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학
국학(國學)을 설치하고 경(卿) 1인을 두었다. - 삼국사기 8권, 신라본기 8, 신문왕 2년 6월 - 국학(國學)은 예부(禮部)에 속한다. 신문왕(神文王) 2년에 설치하였다. … 교수하는 법은 주역(周易)·상서(尙書)·모시(毛詩)·예기(禮記)·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문선(文?BR> ?으로 나누어 학업을 닦게 하였는데, 박사(博士)나 조교(助敎) 1인이, 혹은 예기·주역·논어(論語)·효경(孝經)을 가르치고, 혹은 춘추좌전·모시·논어·효경을 가르치며, 혹은 상서·논어·효경·문선을 가르쳤다. … 혹은 산학박사(算學博士)나 조교 1인을 명해서 철경(綴經)·삼개(三開)·구장(九章)·육장(六章)을 교수케 하기도 한다. 모든 학생의 관등은 대사(大舍) 이하 무위(無位)에 이르기까지 하며, 나이는 15세에서 30세까지 모두 학업에 종사한다. 9년을 기한으로 하되, 만일 우둔하여 향상하지 못하는 자는 퇴학시키며, 만일 재주와 그릇됨이 성취할 만하되 미숙한 자는 비록 9년을 넘어도 재학하게 하여, 관등이 대나마(大奈麻)나 나마(奈麻)에 이른 다음에 내보낸다. - 삼국사기, 38권, 잡지 직관 상, 국학 - |
참고글 : 국학은 신문왕대 전제 왕권 강화와 관련됩니다. 국학의 설립 목적인 전제 왕권 성립기의 체재 재정비 차원에서 골품제의 모순을 운영상의 효율성을 통하여 극복하고, 타협점을 찾으려는 것이었습니다. 즉, 유교이념을 국왕이 표방함으로서 왕실의 권위를 향상하고, 중앙의 귀족을 도태시키면서 지방의 세력을 흡수하는 관제정비의 일환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6두품들이 왕을 보좌하는 세력으로서 일정 부분 성장하였다는 것도 중요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6두품들의 성장은 곧 골품제의 한계에 부딪히게 되면서 국학도 신라 하대에는 골품의 장벽을 넘지 못하고 점차 변질되어 갑니다.
국학에는 717년(성덕왕 16) 당으로부터 문선왕·십철·72제자의 화상)을 가져다 봉안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유교교육기관으로서의 체제를 완비하였는데, 경덕왕이 태학감으로 고쳤다가 혜공왕이 다시 국학으로 고쳤습니다. 고려시대에는 1275년(충렬왕 1) 국자감(國子監)을 국학으로 고쳤다가 후에 성균감(成均監)·성균관으로 고쳤고, 그러다가 조선시대에 와서 성균관으로 통일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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