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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풀이/역사 사료와 데이터

중국사에 나오는 한국사 자료들 - 수서 북적전 거란

중국사에 나오는 한국사 자료들 - 수서 북적전 거란

  글안의 조상은 고막해와 종족은 다르나 유는 같다. 모두 모용씨에게 망해서 함께 나무 사이에 숨었다가 그 뒤에 차츰 커져서 황룡 북쪽 수백 리 되는 곳에 산다.

  그들의 풍속은 대개 말갈과 비슷하다. 도둑질을 좋아하고, 부모가 죽어서 슬피 우는 자는 씩씩하지 못하다고 한다. 다만 그 시체를 산 꼭대기 나무 위에 놓아 두고 삼년을 지난 뒤에 비로소 그 뼈를 거두어다가 불 태워 버린다. 이 때 술을 땅에 부으면서 빌기를, [겨울날에 때로 따뜻한 곳을 향해 만일 내가 사냥을 하게 되거든 나로 하여금 돼지와 사슴을 많이 잡게 해주시옵소서] 한다.

  그들은 무례하고 사납고 시끄럽기가 모든 오랑캐들 중에서 가장 심하다.

  후위 때를 당하여 그들은 고려에게 침략을 당해서 부락의 인구 만여 명이 중국에 붙이기를 원하여 백비하까지 나왔었다. 그 뒤에는 다시 돌궐에게 침입당해서 또 인가 만 호를 고려에 붙이기도 했다.

  개황 사년에 여러 막하불을 거느리고 와서 뵈었고, 오년에 그 무리들이 모두 와서 항복하므로 고조는 이를 받아들이고 그들의 옛 땅에 살게 했다. 육년에는 그들의 여러 부가 서로 공격해서 오랫동안 그치지 않고, 또 돌궐과 서로 침입하므로 고조는 사신을 보내서 이를 책망했더니 그 나라에서도 사신을 보내 대궐에 들어와서 이마를 조아서 사죄했다.

  그 뒤에 글안의 별부인 출복 등이 고려를 등지고 여러 무리를 거느리고 와서 붙이기를 청해서 고조는 또 이를 받아들여 갈해나힐의 북쪽에 편안히 있도록 했다.

  개황 말년에 그 별부 사천여 호가 돌궐을 배반하고 와서 항복하니 제는 바야흐로 돌궐과 좋게 화친해서 먼 곳 사람들의 마음을 잃지 않으려고 하던 참이라, 그들에게 모두 곡식을 주어서 제자리로 돌아가도록 하고, 한편 돌궐에 조서를 내려 이들을 무마해서 받아들이라 했다. 그러나 이들이 굳이 고집하고 가지 않아서 부락이 점점 많아지더니 드디어 북쪼긍로 옮겨 가서 물이 있고 풀이 있어 목축할 만한 곳을 따라다니다가 요서의 정북지방 이백 리 되는 곳에 다다라 홀신수에 의지하고 살았다.

  이 지방은 동쪽과 서쪽이 길이가 오백 리가 되고, 남쪽과 북쪽은 삼백 리가 되는데 모두 십부로 나누었다. 이 중에 군사가 많은 부는 삼천 명도 되고 적은 곳은 천여 명이나 되는데, 춥고 더운 곳을 쫓고 또 물이 있고 풀이 무성한 곳을 따라서 목축을 했다.

  전쟁이 있을 때면 추수끼리 서로 의논하고 군사를 일으키든지 무리를 움직일 때는 부계를 쓴다. 뒤에 돌궐의 사발략가한이 토둔반질을 보내 통솔했으니 즉 글안의 유이다. 그 남쪽에 있는 것이 글안이요, 북쪽에 있는 것은 이름이 실위이다.

  이들은 모두 다섯 부로 나누어서 서로 통일이 되지 않는데, 이것은 소위 남실위, 북실위, 발실위, 심말달실위, 태실위 등이다. 이들은 모두 따로 군장이 없고, 인민들이 빈약해서 돌궐이 항상 삼토둔을 두어 다스렸다.

  남실위는 글안 북쪽 삼천 리 되는 곳에 있는데 토지가 낮고 습해서 여름이 되면 서북쪽으로 옮겨가서 살아야 한다. 대발, 흠대의 두 산이 있는데, 여기에는 풀과 나무가 많고 새와 짐승이 날래며, 또 모기와 하루살이 등이 많아서 사람들은 모두 나무 위에 새집처럼 짓고 살아 이것을 피한다. 이것이 점점 나누어져서 이십오부가 되었꼬, 한 부마다 여막불만줄이라는 것이 있었으니 이것은 추장과 마찬가지이다. 그가 죽으면 그 아들이나 아우가 대를 이어 서고, 만일 대가 끊어지면 어질고 호기 있는 자를 뽑아서 세운다.

  그들의 풍속은 남자는 모두 머리를 풀어뜨리고 여자는 머리를 땋는다. 옷 입는 것은 글안과 같다. 소가 끄는 수레를 타고 댓자리로 지붕과 벽을 가리는데, 이것은 마치 돌구렁 ㅣ수레에 담요를 덮는 것과 같다.

  물을 건너는 데는 나무를 엮어 떼를 만들고, 혹은 나무 가죽으로 배를 만드는 자도 있다. 말은 풀을 베어다가 짜서 안장을 만들고, 노끈을 꼬아 고삐를 만든다. 잘 때는 꾸부리고 집안에서 자는데, 댓자리로 위를 덮었다가 옮겨갈 때는 이것을 싣고 간다. 돼지 가죽으로 방석을 만들고 나무를 엮어 자리를 만드는데, 여자들은 모두 무릎을 껴안고 앉는다.

  날씨가 몹시 춥고 땅이 매우 토박하다. 양은 없고 말은 적은 대신 돼지와 소는 많다. 술을 빚어 마실 줄 아는 것은 말갈과 같다.

  그들의 풍속에 혼인하는 법은 두 집이 서로 승낙을 하면 남편될 사람이 아내를 도둑질해 가는 시늉을 한 뒤에 소나 말을 보내서 맞아 간다. 그러나 이렇게 한 뒤에 다시 그 집으로 돌아갔다가 태기가 있기를 기다려서 같이 남편의 집으로 간다. 남편이 죽어도 여자는 다시 시집 가지 않고 끝내 죽은 사람의 아내가 된다.

  부락에서는 다 함께 큰 목책을 만들어 두었다가 사람이 죽으면 시체를 그 위에 두어 두고 삼년동안 거상을 입는데 일년 동안에 네 번만 곡을 한다.

  그 나라에는 쇠가 없어서 쇠는 고려에서 갖다가 쓴다. 그 대신 초피는 많이 난다.

  남실위에서 북쪽으로 십이일 동안을 가면 북실위에 이른다. 이 곳은 모두 아홉 부락으로 나뉘었는데, 토흘산을 둘러싸고 산다. 그 부락에서는 우두머리를 걸인막하줄이라고 부르고, 부마다 막하불 세 사람씩이 있어서 우두머리를 돕는다.

  기후는 몹시 춥고 눈이 많이 내려 말이 빠질 지경이다. 겨울이면 산으로 들어가 토굴 속에서 사는데, 그래도 소와 말이 많이 얼어 죽는다. 사슴이 많아서 이것을 사냥하는 것으로 일을 삼아 그 고기를 먹고 그 가죽을 옷으로 입는다. 얼음을 깨치고 물 속에 들어가 그물을 가지고 물고기를 잡기도 한다. 땅에는 눈이 많이 쌓여서 함정에 빠질까 두려우므로 나무를 타고 다닌다.

  또 그들의 풍속은 담비를 잡는 것으로 업을 삼는다. 관은 담비털로 만들고 옷은 물고기 가죽으로 만들기도 한다.

  여기에서 또 북쪽으로 천 리를 가면 발실위에 이르는데, 이곳 사람들은 호포산에 의지해서 살고 사람이 몹시 많다. 발실위는 몇 부락이 있는지 알지 못한다. 벚나무 껍질로 지붕을 덮고, 그 나머지는 북실위와 대략 같다.

  발실위에서 서남쪽으로 사일 동안을 가면 심말달실위에 이르는데, 이것은 물 이름을 따서 지은 이름이다. 이들은 겨울이 되면 굴을 파고 들어가 살아 태음의 기운을 피한다.

  여기에서 또 서북쪽으로 수천 리를 가면 태실위에 이르는데, 이곳은 길이 몹시 험하고 말이 서로 통하지 않는다. 여기에서는 담비와 푸른 쥐가 많다. 북실위에서는 때때로 사신을 보내서 물건을 바쳤으나, 그 나머지 딴 곳에서는 사신이 온 곳이 없다.(隋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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