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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와 당의 전쟁

(당태종)은 형부상서 장량(張亮)으로 평양도행군대총관(平壤道行軍大總管)을 삼아 강*회*영*협의 병사 4만을 거느리게 하고, 장안과 낙양에서 병사 3천을 모집하였으며, 전함 500척은 내주(萊州)에서 바다를 건너 평양으로 가게 하였다. 또 이세적(李世勣)으로 요동도행군대총관(遼東道行軍大總管)을 삼아 보병과 기병 6만과 난주와 하주의 군사를 거느리고 요동으로 가게 하니, 양군은 합세하여 유주(幽州)에 집결하였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

강하왕(江夏王) 도종(道宗)이 군사를 독려하여 안시성의 동남 구석에 토산(土山)을 쌓고 성을 압박하니 성 안에서도 성의 높이를 더하여 막았다. ... 도종은 주야로 쉬지 않고 60여일, 연인원 5만을 동원하여 토산 쌓기를 계속하여 성 안을 아래로 굽어보게 되었다. 도종이 부복애(傅伏愛)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산정(山頂)에 머무르며 지키게 하였는데 산이 무너져서 성을 눌러 무너뜨렸다. 마침 복애가 자리를 비웠는지라, 고구려군 수백인이 성의 무너진 곳으로부터 나와 드디어 토산을 점거하고 주위를 깎아 지켰다. 당주(唐主)는 노하여 복애를 참수하였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

당태종이 다시 고구려를 정벌하려 했으나, 조정에서 의논하기를 "고구려가 산에 의거에서 성을 만들어서 갑자기 함락시킬 수 없습니다. 앞서 황제가 친정하였을 때 그 나라 사람들은 농사지을 수가 없었고, 함락된 성들은 실제 그 곡식을 거두었으나 한재(旱災)가 이어서 태반의 고구려 백성은 식량이 모자랐다. 지금 만일 소부대를 자주 보내어 그 지방을 교대로 침탈해서 수년간 그들을 피곤하게 하고 쟁기를 놓고 보루에 들어가게 하여 천리가 쓸쓸하게 되면 인심이 저절로 떠나서 압록강 이북은 싸우지 않고도 취할 수 있습니다"라 하니, 이에 따랐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

자료 참조 : 대당전쟁에 대한 사료입니다. 중국측에서는 대당전쟁에 대하여 <고구려와 당과의 내전>이라는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이것을 달리 해석하면 고구려는 중국의 한 지방으로 중국역사이며, 고구려와 중국국가와의 끊임없는 싸움은 역사를 통털어 자국의 세력 다툼이었다는 것이지요. 중국의 역사 왜곡도 점차 일본만큼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빨리 우리 고대사가 선명하게 정리되었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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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꼭두각시 2010.07.13 16: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약자는 정의에 의존하고 강자는 폭력에 의존한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만, 무지한 우김으로 만백성의 총기를 흐리는 일은 잠깐의 속임수인 조커를 써서 역사적인 포커판을 이기는 일보다 더 심각한 우환을 자국에 뿌리는 일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