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수업자료제공/초중고수업자료

최충헌과 최충수 형제의 긴박한 권력다툼 고려 제 19대 임금이었던 명종은 무신 정중부의 난으로 즉위하게 되었으나 의지가 약하고 성격이 소심하여 재위기간 동안 왕으로서의 위엄을 세우지 못하고 언제나 신하들에게 이끌려 다니기만 하는 허수아비 왕에 불과했다. 당시 고려는 바야흐로 무신 정권 시대로 접어들고 있었기 때문에 문신보다는 무신들이 나라의 정사를 좌지우지했다. 무력한 임금은 권력을 잡고 있는 무신들의 눈치를 살피느라 제대로 말 한 마디 하지 못했고 무신들은 힘없는 임금과 조정을 농락하며 자신들의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이의민의 횡포는 상상을 초월했다. 그러던 중 녹사 벼슬에 있던 최충수와 이의민의 아들 이지영이 사소한 일로 싸움을 벌였다. 최충수의 비둘기가 이지영의 집으로 날아간 것을 빌미로 싸우게 되었는데 최충수가 이지영에게 모욕을 당한 .. 더보기
궁예를 통한 교훈 궁예를 통한 교훈 궁예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우리는 흔히 패주 혹은 혹세무민의 무능한 군주 혹은 광기의 왕, 미친 종교 지도자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대부분 궁예에 대한 기록은 삼국 유사와 삼국사기의 기록을 인용하기 때문이다. 그 외 다른 기록은 없기에 궁예에 대한 우리의 선입관은 고정 되어있는 것이다. 이것이 진실일까? 역사가라면 언제나 문제제기를 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 부분에 대한 문제제기를 해 왔다. 필자 역시 궁예의 실권에 대한 이유를 다른 시각에서 보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기록에 대한 의심으로부터 접근하려고 한다. 그러다보니 먼저 제시되는 문제가 위 두 저서의 신뢰성이다. 새 나라가 세워지면 역사편찬 작업을 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매우 보편적인 현상이다. 그리고 그 편찬에 있어 패.. 더보기
모택동의 잘못된 선택 모택동의 잘못된 선택 개국지공 開國之功 치국지범 治國之凡 문화득죄 文化得罪 공산주의를 향한 비뚤어진 이상이 빚어낸 세기의 범죄는 바로 대약진운동과 문화혁명이다. 현대 중국을 이루어 냈다는 등소평 역시 천안문사태라는 오점을 남겼지만 모택동의 약진운동과 문화혁명의 엄청난 혈난에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대약진 운동운 약 3000만 이상의 아사자(餓死者)를 남겼고 문화 대혁명은 그에 못지않은 지식인들에 대한 혈풍을 일으켰다. 특히 문화 대혁명은 진시황의 분서갱유(焚書坑儒)나 청조(淸朝)의 문자의 옥과 비견할 만한 지식인에 대한 탄압이었다. 물론 그는 중화 인민공화국의 영웅이었다. 국민당에 의해 거의 몰살의 단계까지 이르렀던 공산당을 이끌고 대 장정의 투쟁을 거쳐 제 2차 국공합작을 이루었고 더 나아가 공산당의.. 더보기
역사의 보편성의 주체는 인간의 행복에 있다 모든 역사에는 보편성과 특수성이 있다. 이것은 굳이 역사에 국한한 것이 아니다. 모든 사회에 해당하는 표현일 것이다. 그것을 바라보는 시기와 관점에 따라 현시점을 주목하면 사회가 될 것이고, 과거로부터 지금까지의 관점으로 보면 역사라고 표현할 수 있다. 역사는 인류가 살아온 모든 것의 상호작용의 결과다. 때문에 이 역사 속에는 인류로써 갖고 있을 수 있는 보편성이 있고 서로 다른 환경에서 그 환경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오는 특수성이 있을 수 있다. 이 특수성 역시 인류의 보편성이 있기에 가능한 보편적 성격으로 파악할 수 있겠다. 이 사실은 매우 고무적인 것이다. 인류가 살아오는 삶에 있어 어떤 공식이 있다는 말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인류가 발전하고 살아오는 보편적 공식 그것은 바로 무엇인가를 추구 한.. 더보기
수능 근현대사 정리 17 : 민주주의의 발전 2 / 장면 내각과 5.16 군사정변 2) 장면 내각과 5.16 군사정변 4. 19 혁명 이후 허정의 과도 정부는 독재 정권의 등장을 막기 위해 대통령의 권한을 약화시키고, 의회의 역할을 증대하는 내용이 담긴 개헌을 행하였다(1960. 6. 내각 책임제, 양원제兩院制 의회 개헌). 개헌 이후에는 과거 자유당을 견제하였던 야당인 민주당이 내각의 주역이 되었으며, 총리는 장면, 대통령에는 윤보선이 당선되었다. 장면 내각은 이승만 시절부터 꾸준히 지적되어오던 민생고 문제를 없애기 위해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였으나, 결국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과거 독재정권이었던 이승만 시절과 달리, 장면 시절에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 많은 내용들이 논의되었는데, 학원 민주화, 노동운동, 통일에 대한 활발한 논의.. 더보기
요즘 들어 문뜩 떠오르는 은영전의 글귀들ㅡ "국가라는 것은 인간에게 단순한 도구에 지나지 않아." - 양 웬리 "건국이념과 시민을 지킬 수 없다면 국가 자체의 생존이유 따위는 없어." "민주공화제는 민중이 자유의지로 자기 자신의 제도와 정신을 팔아치우는 정치 체제를 말하는 것인가?" -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 "제가 싫어하는 부류는 자기만 안전한 장소에 숨어서 전쟁을 찬미하고 애국심을 강조하면서 다른 사람을 전쟁터로 떠밀고 후방에서 안락한 생활을 보내는 무리입니다. 그런 무리와 같은 깃발 아래에 있다는 것은 참기 어려운 고통입니다." - 양 웬리 인간의 정신 가운데 가장 귀중한 것 - 권력과 폭력에 저항하여 자유와 해방을 희구하는 정신이 길러지려면 강자의 억압이 불가결한 요건인 것일까. 자유에게 가장 좋은 환경은 자유 그 자체를 타락시킬 뿐일까... 더보기
몽골의 약사略史 1. 몽골의 역사 몽골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 칭기스 칸이 등장하기 이전인 12세기 무렵의 내륙아시아 지역과 그 인근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여러 나라들의 관계를 통해 시대상을 고려해야하지만, 개설적인 내용으로 몽골지역에 있었던 역사에 대해서만 서술하도록 한다. 몽골 역사를 연구하기 위해 가장 많이 사용되는 『몽골비사』에서는 몽골인들의 조상, 잿빛 푸른 이리 '부르테 치노'와 아름다운 하얀 암사슴 '코아이 마랄'로부터 그들의 조상이 태어났다고 한다. 간혹 칭기스 칸의 용맹스러움을 빗대어 표현할 때 ‘잿빛 푸른 이리’라고 하는데, 이는 그들의 용맹한 부족의 선조인 부르테 치노를 비유하는 것이다. 칭기스 칸이 몽골을 통일하기 전에는 몽골 부部, 타타르 부部. 나이만 부部, 메르키트 부部, 케레이트 부部 등이 통.. 더보기
수능 세계사 정리 16 : 유럽사 7 / 크리스트교의 전개1(로마제국~프랑크 왕국) 크리스트교의 전개 ① 로마시대의 크리스트교 크리스트교는 유대교의 유일신 사상과 조로아스터교의 천당, 지옥, 최후의 심판, 영생 등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다. 예수는 믿음과 사랑을 기반으로 하여 제자들과 함께 선교활동을 하였으나, 로마는 황제 숭배를 거부한다고 하여 예수와 제자들, 그리고 신자들을 박해하였다. 그래서 크리스트교가 공인되기 이전에 많은 신자들은 카타콤과 같은 지하묘지에 몰래 모여 예배를 드리고, 여러 사도들의 편지를 보면서 교리를 공부하였다. 크리스트교가 만들어지고 300년이 지났을 무렵,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전선(戰線)의 하늘에 새겨진 붉은 십자가를 보고 역전 승리를 거두었다고 한다. 그는 하늘에 크리스트교로 개종할 것을 약속했으며, 그 약속은 곧 크리스트교를 공인하는 밀라노 칙령(313.. 더보기
수능 근현대사 정리 16 : 민주주의의 발전 1 / 이승만의 독재와 4.19 35. 민주주의의 발전 앞서 살펴보았듯이, 광복 이전에 건국을 준비해오던 단체들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건국의 강령으로써 내세웠다. 자유와 민주주의는 그 당시 모든 사람들이 꿈꿔오던 단 한 가지 목표였으며, 각종 파벌과 이념으로 갈라져있던 독립운동세력을 아우르는 하나의 매개체였다. 하지만 광복 이후에도 그들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름뿐인 자유와 민주, 자신의 부정부패를 합법적인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의원들과 대통령들― 일제강점기를 억압을 벗어나 순탄할 것만 같았던 우리나라 현대사는 또다시 민주화를 부르짖으며 격동에 휩싸인다. 1) 이승만의 독재와 4.19 이승만 ‘박사’는 과거 임시정부의 대통령직을 맡았던 인물로, ‘이름난’ 독립운동의 ‘거목’이었다. 이승만은 주로 하와이나 미국 등지에서 활동하였으며,.. 더보기
수능 근현대사 정리 15 : 6.25 전쟁 34. 6.25 전쟁 사실 6.25 전쟁은 그동안 수능에서 크게 다루어지는 주제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전에 수능을 출제했던 정권과는 정치적 성향이 다른 정권이 들어서고, 또한 총체적으로 근현대사를 한번 짚고 넘어가자는 나의 의도와 완성도를 높여보자는 생각으로 6.25를 간략하게 서술하기로 한다. 남북한에 각각 정권에 들어서고,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이승만은 반공을 내세우면서 북진통일(北進統一)을 주장하였다. 남한과 북한의 군대는 그 규모가 크지 않았으나 38선에서 종종 무력적인 충돌이 있었다. 1949년 무렵에는 남북한에 각각 주둔해 있었던 미국과 소련이 물러났다. 더욱이 미국은 1950년 애치슨 선언을 통해 남한을 미국의 방어지역에서 제외하면서 한반도의 긴장은 더욱 고조되었다. 사료. 애치슨 선언 미..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