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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풀이

신라후기 호족세력의 대두 사료 신라후기 호족세력의 대두 사료 백성들이 조세를 바치지 않았으므로 창고가 비고 말라서 국가의 재정이 궁핍했다. 이에 왕이 사자를 보내 독촉하니 이로 인해 사방에서 도둑이 봉기하였는 바, 원종, 애노 등이 상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진성여왕 왕 l3년 봄에 백성들은 굶주림을 이기지 못하여 자손들을 팔아서 생활하였다. 헌덕왕 신라가 말년에 쇠약해져서 정치가 어지럽고 백성들이 흩어지며, 주현이 배반하고 귀부하는 자가 서로 반씩이 되는 한편, 도적들이 벌떼같이 일어나고 개미처럼 꼬여 들었다. 궁예 진성왕 6년에, 아첨하는 소인들이 왕의 곁에 있어 정권을 농간하매 기강은 문란해지고, 기근까지 곁들여 백성들이 유망하고 도적들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이에 견훤은 은근히 반역의 마음을 품고 무리를 모아 서울 서남쪽 주현들.. 더보기
불교 대중화 사료 - 욱면비 염불서승 불교 대중화 사료 - 욱면비 염불서승 남의 집에서 종 노릇을 하는 욱면은 주인을 따라 절에 가서 염블을 하고자 하였다. 주인은 그녀가 종 노릇만을 제대로 하지 않는 것에 배알이 틀려 매일 곡식 두 섬을 주고서 하루 저녁에 다 찧으라고 하였다. 욱면은 그래도 초저녁에 일을 마치고 절에 가서 염블을 하였다. 그녀는 스스로 뜰에 말뚝을 박고 두 손 바닥을 노끈으로 꿰어 좌우로 흔들면서 블공을 드렸다. 그렇게 하기를 9년이 지 난 후 하늘에서 커다란 소리가 들리더니 욱면은 들보를 뚫고 나가며 해골이 부서졌고, 몸은 부처로 변하여 연화대에 앉아 큰 광명을 발하며 천천히 사라졌다. 권6 감통 제7 욱면비 염불서승 이 글에 대한 참조사항 1. 이 글에 대한 관련 사료는 이 사이트 검색창에서 자유롭게 검색가능합니다.(.. 더보기
원효의 불교와 정토사상 사료 원효의 불교와 정토사상 사료 원효는 언제나 술에 취한 채 방방곡곡 촌락을 누비며 노래를 부르고 춤추고 다니며 불도를 전하였다. 이 때문에 뽕 따는 늙은이에서부터 무뢰배에 이르기까지 부처님의 명호를 외우고, 나무아미타불이라는 합장의 미덕을 알았으니, 원효의 교화가 참으로 컸다 하겠다. 원효 왕이 백좌인왕경 대회를 설치하고 두루 덕이 높은 승려들을 찾았다. 마을 사람들이 명망이 높은 원효를 천거하였으나, 여러 승려들이 그를 미워하여 왕에게 나쁘게 말하니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원효가 금강삼매경론의 소(불경의 주석)를 강론하는 날 왕과 신하, 승려 등 많은 사람이 법당으로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원효가 큰 소리로 "옛날 서까래 백 개를 구할 때는 비록 참가하지 못하였으나, 오늘 대들보를 눕히는 데는 나 혼자만이 .. 더보기
의상의 불교와 화엄일승법계도 사료 의상의 불교와 화엄일승법계도 1) 법사 의상의 아버지는 한신이라 했으며, 성은 김씨다. 나이29세에 서울 경주 황복사에서 머리를 깎아 중이 되었다. 얼마 후 중국으로 가서 부처의 교화를 보려 하여 마침내 원효와 함께 요동으로 갔다가, 변방 순라군의 정탐자에게 잡혀 수 십일간 잡혀있다가 간신히 빠져나왔다. 영휘 초년에, 당나라의 귀국선을 얻어타고 중국으로 갔다. 처음에 양주에 머물는데, 주장 유지인이 의상을 청해다가 그 관아 안에 머무르게 하면서 접대를 후하게 해주었다. 후에 종남산 지상사를 찾아가서 지엄을 뵈었다. 지엄은 지난 밤 꿈에 큰나무가 조선에서 나서 잎이 널리 퍼져 중국으로 와서 덮는데, 그 위에 봉황새의 보금자리가 있었으므로 올라가 보니 한 개의 마니보주가 있었으며 광명이 멀리 비치는 것이었다.. 더보기
신라 귀족들과 농민들의 생활 신라 귀족들과 농민들의 생활 1) 지난날 신라는 두 나라에 가로막혀 북에서 얻어맞고 서에서 침범당하여 잠깐도 편안할 때가 없었다. 병사들의 뼈는 들판에 널려 있고 몸과 머리는 따로 멀리 떨어져서 뒹굴었다. .....이제 두 적국이 평정되고 사방이 편안하여 싸움에서 공을 세운 자에게도 아울러 상을 주고 전사한 영혼에게 벼슬을 추증하였다. .....백성 가운데 집이 가난하여 남의 곡식으로 사는 자와 흉년이 든 지역에 사는 자는 원금과 이자를 다 탕감하고, 풍년이 든 지역의 땅에 사는 자는 금년 추수기에 가서 원금만을 반환하고 이자는 받지 않되.... 신라본기 문무왕 9년 2) 당에 글을 올리고 겸하여 은 3만 3천6백 푼, 구리 3만 3천 푼, 바늘 4백 개, 우황 120푼, 금 120푼, 40승 포목 6필.. 더보기
신라 6두품들의 활동 사료 - 7차 교과서 신라 6두품들의 활동 사료 - 7차 교과서 1) 무열왕이 즉위하자 당나라 사자가 와서 조서를 전하였는데, 그 가운데 읽기 어려운 곳이 있었다. 왕이 강수를 불러 물으니 조서를 한번 보고 해석하는데 의심스럽거나 막힘이 없었다. ......문무왕이 말하기를, "강수는 문장으로 자기의 임무를 다하여 중국과 고구려, 백제 두 나라에 의사를 잘 전달하였기 때문에 우호를 맺는데 성공하였다. 우리 선왕 (융포:무열왕)께서 당나라에 군사를 청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정복한 것은 비록 무공이라 하지만, 또한 문장의 도움도 있었으니 강수의 공을 어찌 소흘히 생각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강수 2) 신라는 당나라와 조공한 이후 항상 왕자를 보내 숙위를 시켰고, 학생을 보내 대학에 입학시켜 공부하게 하였다. 이들은 l0년을 기.. 더보기
해상왕 장보고와 청해진 관련 사료 해상왕 장보고와 청해진 관련 사료 장보고(張保皐)와 정년(鄭年)은 모두 신라 사람이나, 그들의 고향과 조상은 알 수 없다. 두 사람이 모두 싸움을 잘 하였는데, 년(年)은 그밖에 바다 밑으로 들어가 50이를 가면서도 물을 내뿜지 않았다. 그 용맹과 씩씩함을 비교하면, 보고(保皐)가 년에게 좀 미치지 못하였으나, 년이 보고를 형이라 불렀다. 보고는 연령으로, 년은 기예로 향상 맞서 서로 지지 않았다. 두 사람이 모두 당에 가서 무령군소장(武寧軍小將)이 되어 말을 타고 창을 쓰는데, 대적할 자가 없었다. 후에 보고가 귀국하여 대왕(大王)을 뵙고 말하였다. "중국의 어디를 가보나 우리 사람들을 노비로 삼고 있습니다. 청해(淸海)에 진영을 설하고 해적들이 사람을 약취하여 서쪽으로 데려 가지 못하게 하기 바라나이.. 더보기
신라의 지방 통치 제도 관련 사료 신라의 지방 통치 제도 관련 사료 자료1) 9주 마침내 9주를 두었다. 본국(本國) 경계 내에 3주를 두었는데, 왕성(王城) 동북의 당은포(唐恩浦)로 향하는 길목에 있는 곳을 상주(尙州)라 하고, 왕성의 남쪽을 양주(良州)라 하고, 서쪽을 강주(康州)라 하였다. 옛 백제국의 경계에 3주를 두었는데, 백제의 옛성 북쪽의 웅진(熊津) 어귀를 웅주(熊州)라 하고 서남쪽을 전주(全州)라 하고 다음에 남쪽을 무주(武州)라 하였다. 옛 고구려의 남쪽 경계에 3주를 두었는데, 서쪽으로부터 첫번째가 한주(漢州)이고 그 다음 동쪽이 삭주(朔州)이고 또 그 다음 동쪽이 명주(溟州)이다. (《三國史記》34 雜志3 地理1) 자료2) 소경 ?) 북원(北原)에 소경(小京)을 두고 대아찬(大阿瑗) 오기(吳起)로 지키게 하였다. (.. 더보기
발해 관련 역사 사료 발해 관련 역사 사료 발해말갈(渤海靺鞨)의 대조영(大祚榮)이란 자는 본래 고구려의 별종(別種)이다. 고구려가 멸망하자 조영은 가속(家屬)을 거느리고 영주(營州)로 이사하였다. 만세통천년(萬歲通天年)에 거란(契丹)의 이진충(李盡忠)이 반란을 일으키매 조영은 말갈인 걸사비우(乞四比羽)와 함께 각기 망명자를 이끌고 동쪽으로 달아나서 견고하게 지켰다. 진충이 죽자 측천(則天)은 우옥검위대장군(右玉鈐衛大將軍) 이해고(李楷固)에게 명하여 병사를 이끌고 그 잔당을 토벌토록 하였다. 먼저 걸사비우를 격파하여 목벤 다음 천문령(天門嶺)을 넘어 조영을 추격하였다. 조영은 고구려와 말갈의 무리를 합하여 해고에게 대항하자, 해고의 군대가 크게 패하였다. 해고는 몸을 빼어 달어나 돌아왔다. 거란과 해(奚)가 모두 돌궐(突厥)에.. 더보기
통일 후 대당외교의 변화를 보여주는 사료 - 7차 교과서 통일 후 대당외교의 변화를 보여주는 사료 - 7차 교과서 급찬(級瑗) 기진산(祇珍山) 등을 당에 보내어 자석 두 상자를 바치고, 또 각간(角干) 흠순(欽純)과 양도(良圖)를 당에 보내어 사죄하였다. (《三國史記》6, 新羅本紀6 文武王 9年 5月) 당의 중종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구두로 조칙을 전하기를, "우리의 태종문황제(太宗文皇帝)는 그 신성한 공덕이 천고에 뛰어났으므로 그 붕어하던 날 묘호(廟號)를 태종(太宗)이라 한 것이다. 너희 나라의 선왕(先王)인 김춘추(金春秋)가 이와 호를 같이 한 것은 매우 참람한 일이니 급히 고치라"라고 하였다. (《三國史記》8, 新羅本紀8 神文王 12年) 정월에 김의충(金義忠)을 당에 보내어 신년(新年)을 하례(賀禮)하였다. 2월에 부사(副使) 김영(金榮)이 당에서 죽..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