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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풀이

과전법 고려사 학습 사료 모음 과전법 (가) 말기에 덕을 잃어 토지 대장이 불분명 하매 평민은 모두 큰 세력가에 속하게 되고, 전시과는 폐하여 사전이 되었다 권력가들의 토지는 광대하여 산천으로 표를 삼고, 징세를 한 해에 수삼 차에 걸쳐 시행하니 나라의 법이 무너져 나라도 망하게 되었다. 식화지 (나) 공양왕 3년 5월, 도평의사사가 글을 올려 과전을 지급하는 법을 정할 것을 요청하니 왕이 따랐다. 경기는 사방의 근본이니 마땅히 과전을 설치하여 사대부를 우대한다. 무릇 경성에 거주하여 왕실을 시위하는 자는 직위의 고하에 따라 과전을 받는다. (18둥급으로 나누어 150-10결까지 지급) 토지를 받은 자가 죽은 후, 그의 아내가 자식이 있고 수신(개가하지 않고 수절하는 것)하는 자는 남편의 과전을 모두 물려 받고.. 더보기
고려말의 농민 생활 고려사 학습 사료 모음 고려말의 농민 생활 (가) 요즈음 남방엔 흉년이 자주 들어, 굶주린 백성 왕왕히 길가에 쓰러지는데 수령 중에 글자를 아는 자는 백에 두 셋뿐, 법을 업신여겨도 모른 척함을 장님 벙어리처럼 하네 농부를 몰아다 해구(왜적)를 막게 하니, 도적의 칼날 닿기 전에 먼저 흩어지누나. 대장은 막사에 앉아 악기를 타고, 소장은 땀흘려 무기를 나르네. 권세가의 노비들은 잇달아 말타고와 땅을 빼앗고, 관(官)은 밀린 세금 징수에 흥년을 고려하지 않네. 슬프다 민생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뉘라서 우리 임금을 위하여 정무를 덜어줄까. (나) 이 때에 이인임, 임견미, 염흥방 둥이 자신들이 거느리고 있는 나쁜 종들을 시켜 좋은 토지를 가진 사람이 있으면 모두 물푸레 나무로 때리고 이를 빼앗게 하였다. .. 더보기
여말선초의 변화 : 신진사대부의 성장 고려사 학습 사료 모음 여말선초의 변화 : 신진사대부의 성장 (가) 나라에서 나이 어린 똑똑한 자들을 골라서 몽고어를 배우게 하였는데, 조인규도 여기에 선발되었다. 그러나 자기 동배들보다 특출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문을 닫아 걸고 3년 동안 몽고어를 학습한 결과 마침내 통달하였다는 명성을 얻고 제교의 관직에 임명받았다. 그 후 장군으로 승진하였다. (나) 최우는 일찍이 관리를 등용함에 있어저 문학에 능하고 행정 실무에 능한 사람을 첫째로, 문학에는 능하나 행정 실무 에 능하지 못한 사람을 그 다음으로, 행정 실무에 능하나 문학에 능하 지 못한 사람을 또 그 다음으로, 문학도 행정 실무도 능하지 못한 사람을 최하로 하여 인사의 기준으로 삼았다. 원종 (다) 대토지 소유자들의 토지와 백성에 대한 병점은 국가의.. 더보기
공민왕의 반원 자주정책 고려사 학습 사료 모음 공민왕의 반원 자주정책 (가) 5년 5월에 정동행성의 이문소(정동행성의 부속 기관)를 폐지하였다. 5년 6월 원의 연호인 지정의 사용을 중단하였다. 요사이 반역한 신하 기철 등이 군사를 움직일 것을 꾀하여 사직을 위태롭게 하려고 하였는데, 다행히 성덕에 의지하여 화근을 막게 되었습니다. 5년 7월 동북면 병마사 유인우가 쌍성을 함락하니 쌍성총관부의 총관 조소생과 천호 탁도경이 도주하였다. 이에 화주, 등주, 정 주 등 화주 이북을 꼬두 회복하였다. 공민랑 (나) 신돈이 전민변정도감을 두기를 청하고 스스로 판사가 되어 다음과 같이 방을 내렸다. ‘요사이 기강이 크게 무너져 사람들이 탐욕스럽고 포학하게 되어 종묘. 학교, 창고, 사원 등의 토지와 세 업전민(대대로 내려오는 토지와 노비.. 더보기
삼별초의 항쟁 고려사 학습 사료 모음 삼별초의 항쟁 (가) 처음 최우가 나라 안에 도적이 많은 것을 염려하여 용사를 모아 매일 밤 순행하여 폭행을 막게 하였다. 그 까닭으로 야별초라고 블렀다. 도적이 여러 도에서 일어났으므로 별초를 나누어 파견하여 잡게 하였다. 그 군대의 수가 많아져 드디어 좌별초, 우별초로 나누었다. 또 몽고에 갔다가 도망해 온 고려인으로 한 부대를 만들어 신의군이라 불러 좌우별초와 더불어 삼별초가 되었다. 권신이 정권을 잡자 이들 삼별초는 그 앞잡이가 되었는데, 권신은 봉륵을 후히주고 또 사사로운 혜택을 베플었다. (나1 원종 11년(1270)에 옛 수도(개경)로 환도할 기일을 정하여 방을 붙였는데, 삼별초는 딴 마음이 있어 이에 따르지 아니하였다. 왕이 장군 김지저를 강화에 보내어 삼별초를 해산.. 더보기
공민왕의 개혁정치 고려사 학습 사료 모음 무신정권에 대한 천민들의 항쟁 (가) 명종 23년 7월 남적이 봉기하였다. 큰 도적인 김사미는 운문에 응거하고, 효심은 초전에 응거하며 주현을 노략질하였다. 국왕이 듣고 근심하여 대장군 김존걸 등을 보내어 치게하였으나, 도리어 패퇴하였다. 24년 2월에 괴수 김사미가 스스로 행영에 와서 투항하였고, 그 후 참하였다. 명종 (나) 권세가들이 사람을 시켜 조세를 징수케 하는데, 한 토지에서 두세 번에 걸쳐 징수하여 백성들이 고통을 이기지 못하면서도 호소할 곳이 없다. 그들의 원망과 분노가 하늘을 찌르니 화의 근원이 바로 여 기에 있는 것이다 식화지 (다) 이미 우리 마을(공주 명학소)을 현으로 승격하고 수령을 설치 하여 안무(백성의 사정을 살펴 위로함)하더니, 이제 와서 다시 군대를 .. 더보기
공민왕의 개혁정치 고려사 학습 사료 모음 공민왕의 개혁정치 (가) 충목왕이 즉위하여 공민왕을 강릉부원대군으로 봉하였다. 층목왕이 돌아가시니 고려에서 왕을 세우고자 하였으나, 원에서 충정으로 왕을 계승케하고 인하여 (공민)왕을 머믈러 숙위(궁궐에 머물러 지키는 것)케 하였다. 처음에 충숙왕이 공민왕을 윤택에게 부탁한 일이 있었으므로 충정 원년에 윤택이 이승로와 더불어 글을 (원의) 중서성에 올려 왕을 세우기를 청하였다. 이 해에 왕이 노국공주에게 장가들었는데 , 3년 10월에 원에서 국왕을 삼았다. (나) 공민왕 5년 3월, 기씨의 족속이 후(기철의 누이 동생이 원순제의 후궁)의 권세를 믿고 횡포하매 어떤 사람이 밀고하기를 ‘기철이 은밀히 쌍성의 반란민과 작당하여 반역을 도모하 나이다.’하니, 왕이 환조(이성계의 부친인 이.. 더보기
이자겸의 난 고려사 학습 사료 모음 이자겸의 난 이자겸이 다른 성씨가 비(妃)가 되어 권력과 총애가 나뉘어질까 두려워하여 셋째 딸을 왕비로 바쳤으며, 넷째 딸도 왕에게 바쳤다. 왕은 이자겸을 제거하고자 신하들을 불러 논의하였으나, 이자겸의 심복이었던 척준경이 화가 나서 칼을 빼어 들고 군사들로 하여금 활을 쏘면서 공격을 하니 화살이 왕 앞에까지 날라 왔다. 밤에 왕이 산호정까지 도망을 하였는데 따라오는 자들은 10여인에 불과하였다. 왕이 피해를 입을까 두려워하여 글을 지어 자겸에게 선위(禪位)할 것을 청하였다. 이자겸의 난, 고려사 더보기
최승로의 시무 28조 고려사 학습 사료 모음 최승로의 시무 28조 1. 요지를 가려 국경을 정하고, 그 지방에서 활 잘 쏘고 말 잘 타는 사람을 뽑아 국경을 맡도록 하소서. 2. 불사를 많이 베풀어 백성의 고혈을 짜내는 일이 많고 죄를 지은 자가 중을 가장하고, 구걸하는 무리들이 중과 서로 섞여 지내는 일이 많습니다. 원컨대 국왕은 체통을 지키소서. 3. 우라 왕조의 시위하는 군사들은 태조 때에는 그 수효가 많지 않았으나, 광종이 풍채가 좋은 자를 뽑아 시위케 하여 그 수효가 많아졌습니다. 태조 때의 법을 따라 날쌔고 용맹스러운 자만 남겨 두고 그 나머지는 돌려보내어 원망이 없도록 하소서. 4. 왕께서 미음과 술과 두부 국으로 길가는 사람에게 보시하나, 적은 은혜는 두루 베풀어지지 못합니다. 상벌을 밝혀 악을 징계하고 선을 .. 더보기
사심관과 기인 제도 고려사 학습 사료 모음 사심관과 기인 제도 (가) 태조 18년에 신라왕 김부(경순왕)가 항복하였으므로 신라국을 없애고 김부를 경주의 사심관(事審官)으로 삼아 부호장 이하 관직자들의 일을 살피도록 하였다. 이에 여러 공신에게도 이를 본받아 각각 그 고향의 사심관으로 삼으니, 사심관은 이에서 비롯되었다. 성종 15년에 500정(丁) 이상의 주(州)에는 4명, 300정 이상의 주에는 3명, 300정 이하에는 2명의 사심관을 두도륵 하였다. 현종 초년의 판(왕이 법제적으로 결정한 문장)에는 아버지와 친형제가 호장이 된 자는 사심관으로 임명하여 보내지 못하게 하였다. 현종 10년의 판에는 모든 사심관을 파견함에는 기인과 백성의 여론을 따를 것이로되, 백성들의 추천함이 비록 작더라도 조정에서 고관대직을 맡아본 사람..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