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즈풀이/역사 사료와 데이터 썸네일형 리스트형 고조선의 중심지 이동설 고조선의 중심지 이동 옛날 기자의 후손인 조선제후가 있었다. 은나라가 쇠퇴하는 것을 보고 연나라가 스스로 왕이 되어 동쪽을 공격하고자 하니, 조선제후 역시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오히려 연을 물리치고 주왕실을 보호하고자 하였다. 이에 대부인 예가 중지할 것을 간청하니 이에 중지하였다. 또 서쪽 연나라에 사신을 파견하니 연도 역시 중지하여 공격하지 않았다. 후에 조선의 자손들은 점점 교만해져갔다. 연나라는 장군 진개를 파견하여 조선의 서쪽을 공격하여, 2천여리의 땅을 차지하였다. 만번한을 경계로 이르게 되었으며, 조선은 점차 쇠약해져갔다. - 삼국지 위서 동이전 - 사료해석 : 이 사료는 고조선의 중심지 이동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고조선의 중심지가 어디인가를 놓고 많은 논란이 있었습니다. 민족주의 학자들.. 더보기 조선책략 반대상소 - 홍재학 조선책략 반대상소_홍재학 대개 서양의 학문은 천리를 어지럽히고 기강을 소멸시킴이 심하다는 것을 다시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서양의 물건은 대부분 음탕하고 욕심을 유도하며, 유교 윤리를 깨뜨리고 사람의 정신을 어지럽히며, 천지를 거역하는 것들입니다. 서양의 학문과 물건은 귀로 들으면 창자가 뒤틀리고 수컷이 다른 것으로 바뀌며 눈으로 보면 창자가 꼬이고 위가 뒤집히며, 코로 냄새를 맡고 입술로 그것에 닿게 하면 마음이 변하여 실성하게 되니 이는 곧 그림자가 서로 부딪치고 전염성이 서로 감영되는 것과 같으며, 그 사람의 좋고 싫음이 향배를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십자가의 상을 받들지 않는다 해도 예수교의 책을 읽게되면 성인에게 죄를 얻는 시작입니다. 전하의 백성들의 과연 귀와 눈과 코와 입이 있습니까 없.. 더보기 최치원, 설계두의 골품제 모순 비판 최치원과 설계두 : 골품제의 모순 비판 최치원이 서쪽으로 당에 가서 벼슬을 하다가 고국에 돌아왔는데 전후에 난세를 만나서 처지가 곤란하였으며 걸핏하면 모함을 받아 죄에 걸리겠으므로 스스로 때를 만나지 못한 것을 한탄하고 다시 벼슬할 뜻을 두지 않았다. 그는 세속과 관계를 끊고 자유로운 몸이 되어 숲 속의 강이나 바닷가에 정자를 만들고 소나무와 대나무를 심으며 책을 벗하여 자연을 노래하였다. 신계두는 신라의 귀족 자손이다. 일찍이 친구 네 사람과 술을 마시며 각기 그 뜻을 말할 때 라고 하였다. 그는 621년 몰래 배를 타고 당으로 갔다. - 삼국사기 - 사료해석 : 골품제는 능력과는 관계없이 골품에 따라 정치, 사회적 진출에서 일상생활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특권과 제약이 부여되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 더보기 후백제 건국 이야기 사료 후백제 건국 이야기 견훤은 상주 가은현(경북 문경 가은) 사람으로 본래의 성은 이씨였는데, 후에 견으로 성씨를 삼았다. 아버지는 아자개이니 농사로 자활하다가 후에 가업을 일으켜 장군이 되었다. .... 신라 진성여왕 6년(892) 아첨하는 소인들이 왕의 곁에 있어 정권을 농간하매 기강은 문란하여 해이해지고, 기근이 곁들어 백성들이 떠돌아 다니고 도적들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이에 견훤이 은근히 반심을 품고 무리를 모아 서울 서남쪽 주현들로 진격하니, 가는 곳마다 호응하여 무리가 달포 사이에 5천여인에 이르렀다...... 하고, 드디어 후백제 왕이라 스스로 칭하고 관부를 설치하여 직책을 나누었다. - 삼국사기 - 사료해석 : 신리 말기 호족들은 스스로 장군, 성주, 왕으로 칭하고 일부는 국가를 건국하였으니 .. 더보기 골품제도의 일상생활 제약 골품제의 생활 규약 4두품에서 백성에 이르기까지는 방의 길이와 너비가 15척을 넘지 못한다. 느릅나무를 쓰지 못하고, 우물 천장을 만들지 못하며 당기와를 덮지 못하고, 담장은 6척을 넘지 못하고, 또 보를 가설하지 않으며, 석회를 칠하지 못한다. 대문과 사방문을 만들지 못하고, 마구간에는 말 2마리를 둘 수 있다. - 삼국사기 - 사료해석 : 위의 자료는 골품에 따른 생활 모습을 나타낸 자료로 7차 교과서 수록 지문입니다. 신라 사회에서는 골품에 따라 관등 승진의 상한선이 정해질 뿐만 아니라 신분에 따른 가옥 규모와 장식물, 복색이나 수레 등의 일상생활까지도 규제 대상이 되었답니다. 더보기 고구려의 서옥제 서옥제(데릴사위제) 혼인하는 풍습을 보면. 구두로 약속이 정해지면 신부 집에서 큰 본채 뒤에 작인 별채를 짓는데, 이를 서옥이라고 한다. 해가 저물 무렵 신랑이 신부 집 문밖에 와서 이름을 밝히고 꿇어앉아 절하며 안에 들어가서 신부와 잘 수 있도록 요청한다. 신랑은 돈과 비단을 옆에 두고, 이렇게 두세 번 청하면 신부의 부모가 별채에 들어가서 자도록 허락한다. 자식을 낳아 장성하면 신부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간다. - 삼국지 동이전 - 사료해석 : 서옥제는 사위가 신부 집에서 살다가 자식이 장성하면 남자 집으로 돌아가는 고구려 지배층의 혼인 풍습입니다. 이는 사위가 처가에서 장기간 체류하면서 노동력을 제공하고 봉사하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반대로 평민들은 남녀간의 자유로운 교제를 통해 결혼을 하였는데, 남.. 더보기 고대의 전쟁 노비 관련 사료 고대의 노비 고구려왕 사유(고국원왕)가 보병과 기병 2만을 거느리고 와서 치양(황해도 백주)에 주둔하고 군사를 나누어 민가를 약탈하였다. 왕(근초고왕)이 태자에게 군사를 주니 곧장 치양으로 가서 고구려군을 급히 깨뜨리고 오천명을 사로잡았다. 그 포로를 장사에게 나누어 주었다. - 삼국사기 - 가야가 배반하니 왕(진흥왕)이 이사부에게 토벌하도록 명령하고, 사다함에게 이를 돕게 하였다. 사다함이 기병 오천명을 거느리고 들이닥치니 일시에 모두 항복하였다. 공을 논하였는데 사다함이 으뜸이었다. 왕이 좋은 농토와 포로 이백명을 상으로 주었다. 사다함은 세 번 사양하였으나 왕이 굳이 주자 받은 사람은 놓아주어 영민으로 만들고, 농토는 병사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를 보고 나라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하였다. - 삼국사기.. 더보기 신라 사로국의 건국, 육촌설화(삼국유사) 사로국의 건국 진한 땅에 옛날에 6촌이 있었다. 전한의 지절 원년인 임자년 3월 초하루에 6부 시조들이 저마다 자제를 이끌고 알천 기슭 위에 모두 모여서 의논하여 말하기를 더보기 백제 정사암 회의(삼국유사) 정사암 회의 호암사에는 정사암이란 바위가 있다. 나라에서 장차 재상을 뽑을 때에 후보 3-4명의 이름을 적어서 상자에 넣고 봉해서 바위 위에 두었다가 얼마 후에 가지고 와서 열어보고 그 이름 위헤 도장이 찍혀 있는 사람을 재상으로 삼았다. 이런 이유로 정사암이라고 하였다. - 삼국유사 - 사료해석 : 삼국 초기 화백, 정사암, 제가 회의 등 귀족 회의가 존재하였다는 증거사료입니다. 왕권을 제약하는 귀족 세력의 합의 기구로서, 위 사료는 정사암 회의 자체에서 백제의 정치가 논의디고 수상이 선출되었던 시기가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즉, 귀족합의 기관의 존재는 삼국의 중앙집권력에 어느 정도 한계가 있었음을 의미하며 삼국의 정치가 국왕 중심의 귀족 정치였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더보기 백제 근초고왕 대 중국 진출 및 정복설 사료 백제의 중국 정복 백제국은 본래 고구려와 함께 요동의 동쪽 천여리에 있었다. 그 후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하니 백제는 요서, 진평 2군을 차지하고 통치하였다. - 송서 제이전 - 그 나라는 본래 고구려와 함께 요동의 동쪽에 있었다. 진대에 고구려가 이미 요동을 차지하니 백제 역시 요서, 진평 두 군의 땅을 차지하여 스스로 백제군을 두었다. - 양서 제이전 백제 - 사료해석 : 이 사료들이 사실이라면 백제의 전성기 때 백제 역시 중국을 지배한 것이 됩니다. 특히 이 사료들의 가치는 중국 사료라는 것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료는 중국에 의해 많은 반박을 받습니다. 그 내용은 이 사료를 적은 등의 국가가 중국 남북조 시대의 남조로서 당시 북조와 대립한 상황이었다는 역사적 사실 때문입니다. 즉, 중국의 입장은 .. 더보기 이전 1 ··· 119 120 121 122 123 124 125 ··· 136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