적 장치들을 한번 볼까요?

1. 추첨제  : 10인 장군은 1년씩 재선투표를 하지만, 그 이하 모든 공직자는 추첨으로 돌아가면서 정치를 하게 함.

2. 1년임기제 : 10인 장군은 임기를 1년으로 한정하여 독재를 막고, 능력에 따라 다시 재선하도록 함.

3, 수당제 : 민회에 참석하는 자, 추첨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자, 연극을 관람하는 자들까지도 모두 수당을 지급함.(이 수당제는 페르시아 전쟁이후 성장한 최하빈민계급까지 정치참여를 보장한다는 성격이 있습니다.)

5. 페리클레스 민주주의는 모래성과 같았다.

이렇게 완벽해 보이는 민주정치... 역사에서 보기 힘든 <시민참여에 의한 직접민주주의 제도>는 커다란 한계점이 있었습니다. 그 한계점을 몇가지로 정리해 볼까요?

1. 재유외인, 노예, 여자를 제외한 민주주의이므로, 숫적으로 제한된 좁은 의미의 민주주의였다는 점

2. 노예제를 기반으로 한 민주주의로서 노예의 생산력이 떨어지면 민주주의 자체가 붕괴될 수 있다는 점

3. 델로스 공납금을 통한 협박으로 자금을 마련한 민주주의로서 민주주의가 완성될수록 주변국의 불만이 높아진다는 점

4. 민주주의가 진행될수록 국고부담이 커지기 때문에, 시민권을 확대하기보다 줄여나가야 하는 민주주의라는 점
      (예로 페리클레스는 재정부담 때문에 시민권을 축소합니다. 즉, 부모가 모두 시민권을 가진 자만을 시민으로 인정하고, 나머지는 시민에서 제외시켜가는 것이지요. 이것은 국내에서도 불만계층을 만드는 역효과를 가져옵니다.)

5. 유능한 지도자가 없으면, 시민들끼리 의견통합이 안되면서 중우정치나 민중지배로 돌아서는 정치라는 점
     (실제 페리클레스가 죽은 후 클레온은 독재정치를 시도했으며, 지도가자 없는 경우 어리석은 민중들의 오합지졸 정치가 반복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문제점은 그리스 민주주의의 전성기를 아주 짧게 단명시키는 결과를 낳습니다. 노예반란, 주변국 반란, 내란이 아테네를 감싸게 되며 민주정치 붕괴와 함께 아테네의 전성기는 그리스 역사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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