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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풀이

신문왕 신문왕 신문왕 즉위년 8월 16일에 왕은 교서를 내리어 가로되, ‘공이 있는 자에게 상을 주는 것은 옛 성인에 좋은 규정이요, 죄 있는 자에게 벌을 주는 것은 선왕의 아름다운 법이다. 과인이 조그만 몸과 적은 덕을 가지고 큰 기업을 승수하여, 식사도 폐하면서 또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자면서 신하와 더불어 국가를 편안케 하려 노력하는데, 상중에 난이 서울에서 일어날 줄을 뉘 생각하였으랴? 적괴인 흠돌, 홍원 등은 그 벼슬이 재능으로 높아간 것도 사실상 왕의은혜로 올라간 것이지만, 시종을 삼가거나 부귀를 보전치 못하고 불인과 불의로 위복을 작하고 관료를 모만하고 상하를 속고 포악한 마음을 드러내어 흉사한 자를 불러들이고 근수와 교결하여 화가 내외에 통하고 같은 악인들이 서로 도와 기일을 약정한 후 반역을 행하.. 더보기
지증 대사 비문 지증 대사 비문 도의스님이 서방으로 건너가 서당지장으로부터 심인을 읽혀 처음 선법을 말하면서 원숭이처럼 조급한 마음에 사로잡혀 북쪽으로 치닫는 단점을 감싸주었지만, 메추라기가 제 날개를 자랑하며 붕새가 남쪽 바다로 떠나는 높은 뜻을 비난하듯 하였다. 그들은 인습적인 염불에 흠뻑 젖어 있어서 도의스님의 말을 마귀의 말이라고 비웃었다. 이에 스님은 진리의 및을 행랑채 아래에 거두고 항아리 속에 감추며, 동해의 동쪽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북산의 북쪽에 은둔하였다. 그러나 겨울 산봉우리에 빼어나고 정림에서도 꽃다우매 그 덕을 사모하여 모여드는 사람이 산에 가득하고, 매로 변화하듯 뛰어난 인물이되어 깊은 골짜기로부터 나오게 되었다. 더보기
나말 혼란과 호족의 봉기 나말 혼란과 호족의 봉기 (1) 백성들이 조세를 바치지 않았으므로 창고가 비고 말라서 국가의 재정이 궁핍했다. 이에 왕이 사자를 보내 독촉하니 이로 인해 사방에서 도둑이 봉기하였는 바, 원종, 애노 등이 상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진성여왕 (2) 왕 l3년 봄에 백성들은 굶주림을 이기지 못하여 자손들을 팔아서 생활하였다. 헌덕왕 (3) 신라가 말년에 쇠약해져서 정치가 어지럽고 백성들이 흩어지며, 주현이 배반하고 귀부하는 자가 서로 반씩이 되는 한편, 도적들이 벌떼같이 일어나고 개미처럼 꼬여 들었다. 궁예 (4) 진성왕 6년에, 아첨하는 소인들이 왕의 곁에 있어 정권을 농간하매 기강은 문란해지고, 기근까지 곁들여 백성들이 유망하고 도적들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이에 견훤은 은근히 반역의 마음을 품고 무리를 .. 더보기
의상 대사 관련 사료 의상 대사 관련 사료 법사 의상의 아버지는 한신이라 했으며, 성은 김씨다. 나이29세에 서울 경주 황복사에서 머리를 깎아 중이 되었다. 얼마 후 중국으로 가서 부처의 교화를 보려 하여 마침내 원효와 함께 요동으로 갔다가, 변방 순라군의 정탐자에게 잡혀 수 십일간 잡혀있다가 간신히 빠져나왔다. 영휘 초년에, 당나라의 귀국선을 얻어타고 중국으로 갔다. 처음에 양주에 머물는데, 주장 유지인이 의상을 청해다가 그 관아 안에 머무르게 하면서 접대를 후하게 해주었다. 후에 종남산 지상사를 찾아가서 지엄을 뵈었다. 지엄은 지난 밤 꿈에 큰나무가 조선에서 나서 잎이 널리 퍼져 중국으로 와서 덮는데, 그 위에 봉황새의 보금자리가 있었으므로 올라가 보니 한 개의 마니보주가 있었으며 광명이 멀리 비치는 것이었다. 꿈을 깬 .. 더보기
원효 대사 원효 대사 원효는 언제나 술에 취한 채 방방곡곡 촌락을 누비며 노래를 부르고 춤추고 다니며 불도를 전하였다. 이 때문에 뽕 따는 늙은이에서부터 무뢰배에 이르기까지 부처님의 명호를 외우고, 나무아미타불이라는 합장의 미덕을 알았으니, 원효의 교화가 참으로 컸다 하겠다. 원효 왕이 백좌인왕경 대회를 설치하고 두루 덕이 높은 승려들을 찾았다. 마을 사람들이 명망이 높은 원효를 천거하였으나, 여러 승려들이 그를 미워하여 왕에게 나쁘게 말하니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원효가 금강삼매경론의 소(불경의 주석)를 강론하는 날 왕과 신하, 승려 등 많은 사람이 법당으로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원효가 큰 소리로 “옛날 서까래 백 개를 구할 때는 비록 참가하지 못하였으나, 오늘 대들보를 눕히는 데는 나 혼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 더보기
불교 대중화 - 욱면비 염불서승 불교 대중화 - 욱면비 염불서승 남의 집에서 종 노릇을 하는 욱면은 주인을 따라 절에 가서 염블을 하고자 하였다. 주인은 그녀가 종 노릇만을 제대로 하지 않는 것에 배알이 틀려 매일 곡식 두 섬을 주고서 하루 저녁에 다 찧으라고 하였다. 욱면은 그래도 초저녁에 일을 마치고 절에 가서 염블을 하였다. 그녀는 스스로 뜰에 말뚝을 박고 두 손 바닥을 노끈으로 꿰어 좌우로 흔들면서 블공을 드렸다. 그렇게 하기를 9년이 지 난 후 하늘에서 커다란 소리가 들리더니 욱면은 들보를 뚫고 나가며 해골이 부서졌고, 몸은 부처로 변하여 연화대에 앉아 큰 광명을 발하며 천천히 사라졌다. 권6 감통 제7 욱면비 염불서승 더보기
원광이 걸사표를 지은 목적 사료 원광이 걸사표를 지은 목적 사료 진평왕 30년(608) 왕은 고구려가 여러 번 국경을 침범함을 걱정하여 수나라 군사를 청하여 고구려를 치려고, 원광에게 명하여 군사를 청하는 글을 지으라 했다. 원광은 말했다. “자기가 살기를 구해서 남을 멸망시키는 것은 사문이 할 일이 아니나, 빈도는 대왕의 땅에 살면서 대왕의 물과 풀을 먹고 있사오니 감히 명령을 따르지 않겠씁니까.” 이에 지어 올렸다. 권4 신라본기4 진평왕30년 더보기
흥덕왕의 사치 금지 흥덕왕의 사치 금지 (흥덕왕 즉위 9년에 명을 내리기를) 사람에는 상하가 있고 벼술에는 높고 낮은 것이 있어 명칭과 법식이 같지 않고 의복 또한 다른 것이다. 그런데 풍속이 점차 각박해지고 백성들은 다투어 사치를 일삼고 있다. 오직 다른 나라 물건의 진귀함만을 숭상하고 토산물이 촌스럽고 천하다고 싫어하니 예절이 떨어지고 풍속이 파괴되고 있다. 이에 옛 법에 따라 엄명을 내리는 것이니, 만약 어기는 자가 있으면 국법에 따라 처벌할 것이다. 더보기
진정법사 진정법사 진정법사는 신라 사람으로 출가하기 전 졸오(병정)에 소속되어 있었다. 집이 가난하여 장가도 들지모샇고 부역에 동원되었는데, 역을 지고 남는 시간에 날품팔이를 하여 홀어머니를 공양하였다. 집에 있는 재산이라고는 한쪽 다리가 부서진 솥 뿐이었다. 하루는 어떤 스님이 문 앞에 와서 절을 짓는데 필요한 것을 구하자 그 어머니는 이 솥을 시주하였다. 더보기
골품제도의 한계와 6두품 골품제도의 한계와 6두품 설계두는 신라 사대부집 자손이다. 친구와 함께 술을 마시며 말하기를, “신라에서는 사람을 쓰는 데 먼저 골품을 따지므로 정말 그 족속이 아니면 비록 큰 재주와 뛰어난 공이 있더라도 그 한계를 넘지 못한다. 내가 원하는 바는 멀리 중국에 가서 세상에 없는 지략을 발휘하고 비상한 공을 세워 스스로 영화의 길을 열었으면 족하다.” 하고 무덕 1(618)년에 배를 타고 당으로 갔다. 설계두 성주산파 (선종 9산의 하나)를 처음 연 낭혜(무염)는 속성이 김씨로 무열왕이 8대조이다. 조부 주천은 품이 진골이고 위가 대아찬이었으며, 고조와 중조가 모두 장수와 재상을 지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안다. 그러나 아버지 범청은 진골에서 강등되어 득난이 되었다. 그 관직을 세울 때 (왕의) 친족을 상위..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