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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풀이/역사 사료와 데이터

병자호란 때 청 태종이 인조에게 보낸 굴욕적인 편지 내용 청 태종이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 숨은 인조에게 보낸 편지 원문 1. 주요 내용 더보기
(한문 원전 사료)일본 고대의 율령 - 양로령 일본 고대의 율령 파일 : 이 글에 대한 참조사항 1. 이 글에 대한 관련 사료는 이 사이트 검색창에서 자유롭게 검색가능합니다.(관련 검색어로 검색하세요) 2. 이 글을 운영자 허락없이 불펌할 경우 티스토리에서 제공하는 가 펌글에 자동 삽입됩니다. 3. 링크가 걸린 원문 사료입니다. 이 자료는 역사 학습 이외의 목적으로 사용하지 마세요. 더보기
일본 풍토기 원문 사료 일본 풍토기 원문 사료 : 이 글에 대한 참조사항 1. 이 글에 대한 관련 사료는 이 사이트 검색창에서 자유롭게 검색가능합니다.(관련 검색어로 검색하세요) 2. 이 글을 운영자 허락없이 불펌할 경우 티스토리에서 제공하는 가 펌글에 자동 삽입됩니다. 3. 링크가 걸린 원문 사료입니다. 이 자료는 역사 학습 이외의 목적으로 사용하지 마세요. 더보기
(일본 대국사전문) 일본서기, 속일본기, 일본후기, 속일본후기, 문덕록, 삼대록 일본 6대 사서 원문 (일본 대국사전문) 일본서기, 속일본기, 일본후기, 속일본후기, 문덕록, 삼대록 일본 6대 사서 원문 첨부 파일 : 이 글에 대한 참조사항 1. 이 글에 대한 관련 사료는 이 사이트 검색창에서 자유롭게 검색가능합니다.(관련 검색어로 검색하세요) 2. 이 글을 운영자 허락없이 불펌할 경우 티스토리에서 제공하는 가 펌글에 자동 삽입됩니다. 3. 링크가 걸린 원문 사료입니다. 이 자료는 역사 학습 이외의 목적으로 사용하지 마세요. 더보기
(원문사료전문) 일본서기, 속일본기 - 한문사료 일본서기 전문 한문사료 : 속일본기 전문 한문사료 : 이 글에 대한 참조사항 1. 이 글에 대한 관련 사료는 이 사이트 검색창에서 자유롭게 검색가능합니다.(관련 검색어로 검색하세요) 2. 이 글을 운영자 허락없이 불펌할 경우 티스토리에서 제공하는 가 펌글에 자동 삽입됩니다. 3. 링크가 걸린 원문 사료입니다. 이 자료는 역사 학습 이외의 목적으로 사용하지 마세요. 더보기
신라시대 상대등과 시중은 그 위치가 바뀌곤 했었다? 신라시대 상대등과 시중은 그 위치가 바뀌곤 했었다? 1. 원래 상대등의 개념 상대등은 신라 법흥왕기에 출현하여 신라 말기까지 있었던 관직입니다. 상대등이란 신라의 진골귀족 관료(대등)들을 총괄할 수 있는 상위의 대등이란 뜻입니다. 즉, 원래 상대등이 등장한 배경은 귀족들의 대표로서 국왕권을 견재하고 국사를 총괄할 수 있는 높은 권한을 가진 직책입니다. 법흥왕대 상대등을 처음 만들 때에 상대등은 국왕과 귀족이 같이 정치를 한다는 연합적 성격의 관직이었습니다. 당시 국왕은 명령을 내릴 때도, 유력 부족과 공동하교로 명을 내렸고 국왕이 화백회의의 의결사항을 준수해야 했습니다. 국왕은 이념적으로는 초월적인 군주이나 현실적으로서 귀족의 대표 성격에 불과했던 것이지요. 법흥왕은 상대등을 설치함으로서 국왕권을 견재할.. 더보기
96각간의 난과 선덕왕의 즉위 사료 96각간의 난과 선덕왕의 즉위 사료 [혜공왕(惠恭王) 4년] 7월 3일에 대공(大恭) 각간(角干)의 적도(賊徒)가 일어나자 왕도(王都) 및 5도(道)·주군(州郡)의 도합 96각간들이 서로 싸우게 되어 크게 어지러워졌다. 대공 각간의 집이 망하매 그 집에 있던 보물과 비단 등 가재(家財)를 왕궁(王宮)으로 옮겼다. 신성(新城)의 장창(長倉)이 불에 탔으므로 역당(逆黨)의 보물과 곡식 중 사량리(沙梁里)·모량리(牟梁里) 등에 있던 것을 또한 왕궁으로 실어 날랐다. 난리는 석달이 지나서야 그쳤다. (《三國遺事》 2, 紀異 2, 惠恭王) [혜공왕 6년] 가을 8월에 대아찬(大阿瑗) 김융(金融)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복주(伏誅)되었다. …… 11년 여름 6월에 이찬(伊瑗) 김은거(金隱居)가 반란을 일으켰다가 복주되.. 더보기
혜공왕 대 귀족들의 반란으로 김유신계 귀족도 제거되다 혜공왕 대 귀족들의 반란으로 김유신계 귀족도 제거되다 37대 혜공왕 때, 대력 14년 기미 4월에 문득 회오리 바람이 김유신 공의 무덤에서 일어났다. 그 바람 속에 준마를 탄 한 사람은 장군의 모습과 같았으며, 갑옷을입고 모기를 든 사람 40여 명쯤이 뒤를 따라와서 죽현릉(미추왕릉)으로 들어갔다. 조금 뒤에 능 속에서 진동하며 우는 소리가 나는 듯하고 호소하는 듯한 소리도 들렸다. 말은 이러했다. [ 신은 평생에 난국을 구제하고 삼국을 통일한 공이 있었으며, 지금은 혼백이 되어서도 나라를 진호하여 재앙을 없애고, 환란을 구제하는 마음만은 변함이 없습니다. 지나간 경술년에 신의 자손이 아무론 죄도 없이 죽음을 당했으니, 이는 군신들이 저의 공열을 생각해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신은 다른 곳으로 멀리 옮.. 더보기
경덕왕 대에 안민가를 지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 경덕왕 대 안민가를 지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 1. 안민가의 내용 임금은 아버지요, 신하는 사랑하실 어머니요, 백성은 어리석은 아이라 하실지면 백성은 그 사랑을 알리라 꾸물거리며 사는 물생들 이를 다 먹여 다스린다 이 땅을 버리고 어디 가랴 할지면 나라 안이 유지됨을 아리이다 아아! 임금답게 신하답게 박성답게 할지면 나라 안이 태평하리라. 삼국유사 권 2 경덕왕 충담사 표훈대덕 ---------------------------------------- 사료해석 : 안민가를 경덕왕 대 지은 내용은 신라 사회가 점차 문란해졌기 때문입니다. 신라 중기 전제 왕권 확립 과정에서 신라의 강력한 왕인 신문왕, 성덕왕, 경덕왕 등의 전제적 성향의 왕들은 점차지지세력이었던 진골계 귀족들의 일부마저 내치기 시작합니다. 이것.. 더보기
김유신계 후손 진골들도 점차 정권에서 소외되었다. 김유신의 후손들도 정권에서 소외되기 시작하였다. 김유신의 적손 윤중은 성덕대왕에 벼슬하여 대아찬이 되고 여러번 은호를 입었는데, 왕의 친속들이 질투를 심하게 하였다. 때는 중추 보름날, 성덕왕이 월성 잠두에 올라 경치를 바라보면서 시종관들과 함께 주연을 베풀고 즐기면서 윤중을 부르라 하였다. 그 때 누군가 간하였다. [ 지금 종실과 척리들 가운데 어찌 좋은 사람이 없어 소원한 신하를 부르십니까? 또 어찌 친친(가까운 친척과 친해야 하는 예절)의 경우에 맞다 하겠습니까? ] 왕이 대답하였다. [지금 과인이 경들과 더불어 평안하게 지내는 것은 윤중 조부의 덕이다. 만을 공의 말고 같이 하여 잊어 버린다면, 선한 이에게 잘해주어 자손에게 미치게 하는 의리에 어긋나는 것이다] 삼국사기 권 42 열전 2 김유신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