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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풀이/역사 사료와 데이터

사다함 이야기 사다함 이야기 사다함은 진골 출신으로 냇물왕 7대선이고, 아버지는 구리지 급찬이다. 높은 가문의 귀한 자손으로 풍채가 빼어나고 지기가 반듯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사다함을 화랑으로 받들기를 청하므로 부득이 맡아 무리가 무려 천여인에 이르렀는데, 이들 모두의 환심을 얻었다. 진흥왕이 이찬 이사부에게 명하여 가라국을 습격하게 하였다. 이 때 사다함 나이가 열대여섯이었는데, 싸움터에 나가기를 청하였다. 왕이 어리다 하여 허락하지 아니하였더니, 청하기를 열심히 하고 뜻이 굳세었으므로 귀당비장(부장급 장군)으로 삼았는데, 따르는 낭도가 많았다. 진흥왕 23년(562) 9월 가야가 반란을 일으키니 왕이 이사부에게 명하여 치게 하였는데, 사다함이 도왔다. 사다함이 기병 5천을 거느리고 먼저 전단문으로 달려들어가 백기를.. 더보기
원광의 세속오계 원광의 세속오계 원광법사가 수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가실사에 머물었는데, 그 때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이 때 귀산과 추항은 원광법사를 찾아가 라고 하였다. 원광법사가 말하였다. 고 하였다. - 삼국사기 권 45, 열전 5, 귀산 - 참조글 : 화랑도가 성립하였을 때, 화랑도에는 유불선이 섞여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료입니다. 원광의 세속오계는 법사의 가르침임에도 불교의 계율은 거의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시 지도적 위치의 승려가 세속오계의 가르침을 내렸다는 것은 즉, 불교적 가치관이 화랑도의 이념으로 흡수되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즉, 보편적 가치관인 충성, 효도, 우정 등은 유교적인 가치관이지만, 불교의 이념이 들어가 있고, 자연을 벗삼는다는 도가적 분위기를 통하여 화랑도의 성격을 파.. 더보기
화랑도의 기원 - 원화, 용화향도 화랑도의 기원 진흥왕은 천성이 풍미하여 신선을 숭상하고, 민가의 아름다운 처녀를 가려서 원화로 삼았다. 원하는 무리를 모아 그 중에서 인물을 뽑고 효제와 충신을 가르치기 위한 것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요체였다. 이에 남모와 교정 낭자를 원화로 뽑으니, 모여든 무리가 300-400 명이나 되었다. 교정은 남모를 질투한 나머지 술자리를 베풀어 남모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 한 후에 몰래 북천으로 메고 가서 돌을 매달아 빠뜨려 죽였다. 무리는 남모가 간 곳을 알지 못해 슬피 울면서 헤어졌다. 이로 인하여 준정은 사형에 처해지고 무리는 흩어지게 되었다. 그러자 왕은 영을 내려 원화를 폐지하였다. 그 뒤 여러 해만에 왕은 국가를 흥하게 하려면 반드시 풍월도를 일으켜야 한다고 생각하여, 양가의 덕행 있는 사내를 뽑아 .. 더보기
신라의 식읍, 녹읍 신라의 식읍과 늑읍 좌사록관은 문무왕 17년에 두었다. 우사록관은 문무왕 21년에 두었다. - 삼국사기 4권 38, 잡지 7, 직관 상 - 교령을 내려 내외관의 녹읍을 없애고 해마다 조를 차등있게 하사하는 것을 항식으로 삼도록 하였다. - 삼국사기 권 8, 신라본기 8, 신문왕 9월 정월 - 내외 군관의 월봉을 없애고 녹읍을 다시 지급하였다. -삼국사기 권 9 신라본기 9, 경덕왕 16년 3월 - 무열왕 4년(657년) 태종대왕이 김인문을 압독주(경산 지역)총관으로 제수하였는데, 이에 장산성을 쌓아 요새로 만드니, 태종이 그 공을 기록하고 식읍 300호를 주었다. - 삼국사기 권 44 열전 4, 김인문 - 문무왕 8년(668) 문무대왕은 인문의 영특한 계략과 용맹한 공로가 특이하다 하여 죽은 대탁각간 박.. 더보기
진흥왕의 영토 확장 진흥왕의 영토확장 진흥왕 11년(550) 정월에 백제가 고구려 도살성을 쳐서 빼앗고, 3월에는 고구려가 백제 금현성을 무너뜨리니, 왕은 두 나라 군사가 피로한 틈을 타서 이찬 이사부로 하여금 군사를 내어 이들을 치게 하여 두 성을 빼앗아 성을 더 쌓고 무사 1000을 머물러 지키게 하였다. 17년(556) 7월에 비열홀주(안변 지역)를 두고 사찬 성종을 군주로 삼았다. 23년(562) 9월 가야가 반란을 일으키니 왕이 이사부에게 명하여 치게 하였는데, 사다함이 도왔다. 사다함이 기병 5천을 거느리고 먼저 전단문으로 달려들어가 백기를 세우니, 성안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는지라 이사부가 군사를 이끌고 임하니 바로 항복하였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 3 - 사라(신라)에 사방에서 영토를 의탁.. 더보기
나제 동맹의 결렬 나제 동맹의 결렬 신라는 명왕(백제 성왕)이 친히 왔다는 것을 듣고 나라안 병사를 모두 징발하여 길을 막고 쳐서 깨뜨렸다. 이 때 신라는 좌지촌 사마노 고도에게 일러 말하기를, 라고 하였다. 얼마 뒤 고도가 명왕을 사로 잡아 두 번 절하며 말하기를 라고 하니, 명왕이 대답하기를, 라고 하였다. 고도가 말하기를 라고 하였다. 명왕이 하늘을 우러러 크게 탄식하고 눈물 흘리며 허락하여 말하기를, 라고 하면서 머리를 내밀어 목을 베도록 하였다. 고도는 목을 베어 죽이고 구덩이를 파서 묻었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 3 - 더보기
소지 마립간 시대 소지 마립간 시대 조지 마립간 7년(485 ; 소지왕) 2월에 구벌성을 쌓았다. 8년 정월에 일선 경계의 장정 3천명을 징발하여 삼년, 굴산 2성을 고쳐서 쌓았다. 조지 마립간 15년(483) 3월에 백제왕 모대(동성왕)가 사신을 보내 혼인을 청하매 왕은 이벌찬 비지의 딸을 보냈다. 16년 7월에 실죽 등이 살수의 들에서 고구려와 싸워 이기지 못하고 물러와 견아성을 지키매 고구려병이 이를 포위하였는데, 백제왕 모대가 군사 3천을 보내 신라군을 도와 고구려병이 포위를 풀게 하였다. 17년 8월에 고구려가 백제 치양성을 포위하여 백제가 구원을 청하자 왕이 장군 덕지에게 명하여 군사를 이끌고 가서 구원하게 하니, 고구려 군대가 무너져 달아났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 3 - 더보기
자비 마립간 시대 자비 마립간 시대 자비 마립간 11년(468) 봄에 고구려가 말갈과 함께 북쪽 경계 실직성에 침입하였다. 9월에 하슬라인 15세 이상을 징발하여 니하(강릉 오십천)에 성을 쌓았다. 13년에 삼년산성(보은 오정산성)을 쌓았다. 14년(471) 2월에 모로성을 쌓았다. 17년에 일모, 사시, 광석, 답달, 구례, 좌라 등의 성을 쌓았다. 17년 7월에 고구려왕 거련(장수왕)이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를 치니 백제왕 경(개로왕)이 아들 문주를 보내 도움을 구하므로 왕이 군사를 내어 도왔다. 그런데, 미처 그곳에 이르지 못하여 백제는 이미 함락되고 경도 또한 해를 입었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 3 - 더보기
눌지 마립간 시대 눌지 마립간 시대 눌지 마립간 34년(450) 7월에 고구려의 변경 장수가 실직의 들에 와서 사냥하니, 성주 삼직이 군사를 내어 습격하여 죽였다. 고구려왕이 이를 듣고 노하여 사신을 보내 말하기를, 라고 말하고, 이에 군사를 일으켜 우리 서쪽 경계를 침입하였다. 왕이 공손히 하여 사과하니 고구려인이 곧 물러갔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 3 - 더보기
신라 내물 마립간기의 발전 마립간 시대의 발전 내물이사금 26년(381)에 위두를 부진에 보내 특산물을 전하였다. 부견이 위두에게 라고 물었다. 대답하기를 라고 말하였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 - 내물 이사금 37년 (392) 정월에 고구려에서 사신을 보내오니 왕은 고구려가 강성한 까닭으로 이찬 대서지의 아들 실성을 보내 볼모로 삼았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 - 부견과의 대화는 신라가 이제 점차 예전과 달리 국왕이 위상을 가지고 있는 국가로 발전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료입니다. 이제 대군장이라는 칭호를 쓰면서, 경주평야를 벗어나 낙동강 하류까지 진출하게 되며, 김씨가 왕위 세습을 하는 보다 진화된 국가체계를 마련하는 것을 보여주는 사료입니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