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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인의 사회 생활 증거 사료 고구려인의 생활 2월, 명령을 내려 "급하지않은 일은 뒤로 미루라"고 명하고, 사자를 군, 읍에 보내어 농사와 누에치기를 권장하였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후한 요동 태수 최식이 말하기를 "지금 요동에서는 쟁기로 농사를 짓는데 끌채의 길이가 4척이어서 서로 도는 데 방해가 된다. 두 마리 소를 사용하는 데 두 사람이 끌고 한 사람이 쟁기를 잡고 간다. 그 뒤에 한 사람이 씨를 뿌리고 한 사람이 덮는다. 대개 소 두 마리와 여섯 사람이 함께 일한다."하였다. -제민요술, 경전제일- 그들의 풍습에는 음식은 아껴서 먹으나 궁실은 잘지어 치장한다. 살고 있는 좌우에 큰 집을 세우고 귀신에게 제사 지낸다. 또 영성과 사직에도 제사를 지낸다. 그 나라 사람들은 성질은 포악하고 급하며 노략질하기를 좋아한다. - .. 더보기
진한의 풍속과 특징 위서 동이전 - 진한 진한은 마한의 동쪽에 있다. 노인들은 대대로 전하여 말하기를, 고 하였다. 성책이 있으며, 그 언어는 마한과 달라서 나라(國)를 방(邦)이라 하고 활(弓)을 호(弧)라 하며, 도적(盜賊)을 구(寇)라 하고, 술잔을 돌리는 것(行酒)을 행상(行商)이라고 한다. 서로 불러 모두 도(徒)라고 하여 진(秦)나라 사람들과 흡사한 점이 있으니 단지 연(燕)나라, 제(齊)나라의 명칭만은 아니다. 낙랑(樂浪) 사람을 아잔(阿殘)이라고 부르는데, 동방 사람들은 나(我)를 아(阿)라고 하니 낙랑인들은 본디 그 처져 있는 나머지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지금도 진한(辰韓)을 진한(秦韓)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다. 처음에는 여섯 나라가 있었는데 차츰 나뉘어 12국이 되었다. - 삼국지 위서 동이전, 진한 -.. 더보기
변한의 풍속과 특징 위서 동이전 - 변진 변진은 진한과 서로 섞여 있으며 역시 성곽이 있다. 입는 옷과 사는 곳은 진한과 같다. 언어와 법속은 서로 비슷하지만 제사하는 귀신에는 다른 점이 있다. 변진은 역시 12국이다. 또 여러 작은 별읍이 있어서 제각기 거수가 있다. 그 중 큰 세력을 지닌 이를 신지라고 한다. 그 다음에는 험측이 있고, 다음에는 번예가 있으며, 다음에는 살해가 있고, 다음에는 읍차가 있다. 변한과 진한을 합하면 모두 23국이다. 대국은 4-5천가이고, 소국은 6-7백가로서 모두 4-5만호이다. 그 가운데 12국은 진왕에게 복속하는데, 진왕은 항상 마한 사람을 세워 대대로 이어가면서 진왕 스스로 서서 왕이 되지는 못하였다. 변진의 나라에서는 철이 생산되며 한, 예, 왜가 모두 와서 사 간다. 시장에서의 모.. 더보기
동예인의 풍속 - 족외혼, 책화, 무천 등 동예인의 생활과 풍속 예는 남쪽으로는 진한과 북쪽으로는 고구려, 옥저와 맞닿아 있고, 동쪽으로는 큰 바다에 닿았으니, 오늘날 조선 동쪽이 모두 그 지역이다. 호수는 2만이다 대군장이 없고 한 시대 이래로 후, 읍군, 삼로라는 관직이 있어 하호를 다스렸다. 그 나라 노인들은 예로부터 스스로 일컫기를 고구려와 같은 종족이라고 하였다. 언어와 예절과 풍속은 대체로 고구려와 같지만 옷차림은 다르다. 풍속은 산과 내를 중요시하여, 산과 내에 각기 부분을 만들어 놓고, 함부로 들어가지 않았다. 동성끼리는 결혼하지 않는다. 해마다 10월이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밤낮으로 술 마시며 노래를 부리고 춤추니 이를 무천이라고 한다. 또 호랑이를 신으로 여겨 제사를 지낸다. 부락을 함부로 침범하면 벌로 노비와 소, 말을 부.. 더보기
옥저의 민며느리제도 옥저 - 민며느리제도 그 나라 혼인 풍속은 여자 나이 10살이 되기 전에 혼인을 약속한다. 신랑집에서는 여자를 맞이하여 다 클 때까지 길러 아내로 삼는다. 여자가 어른이 되면 친정으로 되돌려 보낸다. 친정에서는 돈을 요구하는데 신랑집에서 돈을 지불한 뒤 다시 신랑집으로 돌아온다. - 삼국지 위서 동이전, 동옥저 - 사료해석 : 민며느리제도는 고구려의 서옥제와 비교해서 생활상을 파악하시면 재미있습니다. 더보기
동옥저인의 생활상 동옥저의 생활 동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 동쪽에 있는데, 개마대산은 큰 바닷가에 맞닿아 산다. 지형이 동북은 좁고 서남은 길어서 천리 정도나 된다. 북쪽은 움루, 부여와 남쪽은 예맥과 맞닿아 있다. 호수는 5천호인데, 대군왕은 없으며 읍락에는 각각 대를 잇는 우두머리(장수)가 있다. 말은 고구려와 대체로 같지만 경우에 따라 다르기도 하다. 여러 옥저 읍락 거수들은 스스로 삼노라 일컬으니 삼노는 예전에 한나라 현이었을 때 제도다. 나라가 작아서 큰 나라 틈바구니에서 핍박받다가 결국 고구려에 신하가 되었다. 고구려는 그 중에서 대인을 두고 사자로 삼아 함께 통치하게 하였다. 또 대가로 하여금 조세를 한꺼번에 거둬들이게 하여 맥, 포, 어, 소금, 해초류 등을 천리나 되는 거리에서 져 나르게 하였다. 또 동옥저.. 더보기
고구려의 위치 짐작 사료 초기 고구려의 터 그 나라의 말은 모두 몸이 작아서 산에 오르기에 편하다. 사람들은 힘이 세고 전투에 익숙하여 옥저와 동예가 모두 무릎을 꿇었다. 또 소수맥이 있다. 고구려는 대수 유역에 나라를 세워 살았는데, 서안평현 북쪽에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 작은 강이 있어서 고구려의 별종이 이 소수 유역에 나라를 세웠으므로 그 이름을 따서 소수맥이라고 하였다. 그곳에서는 맥궁이라는 좋은 활이 나온다. - 삼국지 위서 동이전, 고구려 - 사료해석 : 보통 대수를 압록강으로, 소수를 혼강(동가강)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혼강의 흐름은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는 소수의 위치와 맞지 않습니다. 최근에는 압록강과 합류한 다음 바다로 흘러가는 장전강을 소수로 보고 있습니다. 삼국사기에는 양맥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더보기
건국기 고구려인의 생활 초기 고구려의 생활 고구려는 요동 동쪽 천리밖에 있다. 남쪽은 조선, 예맥과 동쪽은 옥저와 북쪽은 부여와 국경을 마주한다. 환도 아래 도읍하였는데, 면적은 사방 2천리가 되고 호수는 3만이다. 큰 산과 깊은 골짜기가 많고 넓은 들은 없다. 산골짜기에 살면서 산골짜기에 흐르는 물을 마신다. 좋은 논이 없어 부지런히 농사를 지어도 식량이 넉넉하지 못하다. 동이의 옛 말에 따르면 고구려는 부여의 별종이라고 하는데, 말이나 풍속 따위는 부여와 많이 같지만 기질이나 옷차림이 다르다. 본디 연노부, 절노부, 순노부, 관노부, 계루부의 5족이 있었다. 처음에는 연노부에서 왕이 나왔으나 점점 약해져서 지금은 계루부가 왕위를 차지했다. 백성들은 노래와 춤을 좋아하여 나라 안 촌락마다 저물어 밤이 되면 남녀가 떼지어 모여.. 더보기
부여인의 생활상(삼국지) 부여의 생활 2 은력 정윌에 지내는 제천 행사는 국중 대회로 날마다 마시고 먹고 노래하고 춤추는데, 그 이름은 영고라고 하였다. 이 때는 형옥을 중단하고 죄수를 풀어주었다. 국내에 있을 때 옷은 흰색을 숭상하며, 흰 베로 만든 큰 소매 달린 도포와 바지를 입고 가족신을 신는다. 외국에 나갈 때는 비단옷, 수놓은 옷 모직옷을 즐겨 입고, 대인은 그 위에다 여우, 살쾡이, 원숭이, 희거나 검은 담비 가죽으로 만든 갓옷을 입었으며, 금은으로 모자를 장식하였다. 통역인이 이야기를 전할 때는 모두 꿇어 앉아서 손으로 땅을 집고 가만가만 이야기한다. 형벌은 엄하고 각박하여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하고 집안 사람은 직몰하여 노비로 삼는다. 도죽질을 하면 도둑질한 물건의 12배를 변상하게 하였다. 남녀가 음란한 짓.. 더보기
한나라의 분열 정책과 고구려의 책구루 한의 분열정책 - 고구려의 책구루 한나라 때 북치고 피리부는 재주꾼을 주었다. 언제나 현도군으로부터 조복과 의책을 받아갔는데 고구려가 그 명부를 주관하더니 나중에는 점차 교만하고 방자해져서 다시는 군에 나가지 아니하고 동쪽 경계에 작은 성을 쌓고 조복과 의책을 그 가운데 넣어두면 정초에 와서 가져갔다. 지금은 오랑채들이 오히려 이 성에 이름을 붙여 책구루라 하는데 구루는 고구려말로 성이라는 뜻이다. - 삼국지 위서 동이전 - 사료해석 : 고조선이 멸망하고 예, 맥, 한족들에게 한족인 분열정책을 실시하였습니다. 예족(부여족)과 한족(3한족)은 그 분열책에 넘어갔지만, 맥족(고구려족)은 분열정책에 넘어가지 않고 고대 국가로 확실하게 성장해갑니다. 조복과 의책을 주는 중국의 분열책에 고구려는 성(구루)을 쌓고..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