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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풀이/역사 사료와 데이터

중국사에 나오는 한국사 자료들 - 삼국지 위서 동이전 고구려

중국사에 나오는 한국사 자료들 - 삼국지 위서 동이전 고구려

  고구려는 부여에서 나온 것이다. 그들이 말하기를, 자기들은 주몽의 자손이라고 한다. 주몽의 어머니는 하백의 딸인데, 원래 부여왕이 밤 안에 가두어 두었었다. 그런데 햇빛이 그의 몸에 비쳐서 괴로우므로 그녀는 이 햇빛을 피해서 딴 자리로 옮겼다. 그러나 햇빛은 계속 그녀의 몸을 따라다니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그녀는 이내 태기가 있어서 알 하나를 낳았는데, 크기가 곡식 닷 되 되는 분량만하다.

  부여왕은 괴상히 여겨 이것을 내다가 버려서 개를 주었다. 그러나 개는 이 알을 머지 않는다. 이번에는 돼지에게 주었지만 돼지도 역시 먹지 앟는다. 길거리에 버리면 길을 가던 소나 말이 피해 다니고 또 들에 버리면 모든 새들이 날아와서 날개로 그 알을 보호해 준다.

  부여왕은 이상해서 그 알을 쪼개 보려 했다. 그러나 아무리 쪼개려 해도 깨지지가 않는다. 그는 하는 수 없어 알을 낳은 그 어머니에게 돌려 보냈다. 그 어머니는 이불로 싸서 따뜻한 방바닥에 놓아 두었다. 그랬더니 얼마 안 되어 그 알에서는 한 남자 아이가 껍질을 깨치고 나오는 것이었다. 이 아이가 자라자 자를 주몽이라 했다. 그 곳 풍속에 이 주몽이란 말은 활을 잘 쏜다는 뜻이다. 그러나 부여 사람들은 이 주몽이 사람이 낳은 아이가 아니니 장차 딴 뜻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부여왕에게 이 아이를 없애라고 칭했다. 그러나 부여왕은 듣지 않았다. 왕은 주몽에게 명하여 말을 치라고 했다. 이리하여 주몽은 말을 기르기 시작했는데, 그는 말을 한 번 시험해 보면 말이 좋은 말인지 나쁜 말인지를 잘 알아냈다. 너무 날랜 말은 먹는 것을 조금씩 주어서 파리하게 만들고, 둔한 말은 먹을 것을 잘 주어 살 찌게 만들었다. 부여왕은 속을 모르고 살 찐 말은 자기가 타고 파리한 말은 주몽에게 주었다.

  어느 날 산에 나가 사냥을 하게 되었다. 주몽은 하도 활을 잘 쏘기 때문에 한 번 쏘는데 화살을 꼭 하나씩만 내 주었다. 하지만 주몽은 쏘기만 하면 짐승을 맞히어 잡은 것이 제일 많았다. 이것을 보고 부여 신하들은 또 그를 죽일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주몽의 어머니는 이들의 계획을 탐지해 알았다. 그리하여 주몽에게 말한다. [이 나라에서 장차 너를 해치려 한다. 너는 재주와 꾀가 있으니 멀리 딴 곳으로 가서 일을 도모하도록 해라.]

  주몽은 이에 오인, 오위 두 사람과 함께 부여 땅을 떠나 동남쪽을 바라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도중에서 그들은 큰 강물을 하나 만났는데 다리도 배도 없고, 뒤에서는 부여 사람들이 몹시 급히 따라온다.

  주몽은 다급했다. 그는 강물을 향해 말하기를, [나는 태양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이다. 오늘 도망하는 길인데 쫓는 군사는 저렇게 급히 몰려 오니 어떻게 하면 이 강물을 건널 수가 있겠는가] 했다.

  말이 끝나자 물 속에서 물고기와 자라들이 무수히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 준다. 주몽이 이 다리를 이용해서 물을 건너고 나자 물고기들은 흩어져 물 속으로 사라졌다. 뒤를 따르던 부여 군사들은 주몽의 뒤를 쫓지 못하고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주몽은 보술수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주몽은 세 사람을 만났는데 그 중 한 사람은 마의를 입고, 한 사람은 납의를 입었으며, 한 사람은 수조의를 입었는데 그들은 함께 주몽을 따라 슬승골성에 이르러 거기에서 살면서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고 하고 주몽의 성도 고로 했다.

  처음에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그에게는 아내가 있어 태기가 있었는데, 주몽이 도망한 뒤에 아들을 낳아 이름을 시려해라고 했다. 이 아이가 자라자 주몽이 나리의 임금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 곧 그 어머니와 함께 부여에서 도망하여 따라갔다. 주몽은 그의 이름을 여달이라 고치고 나라 일을 맡겼다.

  주몽이 죽자 여달이 대를 이어 섰고, 여달이 죽자 그 아들 여속이 대신 섰으며, 여속이 죽자 그 아들 막래가 이어 서서 부여를 정벌하여 부여가 크게 패하니 드디어 이를 합쳤다.

  그 뒤로 막래의 자손이 대대로 서로 전해 오다가 궁에게 이르렀다. 궁은 나면서 이내 눈을 뜨고 물건을 보았다. 이것을 보고 온 나라 사람들은 그를 미워했다. 그가 자라자 몹시 흉학해서 나라가 깨지고 말았다.

  궁의 증손 위궁도 역시 나면서 이내 사람을 보았다. 사람들은 그가 증조 궁과 같다고 해서 이름을 위궁이라고 했다. 고구려에서는 서로 비슷한 것을 위라고 한 때문이었다.

  위궁은 역시 용맹이 있고 힘이 세며, 활을 잘 쏘고 말을 잘 탔다. 위나라 정시년중에 요동과 서안평을 침입하여 이 땅은 유주자사 무구검에게 깨진 바 되고, 그 현손인 을불리와 이자쇠는 열제 때 모용씨들과 서로 싸워 왔다.

  건국 사년에 모용원진이 군사를 거느리고 쳐서 남협으로부터 들어가서 목저에서 싸워 이자쇠의 군사를 크게 깨치고 승승해서 크게 군사를 몰고 쫓아가 드디어 환도에 들어가니 쇠는 혼자서 도망해 갔다. 이에 원진은 쇠의 아비의 무덤을 헤치고 그 시체를 파내며, 그의 어미와 아내, 그리고 온갖 보물과 남녀 백성 오만여 명을 약탈해 가고 그 궁실을 불 태우고 환도성을 헐고 돌아갔다. 이런 뒤로부터는 쇠는 사신을 보내 오지도 않고 서로 막혀 원수처럼 지냈는데, 뒤에 가서 쇠는 백제에게 죽었다.

  세조 때에 와서 쇠의 증손 연이 비로소 사신 안동을 보내서 표문을 받들고 방물을 바치면서 나라의 이름을 내려달라고 청했다. 세조는 그 정성이 간곡한 것을 아름답게 여겨 조서를 내려 그 나라의 이름을 내리고 원외산기시랑 이오를 보내서 연을 도독요해제군사 정동대장군 영호동이중랑장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을 삼았다. 이 때 오는 그가 있는 평양성에 이르러 그가 있는 곳을 찾아봤다고 한다.

  요의 동남쪽 일천여 리 되는 곳으로서 동쪽으로 책성에 이르고 남쪽으로 조그만 바다에 이르매 북쪽으로 옛 부여 땅에 이른다. 백성들의 호수가 그전 위나라 때보다 삼배나 되고, 그 땅은 동서로 이천여 리, 남북으로 일천여 리가 된다.

  백성들은 모두 여기에서 대대로 내려오면서 산골짜기를 따라 집을 짓고 살며, 무명과 비단과 짐승의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는다. 밭이 토박해서 누에 치는 것이나 농사 짓는 것이 어느 것이나 자급자족이 되지 못한다. 그런 때문에 그 곳 사람들은 음식을 절약한다.

  그 곳 풍속은 음란해서 노래하고 춤 추는 것을 좋아한다. 밤이면 남녀가 여럿이 모여서 장난하고 놀며, 아무런 귀천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깨끗한 것을 좋아해서 그 나라 왕은 궁실을 보기 좋게 다스리고 지낸다.

  그들의 관리 명칭에는 알사, 태사, 태형, 소형의 칭호가 있다. 머리에는 절풍건을 쓰는데, 그 모양은 변과 같다. 그 옆에는 새깃을 꽂고 귀한 사람의 천한 사람의 차이가 있다. 서 있을 때는 팔짱을 끼고 꿇어엎드려 절을 할 때엔 한 쪽 다리를 뻗는다. 보통 걸음을 걷는 것도 달아나는 것과 같다.

  그들은 항상 시월이 되면 하늘에 제사를 올린다. 그들이 공회에서 입는 옷은 모두 비단에 금이나 은으로 수를 놓아서 장식을 한다. 그들은 또 걸터앉기를 좋아하고 음식에는 그릇을 이용한다.

  삼척마라는 작은 말이 나는데, 그들의 말을 드르면 이 말은 원래 주몽이 타던 말의 종자라고 한다. 이것은 곧 과하마이다.

  그 뒤로부터는 사신을 보내서 서로 찾았고, 해마다 황금 이백 근과 백은 사백 근을 바쳤다. 이 때 풍문통이 무리를 거느리고 도망해 가니 세조는 산기상시 봉발을 보내서 연에게 조서를 내려 문통을 돌려 보내라고 했다.

  그러나 연은 글을 올려 말하기를, [마땅히 문통으로 더불어 함께 왕화를 받들겠습니다]하고 마침내 돌려 보내지 않았다. 이에 세조는 노해서 가서 그들을 토벌하려 하자 낙평왕 비 등이 의논하여 뒷일을 기다리자 하므로 세조는 이를 중지했다. 그러나 문통은 또한 얼마 안 되어 연에게 죽고 말았다.

  뒤에 문명태후가 현조의 육궁이 갖추어지지 못했다고 해서 연에게 칙서를 내려 그 딸을 바치라고 명령했다. 연은 표문을 받들어 말하기를, [딸은 이미 출가했아오니 아우의 딸도 무방하다면 말씀대로 행하겠습니다] 했다. 이에 조정에서는 이를 허락했다.

  중국 조정에서는 안락왕 진과 상시 이부 등을 보내어 국경에 이르러 폐백을 보냈다. 그러나 연은 좌우 사람들의 말에 현혹되었다. 좌우 사람들은 말하기를, [조정에서 옛날에 풍씨와 혼인하더니 얼마 안 되어 그 나라를 멸망시켰습니다. 그러한 과거가 있은 지 오래되지 않았으니 마땅히 핑계를 잡아 사양하는 것이 옳습니다] 한다.

  연은 드디어 글을 올려 거짓 아우의 딸이 죽었다고 했다. 조정에서는 그것이 거짓이 아닌가 의심해서 다시 산기상시 정준을 보내서 꾸짖어 말하기를, [정말 그 딸이 죽었거든 다시 일갓집 딸 중에서 골라서 보내라] 했다.

  연은 말하기를, [만일 천자께서 저의 먼젓번 죄를 용서하신다면 마땅히 말씀대로 받들어 행하겠습니다] 했다. 이렇게 말이 왕래할 무렵 마침 현조가 붕해서 이 이야기는 중지되고 말았다.

  고조 때에 이르러서는 연이 공물 바치는 것이 전의 배나 되었고, 조정에서 내리는 물건도 또한 차츰 더해 갔다. 이 때 광주가 바다 가운데서 연이 소도성에게로 보내는 사자 여노 등을 잡아서 대궐로 보내 왔다.

  이에 고조가 조서를 내려 연을 책망하기를, [도성이 친히 그 임금을 죽이고 왕의 이름을 도둑질해서 강좌에 있으므로 짐이 바야흐로 군사를 일으켜 그 나라를 멸하고, 끊어졌던 대를 유씨에게 이어 주려 했는데, 경은 국경을 넘어 외교를 해서 멀리 찬역하는 적들과 통하니 이 어찌 번신의 절조를 지키는 의리란 말인가. 그러나 이제 이 한가지 과실로 해서 경의 지난날의 정성을 가려 버리고 싶지 않기로 곧 돌려 보내 주는 것이니, 경은 여기에 감동하여 그 허물을 뉘우치고 다만 조정의 밝은 법에 순종하여 편안히 맡은 바 땅을 다스리고 그 곳의 형편을 알려 주기 바란다] 했다.

  태화 십오년에 연이 죽으니 나이 백여 세였다. 고조가 동쪽 들에 나가서 거애하고 알자인 복야 이안상을 보내서 증직으로 거기대장군 태부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을 주고 시호를 강이라 했다. 또 대흥려를 보내서 연의 손자 운에게 사지절도독 요해제군사 정동장군 영호동이중랑장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을 배하고, 의관과 복물, 거기 등의 장식을 하사했다.

  또 조서를 보내 운으로 하여금 세자를 보내 입조하게 하여 교구의 예를 베풀게 했다. 그러나 운은 글을 올려 병이 있다고 칭탁하고 오직 그 종숙 승우를 시켜 사신을 따라 대궐에 가 뵙게 하므로 조정에서는 이를 엄하게 책망했다. 이런 뒤로부터는 해마다 물건을 바쳐 왔다. 정시년중에 세조가 동당에서 그 사신 예실불을 불러 보았다. 예실불은 나와서 말하기를, [고려는 멀리 하늘 끝에 있어 해마다 순수한 정성을 바쳐 왔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는 나는 물건들은 바칠 것이 없아옵고, 다만 호아금이 부여에서 나고 구슬이 섭라인 신 운이 오직 끊어진 것을 이을 의리로서 백성들을 모두 국경 안으로 옮겼아오니, 두 물건이 왕부에 오르지 못하는 것은 실상 이 두 적들의 소위이옵니다] 했다.

  세종이 말하기를, [고려는 대대로 상장의 대우를 받아 해외 나라들을 제어해서 구이들을 억제하여 실지로 이를 정벌해야 할 것인데, 이제 모든 부끄러움을 끼치고 있으니 이는 누구의 허물이겠는가. 옛날에 공물을 바치지 않은 허물도 그 책임이 그대들에게 있는 것이니 경은 마땅히 짐의 뜻을 경의 임금에게 전하여 짐의 생각하는 바의 대략을 알도록 힘써, 무리를 해치는 자들을 잘라 없애고 동쪽 백성들을 편안히 하여 두 고을로 하여금 옛터를 회복하도록 하고 토산물도 빠짐없이 바쳐 오도록 하라] 했다.

  신구년중에 운이 죽자 영태후가 동당에서 거애하고 사신을 보내어 그에게 거기대장군 영호동이교위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을 증직했다. 또 그 세자 안을 배하여 진동대장군 영호동이교위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을 삼았다.

  정광 초년에 광주가 또 바다 가운데서 소연이 준 영동장군의 의관과 칼과 패물, 그리고 그의 사자 강법성 등을 얻어서 경사로 보냈다.

  안이 죽고 아들 연이 서자 출제 초년에 조서를 내려 연에게 사지절 산기상시 거기대장군 영호동이교위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의 칭호를 더해 주고, 의관과 복물과 거기 등의 장식을 하사했다.

  천평 년중에 또 조서를 내려 연에게 시중거기대장군의 칭호를 더해주고, 나머지는 모두 전대로 두었다. 연이 죽고 그 아들 성이 서자 무정 말년까지 그들이 바치는 물건이 해마다 없는 때가 없었다.(魏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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