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에 나오는 한국사 자료들 - 북사 고구려전
고구려는 그 조상은 부여에서 나왔다. 부여왕이 어느 날 하백의 딸을 얻어서 방 안에 가두어 두었더니 해가 쫓아다니면서 그 몸에 비쳐서 그녀는 몸을 피했다. 그러나 햇빛이 계속해 따라다니더니 이윽고 태기가 있어 알 한 개를 낳았는데 크기가 곡식 닷 되의 부피만큼이나 했다. 부여왕은 이 알을 내다 버려 개에게 주었으나 개는 먹지 않는다. 다시 돼지에게 주었으나 돼지도 먹지 않는다. 이번에는 길에 버렸더니 소와 말이 보고 피한다. 들판에 내다 버렸더니 새떼들이 날아와서 날개로 덮어 보호해 준다. 왕은 이상히 여겨서 깨치려 했으나 쪼개지지 않는다. 이에 드디어 그 어머니에게 돌려 보냈다. 어머니가 포대기로 싸서 따뜻한 곳에 놓아 두었더니 그 속에서 남자 하나가 알을 깨치고 나왔다. 이 아이가 자라자 이름을 주몽이라고 지었다. 이 주몽이란 말은 활을 잘 쏜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 나라 사람들은 주몽이 사람의 아들이 아니라 해서 없애라고 청한다. 하지만 왕은 이 말을 듣지 않고 말을 길러 보라고 했다. 주몽은 자기가 시험해 보고서 좋은 말과 나쁜 말을 구별했다. 날랜 말에게는 먹을 것을 줄여서 파리하게 만들고, 둔한 말에게는 먹을 것을 많이 주어서 살찌게 했다. 부여왕은 살찐 말은 자기가 타고 파리한 말은 주몽에게 주었다. 그 후 어느 날 사냥을 나갔다. 주몽이 활을 잘 쏜다 해서 화살 한 개를 주면서 쏘아보라고 했다. 그러나 주몽은 화살 한 개를 가지고서도 짐승 여러 마리를 잡았다. 이것을 보고 부여 신하들은 또 그를 죽이려 한다. 이것을 알고 그 어머니가 주몽에게 알려 주었다. 이에 주몽은 부하 언위 등 두 사람을 데리고 동남쪽으로 달아났다. 도중에 큰 물을 만났다. 건너고자 해도 그 물에는 다리가 없어 건널 수가 없다. 뒤에서는 부여 군사가 몹시 급하게 쫓아온다. 주몽은 물을 향해 말한다. [나는 태양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이다. 이제 뒤에 쫓는 군사가 거의 따라오는데 이 물을 어떻게 하면 건너간단 말이냐.] 말을 마치자 물속에서 물고기들이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 준다. 주몽이 다리를 건너가자 물고기들은 이내 흩어져서 따르던 군사들은 건너지 못하고 되돌아갔다. 주몽은 드디어 보술수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세 사람을 만났는데, 한 사람은 베옷을 입고, 한 사람은 실로 만든 옷을 입고, 또 한 사람은 마름으로 만든 옷을 입었다. 이들은 모두 주몽을 따라 흘승골성에 이르러 거기에서 살면서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 하고, 주몽의 성을 고라고 했다.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그의 아내는 태기가 있었다가 주몽이 도망한 뒤에 아들을 낳았는데, 처음에는 이름을 여해라고 했었다. 그가 자라자 주몽이 왕이 된 것을 알고, 그 어머니와 함께 주몽에게로 돌아가니 이름을 여달이라 하고 국가의 일을 맡겼다. 주몽이 죽자 아들 여달이 서고 또 여달이 죽자 그의 아들 여율이 섰다. 여율이 죽자 또 그 아들 막래가 서서 이에 부여까지 통합했고, 한나라 무제 원봉 사년에 조선을 멸하고 현도군을 두고, 고구려로 현을 삼아서 소속시켰다. 한나라 때 그에게 의복과 관과 악기를 주면 그들은 항상 현도군으로 해서 와서 받아 갔다. 그러나 뒤에 가서는 차츰 교만해져서 다시 현도군으로 나오지 않고, 다만 동쪽 국경에 조그만 성을 쌓아놓고 받았는데, 드디어 이 성을 적구루라고 했다. 구루란 즉 고구려의 성 이름이다. 왕망 초년에 고구려 군사를 내어 오랑캐를 치려 했으나, 고구려가 말을 듣지 않으므로 왕망은 이들을 억지로 내보내니 이들은 모두 국경으로 나가서 도둑이 되었다. 이에 모든 주군에서는 이 허물을 모두 고구려의 후추에게 돌려 보내어 이를 꾀어 내어 베게 했다. 이에 왕망은 크게 기뻐하여 고구려란 이름을 고쳐 하구려후라고 했다. 광무 건무 팔년에 고구려는 다시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쳐서 조공이 그 뒤 상제, 안제년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막래의 자손 궁에 이르러 자주 요동을 침범하자 현도태수 채풍이 이를 쳤으나 능히 금하지 못했다. 궁이 죽자 아들 백고가 섰는데, 순제, 환제 사이에 이르러 다시 자주 요동을 침범하여 노략질했다. 영제 건영 이년에 현도태수 경림이 이를 쳐서 수백 명의 머리를 베고 사로잡아 가니 그제야 백고가 항복해서 요동에 소속되었다. 공손도가 해동에 이름을 떨칠 때 백고도 그와 함께 좋게 지냈으나, 백고가 죽고 아들 이이모가 서자 이이모는 원래 백고가 살아 있을 때로부터도 자주 요동을 침범하던 터여서 다시 도망해 온 오랑캐 오백여 호까지 받아들였다. 건안년중에 공손강이 군사를 내어 이를 쳐서 그 나라를 깨치고 부락을 불사르자 이에 항복했던 오랑캐들도 또한 반란을 일으키니 이이모는 다시 구도산 밑에 새 나라를 세웠다. 그 뒤에 이이모는 다시 현도를 치니 현도는 요동과 합세해서 이를 쳐서 크게 깨쳤다. 이이모가 죽고 아들 위궁이 섰다. 처음에 위궁의 증조 궁은 나면서 이내 눈을 뜨고 물건을 보니 온 나라 사람들이 이를 미워했다. 그가 자라자 흉악하고 사나와서 이로 인해 나라가 쇠잔해지고 망했다. 뒤에 위궁도 나면서부터 사람을 보았다. 고구려에서는 서로 같다는 것을 위라고 하기 때문에 그 증조 궁과 같다고 해서 이름을 위궁이라고 했다. 위궁은 역시 용맹과 힘이 있고 말을 잘 타며 활을 잘 쏘았다. 위나라 경초 이년에 태부 사마선왕을 보내서 무리를 이끌고 공손문의를 칠 때, 위궁도 역시 주부, 대가 등을 보내서 군사 수천 명을 거느리고 가서 도왔다. 정시 삼년에 위궁이 요동과 서안평을 침범하니 오년에 유주자사 무구검이 군사 만 명을 거느리고 현도에 나가서 위궁과 비류수에서 크게 싸우니 위궁이 패해 달아났다. 이에 무구검은 위궁을 따라서 적현에까지 이르러 수레를 매달고 말을 묶어 가지고 환도산에 올라가서 그 도읍을 무찌르니 위궁은 오직 아내와 식구만 데리고 멀리 도망했다. 육년에 무구검은 다시 위궁을 치니 위궁은 모두 가 벼슬을 가진 사람들만 데리고 옥저로 달아났다. 무구검은 다시 장군 왕기를 시켜 이를 쫓아서 옥저 땅 천여 리를 끊고 숙신 남쪽 경계에 이르러 돌에 이 공로를 기록해 새기고, 또 환도산을 고쳐 불내성이라고 새겨놓고 돌아왔다. 그 뒤에 위궁은 다시 중국과 상통했다. 진나라 영가 때 난리에 선비 모용외가 창려의 대극성을 점령하자 원제는 그에게 북평주자사를 제수했다. 위궁의 현손 을불리가 자주 요동을 침범하였는데, 모용외는 이를 막지 못하고 있었고 을불리가 죽자 그 아들 쇠가 대신 섰다. 위나라 건국 사년에 모용외의 아들 황이 이를 쳐서 남섬으로부터 들어가서 목저에서 싸워 쇠의 군사를 크게 깨치고 따라서 환도까지 가니 쇠는 혼자서 도망해 숨었다. 이에 황은 쇠의 아비의 무덤을 파헤치고, 또 그 어미와 아내가 가진 진기한 보배와 남녀 오만여 명을 사로잡고 그들이 살던 집을 불 사르며 환도성을 허물어 버리고 돌아왔다. 이리하여 쇠는 그 뒤에 백제에서 죽인 바 되었다. 진나라 효무 태원 십년에 고구려가 요동 현도군을 쳤고, 뒤에는 연나라 모용수가 그 아우 농을 보내서 고구려를 쳐서 두 군을 회복시켰다. 모용수의 아들 보는 고구려왕 안으로 평주목을 삼고 요동, 대방 두 국왕을 봉해서 비로소 장사, 사마, 참군관 등을 두었었는데, 그 뒤에 가서 요동군을 침략해 가졌다. 태무 때에 이르러 쇠의 증손 연이 비로소 사신을 보내어 안동에 와서 표문을 올려 공물을 바치면서 나라 이름을 청했다. 이에 태무는 그 정성을 가상히 여겨 그 나라의 이름을 주고 원외산기시랑 이오를 시켜서 연을 배하여 도독요해제군사 정동대장군 영동이중랑장 요동군공 고구려왕을 삼았다. 이오가 그들이 있는 평양성에 이르러 그 곳 방사를 찾았더니 그는 말하기를, 요동 남쪽으로 일천여 리를 가면 동쪽으로는 책성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소해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부여에 이르는데, 이곳들은 전위 때보다 호수가 삼배나 되고, 뒤에 공물과 사신을 보내서 일년에 황금 이백 근과 백은 사백 근에 이르렀다 한다. 태무가 산기상시 봉발을 보내서 연에게 조서를 내려 홍을 보내도록 했다. 이에 연이 글을 올려, [마땅히 홍과 함께 왕화를 받들어 입겠습니다]하고 종시 보내지 않았다. 태무가 노해서 장차 가서 치려고 하자 낙평왕 비 등이 의논하기를, 다시 시기를 기다려서 처리하자 하니 태무는 일을 중지했다. 그러나 홍은 얼마 안 되어 연에게 죽었다. 뒤에 문명태후가 헌문제의 육궁이 갖추어지지 않았다 해서 연에게 조칙을 내려 그 딸을 천거하라고 했다. 그러나 연은 표문을 올려, [딸은 이미 시집 갔으니 아우의 딸이라면 보내겠습니다]하므로, 조정에서는 이를 허락하여 이에 안락왕 진과 상서 이부 등을 국경까지 보내서 폐백을 보냈다. 그러나 연의 좌우 사람들은 간하기를, [조정에서 옛날에 풍씨와 혼인을 했다가 얼마 안되어 그 나라가 멸망했으니 그 거울이 멀지 않은즉 마땅히 방편을 써서 사양하십시오]하니 연은 여기에 의혹되어 드디어 글을 올려 거짓말하기를, [아우의 딸도 죽었습니다] 했다. 조정에서는 그 교만하고 거짓말하는 것을 의심하여 또 가산기상시 정준을 보내서 몹시 책망하기를, [만일 네 아우의 딸이 정말 죽었다면 다시 종실 중에서 아름다운 여자를 뽑아 보내도록 하라] 했다. 이에 연은 말하기를, [만일 천자께서 저의 전번 허물을 용서해 주신다면 삼가 말씀대로 하겠습니다]했다. 그러나 마침 헌문이 붕해서 이 일은 중지되었다. 효문제 때에 이르러 연은 공물을 전보다 배나 바쳐 오니 여기에 대해 하사하는 것도 또한 조금씩 더했다. 이 때 광주가 바다 가운데서 연이 제나라에 보내는 사신 여노 등을 잡아서 중국으로 보내자 효문제는 조서를 내려 이를 책망하기를, [도성이 친히 그 임금을 죽이고 강좌에서 임금의 이름을 도둑질했기로 짐이 군사를 일으켜 그 나라를 멸하고 유씨의 대를 끊으려고 하는데, 경이 국경 밖을 넘어 멀리 찬역한 적들과 서로 통하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번신의 절조를 지키는 의리라 하겠느냐. 이제 이 한 가지를 가지고 경의 전에 이룬 정성을 덮어 버리려 하지 않아서 곧 제 나라로 돌려 보내는 터이니, 이 용서해 준 뜻을 감동하고 제 잘못을 생각하여 천자의 밝은 법을 받고 맡은 지방을 편안히 다스려 그 동정을 보고하도록 하라] 했다. 태화 십오년에 연이 죽었는데 나이는 백여 세였다. 효문제는 동쪽 들에 나가서 거애하고, 알자 복야 이안을 보내서 연에게 거기대장군 태부 요동군공 고구려왕을 증직하고 시호를 강이라 했다. 또 대홍로를 보내서 연의 손자 운을 사지절도독 요동제군사 정동장군 영호동이중랑장 요동군공 고구려왕에 배하고 의관, 복물, 거기 등 물건을 하사했다. 또 운에게 조서를 내려 세자를 보내 입조하여 교구의 예를 펴라 했으나, 운은 글을 올려 병이 있다고 사양하고 그 종숙 승우를 보내서 사신을 따라 대궐로 들어오니 이를 엄하게 책망했다. 이로부터는 해마다 항상 공물을 바쳐 왔다. 정시년중에 동당에서 선무가 그 사신 예실불을 불러 보니 그는 말하기를, [고려는 정성이 하늘과 같이 끝이 없어 여러 대 동안 정성을 기울여 그 땅에서 나는 상모를 해마다 빠짐없이 바쳐 왔습니다. 다만 황금은 부여에서 나고, 구슬은 섭라에서 나옵는데 이제 부여는 물길에게 쫓기고, 섭라는 백제에 먹혔아옵기 국왕 신 운은 오직 끊어진 의리를 이어 모두 국경 안으로 옮겼습니다. 하오니 두 가지 물건을 왕부에 올리지 못한 것은 실상 이들 물길과 백제 두 적들의 한 짓이옵니다] 했다. 이에 선무가 말하기를, [고려는 대마다 상장의 자리를 받아 오로지 해외의 모든 나라를 제어해 왔기에 구이와 교활한 오랑캐를 모두 정벌할 수가 있었다. 그러니 지난날에 공물을 바치지 않은 죄는 그 책임이 모두에게 있는 것이다. 마땅히 짐의 뜻을 경의 임금에게 전달하여 짐을 생각하는 마음의 대략이라도 다하도록 힘쓰고, 두 고을을 옛터로 회복시켜서 상모 바치는 것을 잊지 말도록 하라] 했다. 신구년중에 운이 죽자 영태후가 그를 위해 동당에서 거애하고, 사신을 보내서 그에게 거기대장군 영호동이교위 요동군공 고려왕을 삼고, 또 그 세자 안을 배하여 안동장군 영호동이교위 요동군공 고려왕을 삼았다. 정광 초년에 광주가 또 바다 가운데서 양나라가 안에게 준 안동장군의 의관과 칼, 그리고 그 사신 강법성 등을 얻어서 서울로 보내 왔다. 안이 죽고 아들 연이 서자 효무제 초년에 조서를 내려 연에게 사지절 산기상시 거기대장군 영호동이교위 요동군공 고구려왕을 더했다. 또 천평년중에는 조서를 내려 연에게 시중거기대장군을 더하고 나머지 직함은 전과 같이 두었다. 연이 죽고 아들 성이 섰는데 공물을 바치는 사신이 해마다 오지 않는 해가 없었다. 대통 십이년에 사신을 보내서 서위에 이르러 조공을 바치고 또 제나라가 동위에게 받은 것도 바치고, 해마다 사신을 보내서 제나라에 조공을 바쳤다. 제나라 문선이 성에게 사지절시중 표기대장군 영동이교위 요동군공 고려왕을 더하고 나머지는 모두 전과 같이 두었다. 천보 삼년에 문선이 영주에 이르러 박릉 최유를 시켜 고려에 사신으로 가서 위나라 말년에 떠돌아온 사람을 데려 오라 하고, 또 최유에게 조칙하기를, [만일 듣지 않는 자가 있거든 편의대로 일을 처리하라] 했다. 최유가 고려에 도착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자 눈을 부라려 꾸짖고 주먹으로 성을 쳐서 책상밑으로 떨어뜨리니, 성의 좌우 사람들은 새처럼 순을 죽이고 감히 움직이지 못하면서 사과하고 항복했다. 이리하여 최유는 오천 호를 데리고 돌아와 복명했다. 성이 죽고 그 아들 탕이 서자 건명 원년에 제나라 폐제가 탕으로 사지절 영동이교위 요동군공 고려왕을 삼았다. 주나라 건덕 육년에 탕이 사신을 보냈고, 주나라 무제에 이르러 탕으로 상개부의 동대장군 요동군공 요동왕을 삼았다. 수나라 무제가 즉위하자 탕이 사신을 보내서 대궐에 가 뵈었고, 대장군의 칭호를 제수받고 고려왕에 고쳐 봉해졌다. 이로부터 해마다 사신을 보내서 조공하는 것이 끊어지지 않았다. 그 나라는 동쪽으로는 신라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요동 이천 리를 지나가며, 남쪽으로는 백제와 접해 있고, 북쪽은 말갈 일천여 리에 연접되어 있다. 사람들은 토착해 사는 자가 많은데 모두 산골짜기를 따라서 산다. 옷은 포목과 비단, 그리고 짐승의 가죽을 입는다. 토지는 토박하고 거칠어서 농사 짓고 누에치는 것으로 넉넉지 못하다. 그런 때문에 그 곳 사람들은 음식을 절약한다. 그 나라 왕은 궁실을 좋게 꾸미고 사는데, 평양성에 도읍하고서 이곳을 장안성이라고 한다. 이 성의 동서쪽으로 육리가 되는 곳에 산을 따라 꾸불거리면서 남쪽으로 패수해 임해 있는데, 성 안에는 오직 먹을 것과 병기만 저축해서 적을 막는 데 대비한다. 적이 오는 날에는 성 안으로 들어가 굳게 지키고 왕은 그 곁에 따로 집을 짓고 산다. 그러나 이 집에 항상 거처하는 것이 아니다. 그 밖에도 다시 국내성과 한성이 있으니, 이것은 역시 별도이다. 그래서 그 나라에서는 이것을 가리켜 삼경이라고 한다. 이 밖에도 다시 요동, 현도 등 수집 성이 있는데, 여기에도 모두 관사를 두어서 통솔하게 한다. 이들은 신라와 항상 서로 침략해서 전쟁이 쉬지 않았다. 관리의 이름으로는 대대로, 태대형, 대형, 소형, 의사사, 오졸, 태대사자, 대사자, 소사자, 누사, 의속, 선인 등 모두 십이등급이 있어 각각 안팎 일들을 나누어 다스린다. 그 중에 대대로는힘이 세고 약한 것으로 서로 싸워서 힘이 센 자가 자리를 빼앗아 차지하는 것이요, 왕이 시키는 벼슬이 아니다. 다시 또 내평과 오부의 누살이 있다. 사람들은 모두 머리에 절풍건을 쓰는데 이것은 모양이 고깔과 같다. 선비는 그 위에 새깃 두 개를 꽂고, 귀한 자가 쓰는 관은 소골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자줏빛 비단으로 만드는 것이 많다. 거기에 금과 은으로 장식을 한다. 옷은 소매가 크고 바지가 넓으며, 흰 가죽띠에 누런 가죽신을 신는다. 또 여자는 저고리와 치마에 모두 선을 두른다. 글은 오경, 삼사, 삼국지, 진양추가 있고, 병기는 중국과 대략 같다. 봄과 가을에 사냥을 할 때에는 왕이 친히 나가서 본다. 세금은 포목이 오필, 곡식이 오석이요, 노는 사람은 삼년에 한 번 세금을 내는데 십명이 합쳐서 포목 일필을 내고, 곡식은 일석을 내지만 그 다음은 칠두를 내는 사람도 있고, 제일 하등은 오두를 낸다. 형법으로는 반란을 일으키거나 모역한 자는 기둥나무에 결박하고 불로 지져서 죽이고 그 집 재산을 몰수한다. 도둑질을 한 자는 도둑질한 물건의 십 배를 받는데, 만일 집이 가난해서 물어낼 수가 없는 자나 또 그 죄가 공사간의 부채일 때는 모두 그 자녀들을 노비로 삼는 것으로 죄를 갚게 한다. 이렇듯 형벌을 엄하게 하고 보니 법을 범하는 자가 드물다. 음악은 오현금과 쟁, 필률, 퉁소, 북 따위가 있고, 갈대필리를 불어 곡조를 마친다. 해마다 연초가 되면 패수 위에 모여서 논다. 이 때 왕은 조그만 수레를 타고 우의를 벌려 세우고서 이것을 구경한다. 이 일이 끝나고 왕은 옷 한가지를 물 속에 던지면 사람들은 좌우 두 패로 갈려서 물 속에서 돌을 던지고 서로 시끄러이 싸우다가 한참 만에 그친다. 그 사람들은 깨끗한 것을 좋아하고 용모가 단정한 것을 숭상한다. 어른 앞에서는 달음질 치는 것을 가장 공경하는 것으로 여기고, 절할 때는 한 쪽 다리를 뒤로 끈다. 서 있을 때는 손을 마주 잡고 걸을 때라도 손을 잡는다. 성질은 거짓스럼고 음흉한 사람이 많아서 말이 더럽고 간결하지 못하다. 가까운 사이거나 소활한 사이를 가릴 것 없이 한 냇물에서 목욕하고, 부자간에도 역시 한 냇물에서 목욕하고 한 방에서 잔다. 노래 부르고 춤 추기를 좋아하며, 언제나 시월이 되면 하늘에 제사를 올린다. 그들이 공회에 나가는 의복은 모두 비단과 수 놓은 옷에 금과 은으로 장식을 한다. 걸터앉기를 좋아하고 식사를 할 때는 그릇과 상을 이용한다. 이 지방에서는 석 자 밖에 안 되는 조그만 말이 난다. 이것은 원래 주몽이 타던 말 종자로서 곧 과하마이다. 풍속은 음란한 것을 숭상해서 이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 노는 여자가 많고, 남편이 일정하지가 않다. 밤이면 남녀가 한 곳에 모여서 놀고 아무런 귀천의 절조가 없다. 혼인을 하는 것은 남녀간에 서로 좋은 사람이 있기만 하면 아무나 하고 곧 혼인을 한다. 이럴 때는 남자의 집에서 돼지와 술을 보내면 그만이고 아무런 재물을 보내서 맞는 예가 없다. 혹시 재물을 받는 자가 있으면 사람들은 모두 이것을 부끄럽게 여겨서 딸을 종으로 팔았다고 비웃는다. 사람이 죽으면 집 안에 빈소를 만들어 놓고 삼년을 지낸 다음에 날을 가려서 장사를 지낸다. 부모와 남편의 초상에는 삼년 동안 복을 입고 형제간에는 석 달 동안을 입는다. 초종때에는 곡하고 울지만 장사 지낼 때에는 춤 추고 음악을 잡혀 죽은 사람을 보낸다. 장사가 끝나면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에 입던 의복과 거마를 무덤 곁에 놓아 두었다가 장사에 모인 사람들이 다투어 집어가지고 간다. 이들은 불법을 믿고 귀신을 공경해서 음사가 많다. 신묘가 두 곳이 있는데 하나는 부여신이라 해서 나무로 부인의 형상을 새겼고, 하나는 고등신이라 하는데 이것은 그들의 시조인 부여신의 아들이라고 한다. 이 신들을 모두 각 관사에 두어 두고 사람을 보내서 수호하는데, 이것은 대개 하백의 딸과 주몽을 위하는 것이라 한다. 수나라가 진을 평정한 뒤에 탕이 크게 두려워 하니 진의 군사들은 곡식을 쌓아 놓고 오랫동안 지키면서 막을 계획을 했다. 개황 십칠년에 제가 새서를 하사하면서 책망하기를, [항상 사신을 보내서 해마다 조공을 바치도록 하라. 아무리 번방이라 할지라도 정성과 절조를 다하지 못한 때문에 말갈에게 쫓기고 글안에게 막히는 것이다. 옛날에는 비밀히 물건을 운반하고 조무래기들을 움직여서 사사로이 활 쏘는 자를 시켜 하국들로 숨어 다녔으니 이 어찌 그 뜻이 정당치 못해서 일부러 도둑질을 한 것이 아니겠느냐. 공관에 앉아 있어 엄하게 지킬 도리를 차리도록 하라. 또 자주 말을 보내서 변방 사람들을 살해하고, 항상 스스로 시기해서 비밀히 소식을 엿보고 있기로 내 이를 은근히 타이르는 것이니 이제부터는 스스로 반성하여 새롭게 행동을 하라] 했다. 탕이 이 글을 받고 황공히 여겨 장차 표문을 올려 사과하려 하다가 마침 병으로 죽고 아들 원이 그 자리를 계승했다. 이에 문제는 원을 배하여 상개부의동삼사를 삼고 요동공을 습작하게 하고, 옷 일습을 하사했다. 이에 원이 표문을 올려 사은하고 아울러 모두 상서로운 일들을 하례한 다음, 왕으로 봉해 줄 것을 청했다. 문제는 그를 우대하여 왕을 삼았다. 이듬해에 원은 말갈의 군사 일만여 명을 거느리고 요서를 침입하니 영주총관 위세충이 이를 쳐서 쫓았다. 문제는 노하여 한왕 양에게 명하여 원수를 삼아 수륙군을 거느리고 가서 치도록 하고 조서를 내려 그 작위를 도로 내놓도록 했다. 그러나 이때 군량이 계속해 운반되지 못하여 육군이 배를 주리고 군사가 임유관에 나가자 또 역질이 유행되어 군사의 위엄이 떨치지 못했다. 군사가 요수에 이르자 원도 역시 황송해 하고 두려워하여 사신을 보내 사죄하고, 또 표문을 올려 [요동 분토에 있는 신 원은...] 했다. 이것을 보고 제는 군사를 돌려서 처음과 같이 대접했고, 원도 역시 해마다 조공을 바쳤다. 양제가 위를 계승하자 온 천하가 모두 융성해져서 고창왕과 돌궐의 계인 가한이 모두 친히 대궐에 나와 조공을 올렸다. 이에 원을 불러 입조하라 하니 원은 두려워하여 번신의 예를 행하지 못했다. 대업 칠년에 제는 장차 원의 죄를 묻고자 해서 거가가 요수를 건너 요동성에 영을 세우고 길을 나누어 진군하려고 각각 그 성 밑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있었다. 이에 고구려에서도 나와 싸웠으나, 싸움이 이롭지 못하여 모두 성으로 들어가 굳게 지켰다. 제는 여러 군에 명하여 나가 공격하게 하고 또 여러 장수들에게 조칙을 내리기를, [고구려가 만일 항복한다면 곧 이를 받아들이고 공연히 군사를 놓아 성으로 들어가지 말라] 했다. 이 소식을 듣고 적들은 관군이 제 때에 나와 싸우지 못할 것을 알고 수비를 갖추어 놓고 다시 나와 싸워서, 이렇게 하기를 세 번을 했다. 그러나 이런 것을 제는 알지 못했다. 그래서 먹을 것도 다 되고 군사도 피로해지는데 더우기 군량이 운반되지 못해서 모든 군사가 모두 기운이 없어져 하는 수 없이 퇴군하고 말았다. 이번 길에는 오직 요수 서쪽에 적 무여라를 빼앗아서 요동군과 통정진을 그 곳에 두고 돌아왔을 뿐이다. 구년에 제는 다시 친히 군사를 이끌고 정벌하여 제군에 조칙을 내려 편의대로 일을 하도록 하니 제장들이 길을 나누어 성을 공격하여 적의 형세는 날로 쭈그러졌다. 이 때 마침 양현이 난을 일으키므로 제는 크게 두려워하여 즉일로 육군이 퇴군해 돌아왔다. 당시 병부시랑 곡사정이 도망해서 고구려로 갔기 때문에 고구려에서는 이 사실을 모두 알고 군사를 가다듬어 추격해 와서 관군이 많이 상했다. 십년에 또 천하의 모든 군사를 내어 쳤으나, 마침 도둑이 사방에서 일어나 제가 있는 곳이 길이 막힐 형편이어서 군사가 실기된 것이 많았다. 군사가 요수에 이르자 고구려도 역시 힘이 곤폐하여 사신을 보내서 항복하기를 빌고, 곡사정을 잡아 돌려 보내어 속죄했다. 이에 제는 이를 허락하고 그 항복을 받았다. 그리고 군사를 돌이켜 서울에 이르러 고구려의 사신을 데리고 제가 친히 태묘에 고하고 나서 그 사신을 그대로 머물러 두었다. 그리고 원을 불러 입조하라 했으나 원은 종시 오지 않았다. 제는 다시 군사를 일으키려 했으나, 마침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서 이 계호기은 드디어 이루어지지 못했다.(北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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