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롤링거 왕조의 성립과 교황령의 시작
1. 7c의 혼란 프랑크 왕국의 건국자 클로비스의 메로빙거 왕조가 성립된 후 150여년이 지났습니다. 100년 이상이 지나는 동안 프랑크 왕국은 앞 장에서 설명했듯이, 여러 가지 이유로 망하지 않고 근근히 국가 형태를 유지했습니다. 그러나 7c가 되면서 프랑크 왕국은 혼란을 겪게 됩니다. 그 이유는 프랑크족의 관습때문이였습니다. 프랑크족들은 재산을 상속할 때, 장자 상속제가 아니라 균등 상속제입니다. 즉, 왕자들이 많다면 그 왕자 사이에 일정한 비율로 영지를 분할하는 것이 그들의 제도였습니다. 이것은 왕위 상속을 놓고, 왕자들간의 내분이 일어날 소지가 많은 제도였습니다. 결국 내분과 갈등이 지속되는 동안, 왕국의 실권을 잡은 것은 궁재(재상) 마르텔이였습니다. 그는 영웅적인 면모를 보이며 수많은 전투와 위기를 극복한 영웅이였고, 프랑크 왕국은 메로빙거 왕조를 버리고, 마르텔의 카롤링거 왕조를 택하게 됩니다. 특히, 당시 유럽세계를 벌벌떨게 하였던 이슬람 세력이 이베리아 반도를 넘어 유럽 중앙부까지 진출하려 하자, 마르텔은 투르-푸아티에 전투를 통해 이슬람 세력을 격파하였습니다. 이 한판의 전투는 유럽의 역사를 완전히 바꿀 수 있는 중요한 전투였습니다. (투르 전투는 실제 마르텔의 업적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푸아티에 전투는 마르텔의 카롤링거 왕조의 정당성과 위대성을 부각하기 위해 조작한 것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하나 증거도 입증된 것은 없네요.) 마르텔의 아들 피핀에 의해 카롤링거 왕조가 성립된 이후 마르텔 - 피핀 - 샤를마뉴의 3대 시기는 프랑크 왕국의 최전성기였습니다. 2. 피핀과 교황령 마르텔의 아들 피핀은 프랑크 왕국이 교황과 제휴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합니다. 당시 피핀은 아버지의 영광을 등에 업어 <카롤링거 왕조>라는 새로운 왕조를 창업하려 했고, 운 좋게도 당시에 창업에 유리한 여러 가지 조건들이 있었습니다. 그럼 그 조건들을 살펴볼까요? 먼저, 종교적인 측면에서는 당시 <성상숭배금지령>문제로 로마 교회가 피핀의 지지를 얻고 싶어했다는 점입니다. 성상숭배금지령이란 성상금지문제로 인해 로마 교황과 동로마 황제가 갈등을 일으킨 사건입니다. 이 사건의 개요는 이렇습니다. 로마 교황은 당시 게르만족의 이동으로 게르만인에게 카톨릭 교리를 설파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게르만족들은 하느님의 존재와 예수, 성모마리아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믿으려고 한 것이지요. 로마 교황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 상, 성모마리아 상을 만들어 게르만을 교화하려고 했습니다. 이것을 본 동로마 황제는 로마 교황이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십계명을 어긴 것이라고 하면서 <성상 철폐>를 요구했습니다. 그러자 로마 교회는 게르만족의 교화사업 문제는 로마의 내정이라면서 거부했죠. 또 동로마 황제가 로마 교회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 불쾌했습니다. 거기에 교리 문제도 있었죠. 로마 교회는 이미 콘스탄티누스 이후 <삼위일체설>을 정동교리로 확립했는데, 동로마에서는 그것을 공인하지 않았습니다. 비잔틴 제국(동로마 제국)의 레오 3세는 성상숭배 금지령을 공식 발표합니다. 그런데, 비잔틴 제국도 성상금지령을 발표한 정치적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대토지를 가진 수도원 세력을 억제하여 수도원이 대토지를 가진 권력가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였죠. 따라서 성상숭배금지는 성상을 숭배하는 수도원을 철저하게 감시하는 효과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 교황은 이것도 불만이였죠. 레오 3세의 성상금지령(8c : 726)은 로마 교회와 동로마 제국이 갈등을 일으킨 시초입니다. 그리고 11c(1054년)에 로마 교회의 지지를 받았던 노르만족이 남이탈리아를 정복하면서 동로마와 큰 갈등을 일으키게 되는데, 이것으로 동, 서 교회는 영원히 결별하였습니다. 크리스트교 세계가 카톨릭과 그리스 정교로 분열되어 버렸죠. 아무튼, 이 당시 성성금지령으로 가장 큰 이익을 본 자는 피핀입니다. 로마 교황은 동로마를 견재하기 위한 대항마로서 프랑크 왕국의 피핀을 키우려고 한 것입니다. 다음으로 정치적인 측면을 볼까요? 피핀이 왕조를 개창한 정치적 이유는 북이탈리아에서 <롬바르드족이 팽창>하였기 때문입니다. 게르만족의 일파인 롬바르드족은 끊임없이 팽창하면서 로마 교회를 괴롭했습니다. 로마 교황은 프랑크 왕국이 롬바르드족을 물리쳐줄 것이라고 기대했죠. 그래서 카롤링거 왕조를 개창하는 것을 적극 지지한 것입니다. 피핀은 롬바르드족이 점령한 <라벤나>지역을 점령해버렸습니다. 교황은 감사하다며 직접 피핀의 도유식을 거행해줍니다. 이렇게 해서 피핀은 왕조를 개창했습니다. 피핀은 라벤나 및 중부이탈리아의 영토를 교황에게 기증해주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황령>의 시작인 것입니다. 현재 위작으로 알려진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장도 당시 작성되었다고 합니다. 결과적으로 피핀과 교황은 <Give And Take>한 것이네요. 서로를 도우며 서로를 인정하는 프랑크 왕국 - 로마 교회의 협조체제가 시작된 것입니다. 카톨릭 - 프랑크 왕국의 유대관계는 클로비스가 카톨릭으로 개종한 메로빙거 시대에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카톨릭- 프랑크 왕국이라는 협조에 의해 유럽세계가 형성되어 유럽사의 주요한 흐름을 형성한 것은 바로 이 피핀 시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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