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지  |  모바일  |  이메일  |  블로그  | 교육연구소  |  온라인진단  |  인강사이트  |  평생교육원  | 웹하드자료실

 

고구려와 수의 전쟁

이듬해 원이 말갈기병 만여명을 거느리고 요서에 침입하였는데, 영주들이 총관 위충을 물리쳤다. 수나라 고조가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하여 한왕 양을 원수로 삼고 수군과 육군을 총동원하여 고구려를 치게 하는 한편, 조서를 내려 고구려왕의 작위를 빼앗았다. 그러나 이때 군량 수송이 중단되어 6군의 먹을 것이 거의 떨어지고, 군대가 임유관을 나오자 전염병마저 번져 수나라 군대는 기세를 떨치지 못하였다.

- 수서 동이열전, 고려 -

양제(煬帝)가 조를 내려 고구려 공격을 명하였는데, 그 병사의 수는 모두 113만 3,800인이었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

을지문덕의 오언시
신묘한 계책은 천문을 궁구하였고(神策究天文)
기묘한 계획은 지리를 통달하였구나(妙山窮地理)
싸움마다 이겨 공이 이미 높았으니(戰勝功旣高)
족한 줄 알면 그만둠이 어떠리(知足願云止)

- 삼국사기 열전, 을지문덕 -

대업(大業) 9년(613)에 양제가 다시 친정(親征)하였다. 이때는 제군에게 상황에 맞게 적절히 대응하라고 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길을 나누어 성을 공격하니 적의 군세가 날로 위축되었다. 그 무렵 양현감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보고가 이르자 양제는 크게 두려워 하여 그날로 6군을 이끌고 돌아왔다.

-수서 동이열전, 고려 -

자료 참조 : 유명한 수당전쟁에 관한 사료들입니다. 수의 양제와 문제를 한국사적 관점에서 볼 때, 이들은 이전과 다른 의도를 가지고 고구려에 접근하였습니다. 이전 남북조시대의 중국 분열 상황에서의 외교관계가 서로간의 현상유지나 다원적인 세력균형을 추구하였다면, 수당시기부터는 중국통일과 함께 제국주의적인 외교관계를 추구합니다. 즉, 중국의 통일왕조는 호한체제의 방어적이고 국수적인 자세를 버리고, 조공질서에 입각한 세계국가를 건설하여 중국적, 국제적, 귀족적인 사회로의 전환을 추구합니다.

대수전쟁은 이러한 중국의 체제 전환과 함께 대동강 유역의 무역권(동방무역권)이라는 이권과도 관계가 있었다고 하며, 중국 통일 후 내부 불만에 대한 체제 전환의 목적으로 이루어진 면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측면을 연구하기에는 아직 자료가 부족하며, 특히 중국 자체가 2000년 이후 고구려사를 왜곡하는 경향이 많아져서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는 모르겠습니다.

블로그 이미지

한국빅데이터교육협회

데이터분석 및 교육 전문기관

본 협회에서는 회원 외에는 댓글을 달 수 없습니다.

  • 꼭두각시 2010.07.12 17: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을 볼 수 있는 것은 나무가지의 흔들림으로 알 수 있다 합니다....사가들의 판단을 흐리게 하는 것은 무엇의 흔들림으로 알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문득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