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즈풀이 썸네일형 리스트형 중경 현덕부 - 서고성 중경 현덕부 - 서고성 중경은 3대 문왕 때 천도한 뒤 742년부터 755년까지 13년간이라는 짧은 기간동안 발해의 수도였다. 그러나 서고성 부근에는 정효공주묘를 비롯한 발해무덤떼가 밀집되어 있고, 용해사 고산사 등의 유지가 모여 있어 수도로서의 위상을 높여준다. 장방형의 외성은 둘레가 2790m이고 흙으로 쌓았다. 북쪽 외벽은 연길에서 용정으로 가는 큰길 가에 나란히 이어지고 있다. 외성의 남쪽과 동쪽 끝에 남아있는 해자는 수로로 활용되 고 있으며 남쪽 외성은 인도로 사용된다. 1940년 촬영한 서고성 항공사진 (사이또컬렉션) -小嶋芳孝, [일본 국내의 발해 관계자료], {발해 건국 300주년}, 187쪽 1998년 여름의 서고성 모습 이 글이 인용된 원문 : http://www.koguryo.org/.. 더보기 발해 초기 유물 육정산 출토 유물 병(높이 22cm) ▲청동방울과 청동팔찌 ▲ 구슬 이 글이 인용된 원문 : http://www.koguryo.org/(사단법인 고구려 연구회 사이트) 더보기 발해 연표 이 글이 인용된 원문 : http://www.koguryo.org/(사단법인 고구려 연구회 사이트) 더보기 발해의 시 발해의 시상 양태사 서리 찬 가을 달밤에 은하수 유난히 빛나고 나그네 고향생각 시름 더욱 깊어가네 차라리 잠이 들어 꿈에나 볼까 하되 하 그리 긴 수심에 잠인들 차마 오리 왕효렴 고요한 여름밤에 달은 휘영청 밝았는데 산들은 환히 드러나고 삼라만상은 새 모습 띄네 두고 온 아내는 슬퍼해도 이어진 연정은 움직이네 뉘라서 천리를 멀다더뇨 달은 함께 두 사람을 비쳐주거니 왕효렴 남풍 부는 바닷길 돌아갈 생각 재촉하고 북에서 오는 기러기떼 나그네의 정을 이끄네 다행히도 그간에 쟁쟁한 두 분 접반관 있어 여러 날 변자에 묵는 여수 없건만 이 글이 인용된 원문 : http://www.koguryo.org/(사단법인 고구려 연구회 사이트) 더보기 발해의 남쪽 국경선 발해의 남쪽 국경 서 병 국(대진대 교수) 한반도에서 발해과 신라가 남북국시대를 이룬 것은 국경을 마주 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양국은 동해안과 서해안에 걸쳐 접경하였으나 이 문제에 대해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당나라에서 대동강 이남의 땅을 신라에 넘겨주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과 발해국은 남쪽으로 니하(泥河)에서 경계를 이루었다는 {신당서} 발해전의 기록이 양국 경계에 관한 전모이다. 이 두 기록을 근거로 한국·일본의 연구자들이 나름대로의 연구성과를 발표한 것이 지금까지의 연구상황이다. 고려에서 발해국의 역사를 편찬하지 않아 불분명한 양국의 경계를 처음 밝혀보려 한 인물은 실 학자인 유득공·정약용 등이며 그 후 외국 학자는 일본의 쯔다(津田左右吉)·마쯔이(松井等)·도 리야마(島山喜一) 등이다. {신당서}.. 더보기 발해인들의 끈질긴 부흥운동 발해인들의 끈질긴 부흥운동 926년 발해는 거란군에게 패전하여 멸망하였다. 거란은 발해 유민들을 임황(臨潢) 부근으로 대량 이주시키고 변방의 부(府)나 주(州)들을 토벌하였지만, 발해인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세력을 규합하여 끊임없이 부흥국을 세웠다. 발해인들이 세운 나라들의 실체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후발해국 발해의 왕족들이 거란의 철군을 공격하다가 남으로 물러나 나라를 유지하고 있었다. 926년 7월 거란의 태조 야율아보기가 부여부에 이르렸을 때 갑자기 발병하여 운명하자 발해 왕이 그 동생을 시켜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대중을 거두어 철수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데, 이 때의 정황으로 보아 홀한성(忽汗城)쪽에는 거란의 대군이 있었으므로 필경 장령부(長 嶺府)를 거쳐 압록부 근처에 자리를 잡고 나.. 더보기 발해와 일본의 외교 관계 발해는 초기에는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목적을 위해서 일본과 적극적인 외교관곌ㄹ 맺었다. 그러나 동아시아의 정치질서가 안정되고 평퐈공존체제가 확립되면서 점차 경제적인 교역과 문화교류의 성격으로 변하였다. 뛰어난 항해술과 조선술 그리고 적극적인 사고를 가진 발해인들은 겨울의 동해바다를 건너다녔다. 2000여년 동안에 공식적인 교섭만 35차례에 달하고, 그 외에 민간인들의 교류는 매우 많았을 것이다. 주로 11월에서 2월 사이에 발해의 해안을 출발하였는데, 그 도착한 범위는 매우 넓었다. 기록에 의하면 동북 지방의 아끼다지방에서 남으로 내려오면서 현재의 니이가타, 이시가와. 노토반도. 쓰루가인 북륙지방. 돗도리. 오끼. 이즈모 등 산음 지방은 물론 큐슈까지 이르렀다. 특히 민간인들은 북해도와 사할린까지 진출하였.. 더보기 발해의 대일 외교와 해상활동 발해의 대일 외교와 해양활동 윤 명 철 (동국대 겸임교수, 고구려연구회 연구원)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로서 동해와 황해를 양쪽에 두고 만주를 차지한 국가였으므로 육지활동과 함께 해양활동이 활발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초기에는 북방의 흑수말갈과 당나라 신라로부터의 압박을 해소하기 위하여 732년에는 대규모의 수군을 동원하여 당나라의 등주(현재 산동반도 봉래시)를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발해는 황해를 통해서 당나라와 교역을 하였는데, 심지어는 현재 절강성 지역까지 항해하여 교역범위를 넓혔다. 특히 발해는 여러 가지 목적을 가지고 일본과 교섭을 활발히 하였다. 초기에는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사실을 선언하고, 신라를 압박하기 위한 목적이 강했다. 발해가 동해를 건너 일 본과 강력한 정치동맹을 맺는다면 신라를 가.. 더보기 발해의 성터들 - 사진 모음 혼춘시 석두하자(石頭河子) 고성(평지성) 도문시 장안진 성자산 산성 혼춘시 양포향(楊泡鄕 ) 살기산성(薩其山城 ) 이 글이 인용된 원문 : http://www.koguryo.org/(사단법인 고구려 연구회 사이트) 더보기 부거무덤떼 유적지와 유물 부거무덤떼 부거무덤떼는 부거석성에서 서남쪽으로 1.5km 떨어진 산기슭에 분포되어 있으며 주변에는 발해시기의 토성과 봉수대도 있다. 무덤 떼의 무덤 수는 약 500기에 달하나 그 중에서 발굴한 무덤은 50여기다. 부거석성과 부거무덤떼 외에도 부거리 일대에는 발해 시기의 것으로 볼 수 있는 산성과 봉수대들이 있으나 아직 발굴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다. 이 글이 인용된 원문 : http://www.koguryo.org/(사단법인 고구려 연구회 사이트) 더보기 이전 1 ··· 146 147 148 149 150 151 152 ··· 220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