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불교를 이용한 정보전
1. 불교의 수용과정에서의 대립 요즘 뿌리깊은 한국사라는 책을 읽고 있는데, 이 책에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던 내용과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고대사를 바라보고 있더군요. 그런데, 좀 읽다보면 신빙성 있는 부분들이 꽤 있습니다. 정확한 원문 사료를 비교해서 근거를 명확히 제시하니깐 좋은 것 같아요. 그 책에서 <불교>부분에 관한 재미있는 내용입니다. 불교 수용은 삼국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는데, 그것은 토템적, 애니미즘적인 자연주의 신관이 논리적이고 철학적인 신관으로 바뀐 것을 말합니다. 훨씬 체계적이고 국가 이념으로 활용하기 좋은 종교였죠. 그러나 실제 불교가 공인된 것보다 더 이른 시기에 불교가 전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불교의 공인이 늦었던 이유가 재미있습니다. 2. 토착종교와의 갈등이 심하였다. 불교 수용이 늦은 첫 번째 이유는 토착종교와의 갈등입니다. 토착죵교는 자연주의적 종교로서 <천신>이 하늘에서 내려와 나라를 건국하였다는 것을 주 이념으로 합니다. 단군도 하늘의 자손이고, 주몽과 하늘의 신과 바다의 신의 결합에 의한 작품입니다. 따라서 왕과 왕 주위의 지배층은 모두 천신과 지신의 후손들이기에 모두 동등한 하늘의 족속(천강지응족)입니다. 그러나 왕권 강화로 왕은 귀족들을 초월하는 새로운 종교인 불교를 수용하려고 했습니다. 국왕은 <왕은 곧 부처와 관련된 신성한 존재이다 - 왕즉불 사상>는 논리로 차별적이고, 초월적이며 신성한 권위를 과시하려고 했죠. 그 결과 국가의 지배층들은 국왕이 불교를 공인하는 것을 처절할 정도로 반대합니다. 왜냐면, 불교 공인은 곧 왕권 강화로 인한 귀족권 약화를 뜻하기 때문이죠. 예로 신라 법흥왕 때에는 불교 공인에 대한 귀족들의 무조건적인 반대로 인해 이차돈이 순교한 사건까지 발생합니다. 즉, 국왕과 귀족의 불교 수용을 둘러싼 갈등은 거의 전쟁을 방불케 하는 커다란 이슈였지요. 3. 불교는 침략 수단의 정보전이었다. 불교를 지배층이 인정하지 못한 또 하나의 이유는 불교의 수용이 곧 외세의 침략 수단이라고 생각한 인식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예로, 5C 남하정책을 펼쳐 고구려의 최고 전성기를 구가한 장수왕은 백제 개로왕을 몰락시키기 위하여 승려 도림을 간첩으로 보내어 개로왕이 제대로 된 정치를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백제 한성이 함락한 이야기에는 개로왕이 승려 도림의 말만 믿고 정치를 하다가 장수왕과의 전투에서 패해 죽게 된 이야기가 나옵니다. 또, 신라 소지왕 시기에 서출지에 관련된 유명한 설화도 있습니다. 신라 소지왕 때 궁주와 승려가 간통을 했는데, 신라 소지왕은 하늘의 도움으로 그것을 알아 승려를 죽입니다. 그 승려 역시 첩자였을 가능성이 있죠. 원래 광개토대왕 이후 고구려에 의지하면서 국가체제를 정비하던 신라가 이제 고구려의 간섭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자, 승려를 통해 신라를 감시했던 고구려의 정보전을 엿볼 수 있는 사례입니다. 4. 관련된 사료들 모음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를 치려고 간첩으로 갈 수 있는 자를 구하였다. 이 때 승려 도림이 응모하였다. 왕은 기뻐하여 비밀리에 보내어 백제를 속이게 하였다. 이에 도림은 거짓 죄를 짓고 도망온 것처럼 하고 백제로 들어왔다. 이 때 백제왕 근개루(개로왕)는 바둑을 좋아하였다. 왕이 도림을 불러들여 바둑을 두었더니 과연 국수었다. 그래서 그를 상객으로 받을어 매우 친근히 하였다. 어느 날 도림은 왕을 모시고 있다가 조용히 말하였다. <대왕의 나라는 사방이 모두 산악과 강과 바다니 이는 하늘이 베푼 요충이요 인위적 형세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왕께서는 마땅히 숭고한 위세와 부유한 실적으로 남의 눈을 놀라게 해야 하는데 성곽과 궁실은 수리되지 않고, 선왕 해골은 들판에 가매장되어 있고, 백성의 가옥은 자주 강물에 무너지니 신은 대왕을 위하여 좋게 여기지 않습니다.> 왕이 이를 옳다고 여겨 국인을징발하여 흙을 쪄서 성을 쌓고 안에는 궁실과 누각 등을 지었는데, 모두가 장대하였다. 이 때문에 창고는 비고 인민은 가난해져서 나라의 위태로움이 달걀을 쌓아놓은 것보다 위태로왔다. 도림이 도망하여 이 사실을 고하니 장수왕이 기뻐하여 백제를 공격하였다. - 삼국사기 권 25, 백제본기 3, 개로왕 21년 - 사료해석 : 초기 백제와 신라가 불교를 받아들이지 못한 이유는 삼국의 귀족들이 왕권이 강화될까봐 염려되어 왈즉불 사상을 가진 불교 수용을 반대한 이유가 가장 크겠지만, 그 외에 정보전의 수단으로서 불교를 인식하였기 때문에 불교 수용을 꺼렸다는 기사들이 눈에 보입니다. 이 사료는 그 중 백제에 관련된 내용입니다. 즉, 고구려 장수왕이 스님 도림을 간첩으로 보내 백제를 혼란하게 하였다는 유명한 사료의 내용입니다. 이로 인해 백제는 장수왕에게 한강 이남을 빼았겼다는 내용입니다. 고구려 장수왕은 신라 소지왕을 암살하기 위해 스님에게 암살 임무를 부여하여 활동하였다는 기사도 나옵니다. 즉, 이 당시 장수왕은 활발한 정보전과 중국과의 적절한 외교, 탁월한 군사 전략 등을 적절히 섞어서 사용했다는 이야기가 되겠네요. 이렇게 불교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면서 신라왕까지 암살하려고 하였다면 신라 내부에서 불교에 대한 반감이 무지 컸을 것이고, 아차돈의 순교까지 보아가면서야 겨우 불교를 공인하였다는 점이 이해가 가기도 하는 대목입니다. 제 21대 비처왕(소지왕) 즉위 10년(488)에 왕이 천천장에 행차하였다. 이 때 한 노인이 못에서 나와서 글을 올렸는데, 겉봉에 이렇게 써 있었다. <이를 떼어보면 두 사람이 죽을 것이고, 떼어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을 것이다.> 일관이 아뢰기를, <두 사람이란 서민이요, 한 사람이란 왕입니다> 라고 말하였다. 왕이 그리여겨 떼어보니, <거문고 통을 쏘아라>라고 씌여 있었다. 왕은 곧 궁궐에 돌아가 거문고 통을 쏘니 거기에는 궁궐에서 분향 수도하던 중이 궁주와 몰래 간통하고 있어, 두 사람을 사형에 처하였다. - 삼국유사 권 3, 원종흥법염촉멸신 - 참고글 : 이 이야기는 신라 소지왕 대의 이야기입니다. 소지왕은 백제와 손잡고 강력하게 고구려에 대항하려 하였던 왕인데, 고구려는 소지왕을 제거하려고 하였던 것 같습니다. 즉, 궁주와 함께 왕을 암살하려고 했던 승려 간첩을 서출지에서 나온 노인이 알려줘서 막았다는 설화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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