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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풀이/역사 사료와 데이터

일본서기 니혼쇼키(일본서기) 30권. 이 밖에 계도(系圖) 1권이 있었다고 하나 전하지 않는다. 덴무[天武]왕의 명으로 도네리친왕[舍人親王]이 중심이 되어 680년경 착수, 720년에 완성된 것으로 추정한다. 일본 6국사(六國史) 중의 첫째로 꼽히는 정사(正史)로서 왕실을 중심으로 하여 순한문의 편년체(編年體)로 엮었으며, 편찬의 자료로는 제기(帝紀), 구사(舊辭), 제가(諸家)의 전승기록(傳承記錄), 정부의 공식기록, 개인의 수기(手記), 사원(寺院)의 내력 등을 기초로 하고, 특히 《백제기(百濟記)》 《백제본기(百濟本記)》 《백제신찬(百濟新撰)》 등 한국의 사료(史料)와 《위서(魏書)》 《진서(晉書)》 등 중국의 사서(史書)를 병용하고 있어, 일본에서 비교적 객관적으로 저술한 역사서라고 자부하고 있다. 그러나.. 더보기
남사 남사 당나라 이연수(李延壽) 편찬. 80권. 중국 정사(正史)의 하나로, 이연수의 아버지 이대사(李大師)가 종래의 남북조 정사(正史)가 공정하지 못하다 하여 이를 개정하여 통사(通史)를 만들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자, 아들이 유지(遺志)를 받들어 17년에 걸쳐 북사(北史)와 남사(南史)를 편찬하였다. 《남사》는 본기(本紀) 10권, 열전(列傳) 70권으로 되었으나, 지(志)와 표(表)가 결여되어 지는 《수서(隋書)》의 지로 이를 보완하고, 표는 청나라의 주가유(周嘉猷)가 《남북사표(南北史表)》 6권을 만들었다. 편자는 《북사》에만 많은 힘을 기울이고, 《남사》는 다만 구문(舊文)을 교정 ·편찬하는 데 그쳤다. 그러나 간략하게 정리되었으므로 이 책이 나오자 사람들은 송 ·제 ·양 ·진의 4서(書.. 더보기
구당서 구당서 《당서》는 당고조(唐高祖)의 건국(618)에서부터 애제(哀帝)의 망국(907)까지 21제(帝) 290년 동안의 당나라 역사의 기록이다. 처음에는 단지 《당서》로 이룩하였지만, 송나라 때 내용을 고쳐 《신당서》로 편찬하였다. 그래서 《구당서(舊唐書)》와 《신당서(新唐書)》로 나누어졌다. 《구당서》는 200권으로 되어 있는데, 당나라 멸망 직후의 사료가 부족하여 후반부가 부실하다. 전반부도 여러 사료에서 대강 발췌한 것이라 체제에 일관성은 없다. 그러나 당나라 때의 원사료의 문장이 거의 그대로 남아 있어, 사료적 가치가 높다. 《신당서》는 225권으로 되어 있는데, 송나라 때 《구당서》의 누락된 부분을 보충한 것도 많다. 표(表)가 많은 것도 특징이고, 처음으로 병지(兵志) ·선거지(選擧志)를 갖추었.. 더보기
광개토대왕릉비에 대한 해석 과정 광개토대왕릉비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현[集安縣] 퉁거우[通溝]에 있는 고구려 제19대 광개토대왕의 능비(陵碑) 비신(碑身) 높이 5.34m. 각 면 너비 1.5m. 호태왕비(好太王碑)라고도 한다. 414년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이 세운 것으로, 한국에서 가장 큰 비석이다. 제1면 11행, 제2면 10행, 제3면 14행, 제4면 9행이고, 각 행이 41자(제1면만 39자)로 총 1,802자인 이 비문은 상고사(上古史), 특히 삼국의 정세와 일본과의 관계를 알려 주는 금석문이다. 내용은 크게, ① 서언(序言)격으로 고구려의 건국 내력을, ② 광개토대왕이 즉위한 뒤의 대외 정복사업의 구체적 사실을 연대순으로 담았으며, ③ 수묘인연호(守墓人烟戶)를 서술하여 묘의 관리 문제를 적었다. 한·일 고대사학계의 최.. 더보기
고구려인의 복식 고구려인의 복식 그들은 공식 모임에서 모두 비단에 수를 놓은 의복을 입고 금과 은으로 장식한다. 대가와 주부는 머리에 책을 쓰는데 중국 책과 비슷하지만 뒤로 늘어뜨리는 부분이 없다. 소가 절풍을 쓰는데 모양이 고깔과 같다. - 삼국지 위서 동이전, 고구려 - 사람들은 모두 가죽으로 만든 관을 쓰는데, 사인은 새 깃을 꽂으며 귀인은 관을 붉은 비단으로 만들어 금은으로 장식한다. 옷은 소매가 큰 적삼과 통이 넓은 바지를 입으며, 흰 가족띠에 노란 가죽신을 신는다. 부인은 치마와 저고리에 선을 두른다. - 수서 동이열전, 고려 - 왕은 5채로 된 옷을 입고 흰색 나관을 쓰며, 가죽띠에는 모두 금테를 두른다. 대신은 푸른색 나관을 쓰고 다음은 진홍색 나관을 쓴다. 나관에는 새깃을 둘 꽂으며 금테와 은테를 섞어 .. 더보기
고구려의 식읍 제도 고구려의 식읍 왕이 군사를 삼도로 나누어 급히 치니 위군이 요란하여 진을 이루지 못하고 낙랑에서 물러갔다. 왕이 나라를 회복하고 공을 논할 때 밀우와 유유를 제일로 삼아 밀우에게는 거곡, 청목곡 등을 사여하고 유옥구에게는 압록, 두눌하원을 사여하여 식읍으로 삼게 하였으며, 유유에게는 벼슬을 더 주어 구사자로 삼고 아들 다우는 대사자로 삼았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천왕 - 모용외가 쳐들어오자 왕은 신성으로 가서 적을 피하고자 하여 나아가 곡림에 이르렀다. 그 때 신성재인 북부 소형 고노자가 500기를 거르리고 왕을 맞아 적을 세차게 치니 모용외가 지고 말았다. 왕은 기뻐하면서 고노자에게 대형의 벼슬을 더하고 곡림을 하사하여 식읍으로 삼게 하였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봉상왕 - 선비는 앞뒤로 적을.. 더보기
고구려의 불교 수용과 불교 전파 고구려의 불교 수용과 불교 전파 2년 여름 6월에 진나라 왕 부견이 사신과 중 순도를 파견하여 불상과 경문을 보내왔다. 왕은 사신을 보내 답례하고 토산물을 바쳤다. 태학(太學)을 세우고 자제(子弟)를 교육하였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소수림왕 - 고구려본기(삼국사기)에 이런 말이 있다. 소수림왕 즉위 2년 임신(372)년에 전진왕 부견이 사신과 중 순도를 시켜 불상과 경문을 보내왔다. 또 4년 갑술에도 아도가 동진에서 왔다. 이듬해인 을해 2월에는 초문사를 지어 순도를 그곳에 머물게 하고, 또 이불란사를 지어 아도를 있게 하였는데 이것이 고구려 불법의 시초인 것이다. - 삼국유사 3권, 순도조려 - 8년 봄에 사신을 신라에 보내 우호를 약속하니, 신라왕이 조카 실성을 인질로 보내왔다. 3월에 교서를 내.. 더보기
4세기 고구려의 위기 - 모용씨의 침입, 근초고왕의 침입 고구려의 위기 - 모용외의 침입 12년 봄 2월에 환도성을 수리하고, 또 국내성을 쌓았다. 가을 8월에 왕이 거처를 환도성으로 옮겼다. 겨울 10월에 연나라 왕 모용황이 용성으로 천도하였다. 건위 장군 모용한이 먼저 고구려를 빼았은 다음 우문씨를 멸망시키고, 나아가 중원을 차지하자고 청하였다. 고구려로 가는 길은 두 곳이 있는데, 북쪽 길은 평탄하고 넓은 반면 남쪽 길은 험하고 좁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북쪽 길로 가려고 하였다. (모용)한이 말하였다. 모용황이 이말을 따랐다. 11월에 모용황이 스스로 날랜 군사 4만을 거느리고 남쪽 길로 진군하여 모용한과 모용패를 선봉으로 삼았으며, 따로 장사 왕우 등을 보내 15000명을 거느리고 북쪽 길로 침략해왔다. 왕은 아우 무를 보내 정예군 5만명을 거느리고 북쪽.. 더보기
광개토대왕릉비 조작설(신채호의 조선상고사 중) 광개토대왕비문 조작설 내가 일직이 태왕의 비를 구경하기 위해 집안현에 이르러 여관에서 만주인 영자평이란 소년을 만나 필담을 나누었는데, 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하였다. 더보기
고구려의 고추가 고추가 그 나라에는 왕이 있고 벼슬로는 상가, 대로, 패자, 고추가, 주부, 우태, 승, 사자, 조의, 선인이 있으며 신분이 높고 낮음에 따라 각각 등급을 두었다. 본디 5족이 있으니, 바로 연노부, 절노부, 순노부, 관노부, 계루부였다. 처음에는 연노부에서 왕이 나왔으나 점점 미약해져서 지금은 계루부가 왕위를 차지한다. 관직을 설치할 때에 대로가 있으면 패자를 두지 않고, 패자가 있으면 대로를 두지 않는다. 왕의 종족으로서 대가인 사람은 모두 고추가라고 불렀다. 연노부는 본래 국주였으므로 지금은 비록 왕을 내지는 못하지만 그 적통을 이은 대인은 고추가라는 칭호를 얻었으며, 자체 종묘를 세우고 영성과 사직을 따로 제사를 지낸다. 절노부도 대대로 왕실과 혼인하였으므로 그 대인은 고추라는 칭호를 더했다.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