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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풀이/역사 사료와 데이터

대원군의 왕권 강화와 인사등용 사료 대원군의 인사등용 대원군이 집권한 뒤 어느 공회 석상에서 음성을 높여 여러 대신을 향해 이렇게 말하였다. 대저 천리지척이라는 말은 종친을 높인다는 뜻이요, 남대문 3층이라는 말은 남인을 천거하겠다는 뜻이요, 태산을 평지로 만들겠다는 것은 노론을 억압하겠다는 의사이다. - 매천야록, 갑오이전 - 참고글 : 대원군은 집권 직후 권력구조를 개편하여 왕권을 강화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즉, 외척세력으로 권세를 누리는 안동김문을 정계에서 축출하고 당파와 신분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려 노력하였습니다. 비변사를 축소하고, 의정부의 기능을 부활한 것들도 이러한 맥락입니다. 더보기
대원군의 호포제와 사창제 실시 사료 호포제와 사창제 갑자년 초에 대원군은 백성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려고 그 전의 형태를 바꾸어 모든 양반, 천민에게 1정에 대해서 일률적으로 세납전 2량씩 고루 바치게 하였으니 이를 동포전이라고 한다. - 매천야록, 갑오이전 - 사창절목 본 창에는 관장할 사람이 없어서는 안 되니 반드시 본면 중 부지런한 자를 택하고 일면회에서 천거하여 관에 보고한 뒤에 뽑니다. 또한 관에서 감히 강제로 정하지 말고 그를 일러 사수라고 하고 환곡을 분급, 수납하는 것을 맡아 검사한다. 또한 각 동에서 근검한 사람을 가려 뽑아 당장으로 삼아 일청 사수가 지휘하고 본동이 받고 내주어 그로 하여금 바로잡게 하며 창고지기 1명도 사수로 하여금 지역에 뿌리박은 자를 잘 선택하여 그로 하여금 맡아서 지키고, 출납하고, 용량을 재서 일체 .. 더보기
대원군의 은결 색출 대원군의 은결 색출 대저 임금이 있으면 나라가 있는데, 금일의 형세는 나라가 있으나 믿을 것이 없다고 합니다. 나라라는 것은 민이 모인 것이고 민을 모으는 것은 재물입니다. 안으로는 왕실과 정부가 모두 텅 비고 밖으로는 창고가 모두 고갈되었으니, 녹봉을 계속 지급하기 어렵고 진휼곡은 내주기도 어려우며 생민이 날로 초췌해지고 온 팔도에 소요가 일어나니 흰수건을 둘러쓰고 몽둥이를 든 자가 걸핏하면 1만명이 넘고 관가를 약탈하고 관원을 살해하고 재변이 사방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지난 역사에 없던 일들로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전하의 나라에 백성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 승정원일기, 고정 1년 정월 27일 - 영의정 조두순이 아뢰기를 라고 말하였다. 대왕대비는 여기에 따라 시행하되 회기 .. 더보기
강화도 조약(조일 수호 조규) 강화도 조약(조일 수호 조규) 대일본국과 대조선국은 원래부터 우의를 두터이 하여온 지가 여러 해 되었으나 지금 두 나라의 우의가 미흡한 것을 고려하여 다시 옛날의 좋은 관계를 회복하여 친목을 공고히 한다. 이는 일본국 정부가 선발한 특명 전권 변리 대신인 육군 중장 겸 참의 개척 장관 흑전청륭(구로다 기요타카)과 특명 부전권 변리 대신인 의관 정상형(이노우에 가오루)이 조선국 강화부에 와서 조선국 정부가 선발한 판중추부사 신헌과 부총관 윤자승과 함께 각기 지시를 받들고 조항을 토의 결정한 것으로써 아래에 열거한다. 제1조. 조선국은 자주 국가로써 일본국과 동등한 권리를 보유한다. 이제부터 양국은 화친한 사실을 표시하려면 모름지기 서로 동등한 예의로 대우하여야 하고 조금이라도 상대방의 권리를 침범하거나 의.. 더보기
간도협약 - 청과 일본간의 도문강 국경 협약(고구려땅이 영원히 사라졌죠...) 간도협약 대일본제국정부(大日本國政府) 급(及) 대청국정부(大淸國政府)는 선린(善隣)의 호의(好誼)에 비추어 도문강이 청(淸)·한(韓) 양국(兩國)의 국경(國境)임을 서로 확인(確認)함과 아울러 타협(妥協)의 정신(精神)으로써 일체(一切)의 변법(辨法)을 상정(商定)함으로써 청(淸)·한(韓) 양국(兩國)의 변민(邊民)으로 하여금 영원히 치안의 경복(慶福)을 향수(享受)하게 함을 욕망(慾望)하고 이에 좌(左)의 조관(條款)을 정립(訂立)한다. 제1조 청·일 양국정부는 도문강을 청·일 양국의 국경으로 하고 강원지방에 있어서는 정계비(定界碑)를 기점(起點)으로 하여 석을수(石乙水)로써 양국의 경계로 할 것을 성명(聲明)한다. 제2조 청국정부는 본협약 조인후 가능한 한 속히 좌기(左記)의 각지(各地)를 외국인의 .. 더보기
을사조약 공식문서 을 사 조 약 일본국 정부와 한국정부는 양제국을 결합하는 이해공통의 주의를 공고히 하고자 한국의 부강의 실(實)을 인정할 수 있는 때에 이르기까지 차목적(此目的)을 위하여 좌(左)의 조관(條款)을 약정함. 제1조 일본 정부는 재동경 외무성(外務省)을 경유하여 금후에 한국이 외국에 대하는 관계 및 사무를 감리(監理)·지휘할 것이요, 일본국의 외교 대표자 및 영사는 외국에 있어서의 한국의 신민(臣民) 및 이익을 보호할 것임. 제2조 일본 정부는 한국과 타국간에 현존하는 조약의 실행을 완수하는 임무에 당하고 한국 정부는 금후에 일본국 정부의 중개에 경유치 않고서 국제적 성질을 가진 하등의 조약이나 또는 약속을 하지 않기를 상약(相約)함. 제3조 일본국 정부는 기(其) 대표자로 하여금 한국 황제폐하의 궐하(闕下.. 더보기
장지연의 시일야 방성대곡 시일야 방성대곡(장지연) 지난 번 이등(伊藤) 후작이 내한했을 때에 어리석은 우리 인민들은 서로 말하기를, "후작은 평소 동양삼국의 정족(鼎足) 안녕을 주선하겠노라 자처하던 사람인지라 오늘 내한함이 필경은 우리 나라의 독립을 공고히 부식케 할 방책을 권고키 위한 것이리라."하여 인천항에서 서울에 이르기까지 관민상하가 환영하여 마지 않았다. 그러나 천하 일 가운데 예측키 어려운 일도 많도다. 천만 꿈밖에 5조약이 어찌하여 제출되었는가. 이 조약은 비단 우리 한국뿐만 아니라 동양 삼국이 분열을 빚어낼 조짐인 즉, 그렇다면 이등후작의 본뜻이 어디에 있었던가? 그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 대황제 폐하의 성의(聖意)가 강경하여 거절하기를 마다 하지 않았으니 조약이 성립되지 않은 것인 줄 이등후작 스스로도 잘 알았.. 더보기
일진회가 일본에 보낸 한일합방청원서(망국의 문서) 한일 합방 청원서(통감에게 올리는 병합 청원) 통감 자작 소네 아라스케 각하 대한국 일진회장 이용구 등 1백만 회원은, 대한국 2천만 민중을 대표하여, 황송히 머리 숙여 재배(再拜)하면서, 대일본 천황 폐하를 대신하는 한국 통감 소네 아라스케 각하에게 삼가 글을 바치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귀 대일본 천황 폐하께서는 천명을 받으시와, 지극하신 위엄으로 여러 나라의 화합을 도모하시며, 동양 평화의 중심이 되셨습니다. 경륜의 크심이 하늘과 같고, 황위가 해와 같으니 어찌 장하다 하지 않으리까. 이제 각하께서는 나라 밖에 병권을 맡으시와, 덕을 팔방에 펴고 계십니다. 문무의 교화와 덕택이 초목에까지 미치니 완고하고, 미욱한 백 성도 새로운 생각을 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이러한 때에 이용구 등이 또한 무엇을 .. 더보기
가쓰라테프트, 시모노세키 조약, 러일강화조약, 제 2차 영일동맹 주요내용 한일 강점을 위한 조약들(1902-1909) 첫째, 일본은 필리핀에 대하여 하등의 침략적 의도를품지 않으며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확인한다. 둘째, 극동의 평화를 위해 미, 영, 일 삼국은 실질적인 동맹 관계를 확보한다. 셋째, 러일전쟁의 원인이 된 한국은 일본이 지배할 것을 승인한다. - 가쓰라·태프트 밀약 - 청국은 조선이 완전 무결한 독립 자주국임을 확인한다. 따라서 조선의 자주 독립을 훼손시킬 수 있는 조선국의 청국에 대한 공헌(貢獻)과 전례(典禮) 등은 앞으로 완전히 폐지한다. - 시모노세키 조약 - 러시아 제국 정부는 일본 제국이 한국에서 정치·군사·경제상으로 탁월한 이익을 가진다는 것을 인정하고, 일본 제국 정부가 한국에서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지도·보호 및 감리의 조치 를 취하는 데 이를 저지.. 더보기
주시경 선생 유고 주시경 유고 나라를 빼앗고자 하는 자는 그 나라의 글과 말을 먼저 없이하고 자기 나라의 말과 글을 전파하며, 자기 나라를 흥성케 하고자 하거나 나라를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자국의 글과 말을 먼저 닦고, 백성의 지혜로움을 발달케 하고, 단합을 공고케 한다. 참고글 : 일제시대 우리말과 글을 지키기 위해 애쓰신 주시경 선생에 대한 사료입니다. 주시경 선생은 한국말과 글을 과학적으로 체계를 세워 국어학 중흥의 선구자가 되었습니다. 또한 한글 보급에 정성을 기울여 김두봉(金枓奉)·이규영(李奎榮)·최현배(崔鉉培)·장지영(張志暎)·이병기(李秉岐) 등의 제자를 길러내었습니다.. 1921년에는 이들 문하생이 중심이 되어 조선어연구회(朝鮮語硏究會:한글학회의 전신)를 창설함으로써 1933년 드디어 ‘한글맞춤법통일안’을 제..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