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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왕건의 훈요 10조 태조 왕건의 훈요 10조 태조 26년(943) 여름 4월에 왕이 내전에 나가 앉아 대광 박술희를 불러서 친히 훈요를 주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내가 들으니 순 임금은 역산에서 농사를 지었으나 마침내 요임금의 왕위를 받았으며 한의 고제 패택에서 일어나 한나라의 왕업을 성취하였다고 한다. 나도 역지 한갖 외로운 평 민으로서 그릇되게 여러 사람들의 추대를 받았다 더위와 추위를 무릅쓰고 19년 동안 노심초사한 끝에 삼한을 통일하여 외람스럽게 왕위에 있은 지가 25년이나 되었고 몸도 벌써 늙었다 후손들이 감정과 욕심에 사로 잡혀 나라의 질서를 문란시킬 듯하니 이것이 크게 근심스럽다. 이에 훈계를 써서 후손들에게 전하노니 아침 저녁으로 펼쳐 보아 영구히 모범으로 삼게 하기를 바란다. 첫째, 우리 국가의 왕.. 더보기
신라말 민중봉기와 사회모순 신라말 민중봉기와 사회모순 (1) 서쪽 변방의 주.군에 큰 흉년이 들어 도적이 벌떼같이 일어나므로 군사를 내어 쳐서 평정시켰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l0 헌덕왕 7년 (2) 3월, 초적이 곳곳에서 일어나므로 여러 주군의 도독, 태수에게 명령하여 잡게 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l0 헌덕왕 ll년 (3) 8월, 흉년으로 굶주려 도적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10월, 왕은 사자를 보내 안무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10홍덕왕 7년 (4) 제61대 진성여왕이 임금이 된 지 몇 해 만에 유모 부호 부인과 그의 남편인 위흥 잡우 등 3~4명의 총신이 권세를 잡고 정치를 멋대로 하니 도적이 벌떼와 같이 일어났다. [삼국유사] 권2기이 진성여대왕 거타지 (5) 국내의 여러 주군이 공세(貢稅)를 바치지 않아.. 더보기
신라의 민정문서(서원경 등의 촌락문서) 신라의 민정문서(서원경 등의 촌락문서) 촌락1 촌락2 촌락3 촌락4 논/밭 호(戶) 인구(노비) 소 말 뽕나무 잣나무 호도나무 102/62 11 142(9) 22 25 1,004 120 112 63/119 15 125(7) 12 18 1,280 ? 71 71/58 8 69(0) 11 8 730 42 107 29/77 10 106(9) 8 10 1,235 68 48 1 2 3 4 1 2 3 4 중하 4 1 노공 0(1) 2(2) 0(1) 2(0) 하상 2 2 제공 1(1) 0(1) 0(0) 1(0) 하중 5 1 1 정 29(40) 32(16) 17(16) 17(36) 하하 5 6 6 9 조자 7(11) 6(4) 2(4) 8(5) 기타 1 1 추자 12(9) 2(14) 8(4) 8(10) 합계 10 15 8.. 더보기
신라의 국학 신라의 국학 국학은 예부에 속한다. 신문왕 2년에 설치하였는데, 경덕왕이 대학감으로 고쳤고, 혜공왕이 다시 이전대로 하였다. 경은 1인인데 경덕왕이 사업으로 고쳤더니, 혜공왕이 다시 경으로 일컬었다. 관등은 다른 부서의 경과 같다. 박사, 조교가 있고, 대사는 2인 진덕왕 5년에 두었는데, 경덕왕이 주부로 고쳤고, 혜공왕이 다시 대사로 일컬었다 관등은 사지에서 내마까지로 하였다. 사는 2인, 혜공왕 원년에 2인을 더하였다. 교수하는 법은 [주역J, [상서], [모시], [예기]. [춘추좌씨전], [문선]으로 나누어 학업을 닦게 하였는데, 박사나 조교 1인이, 혹은 [예기], [주역J, [논어], [효경]을 가르치고, 혹은 [춘주좌전J, [모시], [논어], [효경]을, 혹은 [상서], [논어],.[효경].. 더보기
신문왕 신문왕 신문왕 즉위년 8월 16일에 왕은 교서를 내리어 가로되, ‘공이 있는 자에게 상을 주는 것은 옛 성인에 좋은 규정이요, 죄 있는 자에게 벌을 주는 것은 선왕의 아름다운 법이다. 과인이 조그만 몸과 적은 덕을 가지고 큰 기업을 승수하여, 식사도 폐하면서 또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자면서 신하와 더불어 국가를 편안케 하려 노력하는데, 상중에 난이 서울에서 일어날 줄을 뉘 생각하였으랴? 적괴인 흠돌, 홍원 등은 그 벼슬이 재능으로 높아간 것도 사실상 왕의은혜로 올라간 것이지만, 시종을 삼가거나 부귀를 보전치 못하고 불인과 불의로 위복을 작하고 관료를 모만하고 상하를 속고 포악한 마음을 드러내어 흉사한 자를 불러들이고 근수와 교결하여 화가 내외에 통하고 같은 악인들이 서로 도와 기일을 약정한 후 반역을 행하.. 더보기
지증 대사 비문 지증 대사 비문 도의스님이 서방으로 건너가 서당지장으로부터 심인을 읽혀 처음 선법을 말하면서 원숭이처럼 조급한 마음에 사로잡혀 북쪽으로 치닫는 단점을 감싸주었지만, 메추라기가 제 날개를 자랑하며 붕새가 남쪽 바다로 떠나는 높은 뜻을 비난하듯 하였다. 그들은 인습적인 염불에 흠뻑 젖어 있어서 도의스님의 말을 마귀의 말이라고 비웃었다. 이에 스님은 진리의 및을 행랑채 아래에 거두고 항아리 속에 감추며, 동해의 동쪽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북산의 북쪽에 은둔하였다. 그러나 겨울 산봉우리에 빼어나고 정림에서도 꽃다우매 그 덕을 사모하여 모여드는 사람이 산에 가득하고, 매로 변화하듯 뛰어난 인물이되어 깊은 골짜기로부터 나오게 되었다. 더보기
나말 혼란과 호족의 봉기 나말 혼란과 호족의 봉기 (1) 백성들이 조세를 바치지 않았으므로 창고가 비고 말라서 국가의 재정이 궁핍했다. 이에 왕이 사자를 보내 독촉하니 이로 인해 사방에서 도둑이 봉기하였는 바, 원종, 애노 등이 상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진성여왕 (2) 왕 l3년 봄에 백성들은 굶주림을 이기지 못하여 자손들을 팔아서 생활하였다. 헌덕왕 (3) 신라가 말년에 쇠약해져서 정치가 어지럽고 백성들이 흩어지며, 주현이 배반하고 귀부하는 자가 서로 반씩이 되는 한편, 도적들이 벌떼같이 일어나고 개미처럼 꼬여 들었다. 궁예 (4) 진성왕 6년에, 아첨하는 소인들이 왕의 곁에 있어 정권을 농간하매 기강은 문란해지고, 기근까지 곁들여 백성들이 유망하고 도적들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이에 견훤은 은근히 반역의 마음을 품고 무리를 .. 더보기
의상 대사 관련 사료 의상 대사 관련 사료 법사 의상의 아버지는 한신이라 했으며, 성은 김씨다. 나이29세에 서울 경주 황복사에서 머리를 깎아 중이 되었다. 얼마 후 중국으로 가서 부처의 교화를 보려 하여 마침내 원효와 함께 요동으로 갔다가, 변방 순라군의 정탐자에게 잡혀 수 십일간 잡혀있다가 간신히 빠져나왔다. 영휘 초년에, 당나라의 귀국선을 얻어타고 중국으로 갔다. 처음에 양주에 머물는데, 주장 유지인이 의상을 청해다가 그 관아 안에 머무르게 하면서 접대를 후하게 해주었다. 후에 종남산 지상사를 찾아가서 지엄을 뵈었다. 지엄은 지난 밤 꿈에 큰나무가 조선에서 나서 잎이 널리 퍼져 중국으로 와서 덮는데, 그 위에 봉황새의 보금자리가 있었으므로 올라가 보니 한 개의 마니보주가 있었으며 광명이 멀리 비치는 것이었다. 꿈을 깬 .. 더보기
원효 대사 원효 대사 원효는 언제나 술에 취한 채 방방곡곡 촌락을 누비며 노래를 부르고 춤추고 다니며 불도를 전하였다. 이 때문에 뽕 따는 늙은이에서부터 무뢰배에 이르기까지 부처님의 명호를 외우고, 나무아미타불이라는 합장의 미덕을 알았으니, 원효의 교화가 참으로 컸다 하겠다. 원효 왕이 백좌인왕경 대회를 설치하고 두루 덕이 높은 승려들을 찾았다. 마을 사람들이 명망이 높은 원효를 천거하였으나, 여러 승려들이 그를 미워하여 왕에게 나쁘게 말하니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원효가 금강삼매경론의 소(불경의 주석)를 강론하는 날 왕과 신하, 승려 등 많은 사람이 법당으로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원효가 큰 소리로 “옛날 서까래 백 개를 구할 때는 비록 참가하지 못하였으나, 오늘 대들보를 눕히는 데는 나 혼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 더보기
불교 대중화 - 욱면비 염불서승 불교 대중화 - 욱면비 염불서승 남의 집에서 종 노릇을 하는 욱면은 주인을 따라 절에 가서 염블을 하고자 하였다. 주인은 그녀가 종 노릇만을 제대로 하지 않는 것에 배알이 틀려 매일 곡식 두 섬을 주고서 하루 저녁에 다 찧으라고 하였다. 욱면은 그래도 초저녁에 일을 마치고 절에 가서 염블을 하였다. 그녀는 스스로 뜰에 말뚝을 박고 두 손 바닥을 노끈으로 꿰어 좌우로 흔들면서 블공을 드렸다. 그렇게 하기를 9년이 지 난 후 하늘에서 커다란 소리가 들리더니 욱면은 들보를 뚫고 나가며 해골이 부서졌고, 몸은 부처로 변하여 연화대에 앉아 큰 광명을 발하며 천천히 사라졌다. 권6 감통 제7 욱면비 염불서승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