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마뉴 대제(카롤루스 대제, 카알 대제)
1. 광대한 영토 확장 사업 샤를마뉴 대제는 피핀의 아들입니다. 그는 피핀이 교황령을 분배하여 적극적인 교황 옹호자가 되었고, 교황의 지지를 바탕으로 서유럽 정복사업을 추진하였습니다. 그는 정복전쟁에 성직자를 동반하였습니다. 그것은 민심을 수습하는 동시에, 정복지에 새로운 교구를 설치하는 작업을 하기 위함입니다. 로마 제국이 제국의 행정구역과 교회의 교구를 일치시켰던 것과 같은 맥락이네요. 또 국경에는 변경주라는 것을 설치하여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국경을 경계하고 서유럽을 크리스트교의 전초기지로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샤를마뉴는 우선 교황령을 위협하는 롬바르드족을 완전 소멸시키고, 북으로는 섹슨족을 정벌하여 카톨릭으로 개종시킵니다. 동쪽으로는 엘베강 유역으로 진출하여 서유럽의 경계를 엘베강으로 확정합니다. 이 엘베강은 아주 오랜기간 동안 서유럽과 동유럽의 경계선으로 남아 유럽 문화를 구분하는 기준이 됩니다. 그러나 이슬람 제국이 점령하고 있던 에스파냐에 대한 정복은 결국 실패하고 맙니다. 그는 에스파냐 변경주를 설치하여 이슬람과 완충지대로 만들었습니다. 그 유명한 <롤랑의 노래>도 여기에서 나옵니다. 롤랑은 이 완충지대를 확정하기 위해 이슬람과 협상을 하라는 왕의 명령을 받습니다. 서기 778년 이슬람의 왕 사라고사와 협상을 하기 위해 샤를마뉴 대제는 롤랑의 계부 가늘롱을 사신으로 바견했습니다. 그러나 롤랑을 평소에 미워하던 가늘롱은 롤랑이 자신을 죽이기 위해 사신으로 추천했다고 오해하고 롤랄을 죽일 계획을 꾸밉니다. 거짓평화조약을 맺고 돌아온 가를롱은 샤를마뉴에게 롤랑을 변경주 책임자로 천거합니다. 샤를마뉴 대제는 롤랑을 믿고 돌아갑니다. 그러나 가늘롱은 샤를마뉴가 돌아간 이후 롤랑의 군대를 공격하였습니다. 롤랑은 열심히 싸웠지만, 결국 원군을 청하는 뿔피리를 불고서 죽습니다. 뿔피리 소리를 듣고 샤를마뉴가 도착했을 때, 용감한 롤랑의 부대는 모두 전멸한 상태였습니다. 이것이 롤랑의 노래 줄거리입니다. 이러한 정복전쟁으로 영토는 제국화 되었고, 과거 서로마 제국의 영광을 재현하는데 성공합니다. 2. 서로마 제국의 대관 교황 레오 3세는 샤를마뉴에게 서로마 제국의 대관을 씌워줍니다. 그리고 얼마 후 비잔틴 제국의 황제도 이것을 정식으로 승인합니다. 즉, 크리스트교를 매개로 로마-게르만-카톨릭이라는 중세 유럽의 질서가 샤를마뉴에 의해 완성됩니다. 이것은 교회와 국가라는 중세 유럽의 쌍두마차 체제가 확립되어 <서유럽 문화권>이 완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반면 이것은 교회의 권력과 황제의 권력 중 무엇이 우선하는가라는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하지 못함으로서, 신성로마제국이 성립된 이후 끝없는 교권과 황제권의 투쟁을 암시하기도 합니다. <카노샤의 굴욕>, <아비뇽의 유수> 등으로 대표되는 교권과 왕권의 갈등은 샤를마뉴와 카톨릭의 연합이 낳은 근본적인 문제점입니다. 3. 샤를마뉴대제의 통치 제도 샤를마뉴는 엄청난 영토를 정복한 정복왕이였지만, 그 통치방식은 중앙집권적이지 못했습니다. 거의 지방분권적인 봉건제도 수준의 통치방식을 택합니다. 그는 정복지의 치안, 사법, 군사를 담당할 자들로 교회의 주교구를 택합니다. 즉, 영토는 넓었지만 그 영토를 분배함에 있어 교회의 눈치를 본 것이지요. 또 행정단위로 주와 변경(주백, 변경백)을 설치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행정구역은 왕의 명령이 통하는 샤를마뉴 시기에만 통하였습니다. 순찰사를 파견하는 것도 샤를마뉴 시기에만 통하였지요. 실제, 게르만의 이동 등 수많은 민족이동이 있는 시기에 정치, 경제, 사회는 혼란하였으므로 강력한 중앙집권은 통하기 힘듭니다. 따라서 주백, 주교, 귀족 등은 상당한 독립성과 권력을 스스로 보유한 국가체제였습니다. 즉, 강력한 왕 밑에 수많은 봉건제후들이 존재하는 지방분권 사회와 유사합니다. 4. 카롤링거 르네상스 샤를마뉴는 문예부흥에 앞장선 군주입니다. 그의 문예 부흥 운동을 <카롤링거 르네상스>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과거에는 중세시대는 기독교식 마녀사냥이 주를 이룬 암흑시대요, 실제 문화적 발전기는 르네상스 이후 근대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카롤링거 르네상스라던가, 중세 후기 도시의 성장 등을 바탕으로 중세 역시 문화적 발전기였다라는 증거들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단, 증거가 너무 단편적이고, 시기적으로 단기적이여서 고증이 많이 필요하긴 합니다. 이 때 문예부흥을 보면, 우선 유명한 알퀸의 궁정학교가 있습니다. 저명한 교사 알퀸을 등용하여 교육을 장려했지요. 또 수도원에서는 필사를 통한 고전 연구가 활발하였습니다. 이것은 중세가 암흑기가 아니라는 증거인 동시에 역사적으로 서유럽 문화권이 정착되었음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술했던 너무 미약하고, 단기적인 르네상스입니다. 오히려 중세가 암흑시기 이기에 이런 자그마한 문예부흥도 르네상스라고 과장된 측면이 보입니다. 또 이것이 르네상스가 되려면 일반 서민계층의 적극적인 참여도 필요하며, 대중적인 운동도 있어야 할 텐데, 궁정학교 설립 등은 독창적이고 창조적인 서민운동은 아닙니다. 이 운동의 성격은 훗날 더 자세히 평가되야할 듯 싶네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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