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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풀이/역사 사료와 데이터

국민교육헌장(1968) 한국-근현대사 사료 국민교육헌장(1968) '국민교육헌장'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 자주 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인류공영에 이바지할 때다. 이에 우리는 나아갈 바를 밝혀 교육의 지표로 삼는다. 성실한 마음과 튼튼한 몸으로 학문과 기술을 배우고 익히며 타고난 저마다의 소질을 계발하고 우리의 처지를 약진의 발판으로 삼아 창조의 힘과 개척의 정신을 기른다. 공익과 질서를 앞세우며 능률과 실질을 숭상하고 경애와 신의에 뿌리박은 상부상조의 전통을 이어받아 명랑하고 따뜻한 협동정신을 북돋운다. 우리의 창의와 협력을 바탕으로 나라가 발전하여 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임을 깨달아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여 스스로 국가건설에 .. 더보기
6.8 부정선거 무효선언(1967년 9월 20일) 한국-근현대사 사료 6.8 부정선거 무효선언(1967년 9월 20일) '6,8 부정선거 무효선언' 1. 6,8 총선은 3,15 이상의 전면적이며 계획적인 부정선거였다. 6,8 총선은 또한 이 나라에서 민주선거의 가능성을 여지없이 말살한 '선거 쿠데타'였다. 따라서 우리는 이 나라에서 민주선거의 사멸을 방지하고 부정선거를 뿌리뽑기 위해 6,8 총선의 전면 무효화와 재선거 실시를 강력히 요구한다. 2. 우리는 이번 부정선거가 정부와 여당의 긴밀한 협조 아래 전국의 관권을 총동원하여 행해진 사실을 지적하면서 그 책임자인 박정희 대통령이 사과와 책임자의 처단을 요구하며 부정에 가담한 전국의 공화당 후보와 공무원 및 폭력배 등의 구속 처단을 요구한다. 3. 우리는 박정권의 선거후에 전국 도처에서 저지르고 있는 적.. 더보기
1967. 신민당 합당 선언문 한국-근현대사 사료 1967. 신민당 합당 선언문 절박한 조국의 비상한 운명을 타개하고 온 겨레에 소생의 희망을 주는 단 하나의 길은 오직 난립된 재야정당들이 구원을 씻고 무조건 통합하는 길밖에 없다. 이제 후세에 죄를 남기지 않고 만난을 극복하고 통합으로 살신구국하려는 신민당의 창당은 한국정당사의 기적이다. 신민당은 반일, 반공, 반독재 투쟁의 피어린 민중, 신한 양당의 합당을 핵심으로 하고 모든 재야 민주세력이 총집결한 범국민적 정당이며 온정횡포를 종식시키고 무자비한 수탈행위로부터 국민을 보호하는 자위정당이고, 정권교체를 이룩할 수임정당인 동시에 민족 자립경제를 목표로 한 전진정당이다. 신민당은 또한 수구적 인습과 파쟁을 지양하고 합리적 대안과 창의에 찬 청사진을 가지고 생산과 분배를 동시에 중요시하.. 더보기
삼국사기 열전 궁예편 고려사 학습 사료 모음 삼국사기 열전 궁예편 ◈ 列傳 궁예 弓裔 新羅人 姓金氏 考第四十七憲安王誼靖 母憲安王嬪御 失其姓名 或云 “四十八景文王膺廉之子” 以五月五日 生於外家 其時屋上有素光 若長虹 上屬天 日官奏曰 “此兒以重午日生 生而有齒 且光焰異常 恐將來不利於國家 宜勿養之” 王勅中使 抵其家殺之 使者取於襁褓中 投之樓下 乳婢竊捧之 誤以手觸 其一目 抱而逃竄 勞養育 年十餘歲 遊戱不止 其婢告之曰 “子之生也 見棄於國 予不忍竊養 以至今日 而子之狂如此 必爲人所知 則予與子俱不免 爲之奈何” 弓裔泣曰 “若然則吾逝矣 無爲母憂” 便去世達寺 今之興敎寺是也 祝髮爲僧 自號善宗 及壯不拘檢僧律 軒有膽氣 嘗赴齋行次 有烏鳥銜物 落所持鉢中 視之 牙籤書王字 則而不言 頗自負 見新羅衰季 政荒民散 王畿外州縣 叛附相半 遠近盜 蜂起蟻聚 善宗謂乘亂聚衆 可以得志.. 더보기
정도전의 척불론 고려사 학습 사료 모음 정도전의 척불론 석씨가 자기 몸만 깨끗이 하여 인륜을 어지럽히면서까지 산림으로 도망해 들어간 것은 하나의 도라고 할 수 있으나, 그 화복의 설은 요망함이 아주 심합니다. 저들은 “장황한 범패(음악), 불사가 매우 요망합니다.”고 말하므로 그를 위해 향을 내려줌이 잇따랏고, 비용도 많이 들었지만 아직 재해가 소멸되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신은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출가한 무리들을 모아 본업으로 되돌리시고, 오교양종을 혁파하여 군사를 보충하며 각 사원은 그 곳의 관사에 나누어 소속시키고, 노비와 재용도 그렇게 처리해야합니다. 엄한 금령을 세워 머리를 깍는 자는 죽여서 용서치 말아야 할 것입니다. 더보기
과전법 고려사 학습 사료 모음 과전법 (가) 말기에 덕을 잃어 토지 대장이 불분명 하매 평민은 모두 큰 세력가에 속하게 되고, 전시과는 폐하여 사전이 되었다 권력가들의 토지는 광대하여 산천으로 표를 삼고, 징세를 한 해에 수삼 차에 걸쳐 시행하니 나라의 법이 무너져 나라도 망하게 되었다. 식화지 (나) 공양왕 3년 5월, 도평의사사가 글을 올려 과전을 지급하는 법을 정할 것을 요청하니 왕이 따랐다. 경기는 사방의 근본이니 마땅히 과전을 설치하여 사대부를 우대한다. 무릇 경성에 거주하여 왕실을 시위하는 자는 직위의 고하에 따라 과전을 받는다. (18둥급으로 나누어 150-10결까지 지급) 토지를 받은 자가 죽은 후, 그의 아내가 자식이 있고 수신(개가하지 않고 수절하는 것)하는 자는 남편의 과전을 모두 물려 받고.. 더보기
고려말의 농민 생활 고려사 학습 사료 모음 고려말의 농민 생활 (가) 요즈음 남방엔 흉년이 자주 들어, 굶주린 백성 왕왕히 길가에 쓰러지는데 수령 중에 글자를 아는 자는 백에 두 셋뿐, 법을 업신여겨도 모른 척함을 장님 벙어리처럼 하네 농부를 몰아다 해구(왜적)를 막게 하니, 도적의 칼날 닿기 전에 먼저 흩어지누나. 대장은 막사에 앉아 악기를 타고, 소장은 땀흘려 무기를 나르네. 권세가의 노비들은 잇달아 말타고와 땅을 빼앗고, 관(官)은 밀린 세금 징수에 흥년을 고려하지 않네. 슬프다 민생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뉘라서 우리 임금을 위하여 정무를 덜어줄까. (나) 이 때에 이인임, 임견미, 염흥방 둥이 자신들이 거느리고 있는 나쁜 종들을 시켜 좋은 토지를 가진 사람이 있으면 모두 물푸레 나무로 때리고 이를 빼앗게 하였다. .. 더보기
여말선초의 변화 : 신진사대부의 성장 고려사 학습 사료 모음 여말선초의 변화 : 신진사대부의 성장 (가) 나라에서 나이 어린 똑똑한 자들을 골라서 몽고어를 배우게 하였는데, 조인규도 여기에 선발되었다. 그러나 자기 동배들보다 특출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문을 닫아 걸고 3년 동안 몽고어를 학습한 결과 마침내 통달하였다는 명성을 얻고 제교의 관직에 임명받았다. 그 후 장군으로 승진하였다. (나) 최우는 일찍이 관리를 등용함에 있어저 문학에 능하고 행정 실무에 능한 사람을 첫째로, 문학에는 능하나 행정 실무 에 능하지 못한 사람을 그 다음으로, 행정 실무에 능하나 문학에 능하 지 못한 사람을 또 그 다음으로, 문학도 행정 실무도 능하지 못한 사람을 최하로 하여 인사의 기준으로 삼았다. 원종 (다) 대토지 소유자들의 토지와 백성에 대한 병점은 국가의.. 더보기
공민왕의 반원 자주정책 고려사 학습 사료 모음 공민왕의 반원 자주정책 (가) 5년 5월에 정동행성의 이문소(정동행성의 부속 기관)를 폐지하였다. 5년 6월 원의 연호인 지정의 사용을 중단하였다. 요사이 반역한 신하 기철 등이 군사를 움직일 것을 꾀하여 사직을 위태롭게 하려고 하였는데, 다행히 성덕에 의지하여 화근을 막게 되었습니다. 5년 7월 동북면 병마사 유인우가 쌍성을 함락하니 쌍성총관부의 총관 조소생과 천호 탁도경이 도주하였다. 이에 화주, 등주, 정 주 등 화주 이북을 꼬두 회복하였다. 공민랑 (나) 신돈이 전민변정도감을 두기를 청하고 스스로 판사가 되어 다음과 같이 방을 내렸다. ‘요사이 기강이 크게 무너져 사람들이 탐욕스럽고 포학하게 되어 종묘. 학교, 창고, 사원 등의 토지와 세 업전민(대대로 내려오는 토지와 노비.. 더보기
삼별초의 항쟁 고려사 학습 사료 모음 삼별초의 항쟁 (가) 처음 최우가 나라 안에 도적이 많은 것을 염려하여 용사를 모아 매일 밤 순행하여 폭행을 막게 하였다. 그 까닭으로 야별초라고 블렀다. 도적이 여러 도에서 일어났으므로 별초를 나누어 파견하여 잡게 하였다. 그 군대의 수가 많아져 드디어 좌별초, 우별초로 나누었다. 또 몽고에 갔다가 도망해 온 고려인으로 한 부대를 만들어 신의군이라 불러 좌우별초와 더불어 삼별초가 되었다. 권신이 정권을 잡자 이들 삼별초는 그 앞잡이가 되었는데, 권신은 봉륵을 후히주고 또 사사로운 혜택을 베플었다. (나1 원종 11년(1270)에 옛 수도(개경)로 환도할 기일을 정하여 방을 붙였는데, 삼별초는 딴 마음이 있어 이에 따르지 아니하였다. 왕이 장군 김지저를 강화에 보내어 삼별초를 해산..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