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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풀이/역사 사료와 데이터

2007. 3. 26 역사 검색 로그표 : <광개토대왕릉비> 2007. 3. 26 히스토리아 역사 검색 로그표 - 3월 26일(3월 4주) - 3월 26일 포탈사이트에서 유입된 가장 많이 검색한 역사단어는 였습니다. 사이트내 가장 많이 검색된 연예기사 단어는 와 네요. 광개토대왕, 삼국통일, 펠레폰네소스가 유입단어로 많은 것은 중2 세계사와 국사단원에서 이 부분의 진도를 나가는 시기라 그런 듯 합니다. 3월 26일 당일 기준입니다. 매주 임의로 1일 검색을 로그합니다. 포탈사이트, 메타블로그에서 유입된 러퍼러 수 역사단어를 가장 많이 검색한 사이트는 다움, 네이버, 블로그플러스, 구글, 오픈블로그 입니다. 더보기
마누법전 중 여성에 대한 조항 마누법전 중 여성에 대한 조항 1. 마누 법전의 조항 제 5장 148조 여자는 어려서는 그의 아버지를, 젊었을 때는 그의 남편을, 남편이 죽었을 대는 그 자식을 따라야 한다. 제 5장 150조 부인은 늘 쾌활하고 가사를 잘 하고 가구를 청결히 하고 지출할 때는 절약해야 한다. 제 5장 151조 여자는 아버지 혹은 아버지의 동의를 얻은 오빠가 선택한 사람과 결혼하고, 남편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순종하며 죽은 다음에는 결코 그 이름을 더렵혀서는 안된다. 제 5장 154조 정절을 지키는 처는 방종하고 성질이 좋지 않을지라도 남편을 늘 신처럼 받들어야 한다. 제 5장 165조 몸과 말과 뜻을 자제하고 남편에 대해 부정하지 않은 사람은 사후 하늘나라에서 남편과 함께 살고올바른 사람들에게 열녀로 불릴 것이다. ---.. 더보기
인도의 대 서사시 - 라마야나 라마야나 1. 라마야나란? 라마야나는 라마의 여행기라는 뜻입니다. 인도에서는 이 라마야나가 많은 사랑을 받고 있으며, 이를 소재로 한 문학작품, 연극, 무용, 음악 등이 성행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시로 구성되어 있는데, 약 2만 4000의 시음율로 이루어진 세계 최장편의 서사시입니다. 실제 작가는 발미키라는 기원전 3세기 사람이라고 하지만, 구전된 연대를 따지고 올라가면 거의 기원전 10세기 이상으로 올라가게 됩니다. 실제 오늘날과 같은 산스크리트어로 남게 된 것은 기원전 2-1세기 경이라고 합니다. 이 작품은 코살라 국의 왕자인 이 줄거리입니다. 라마의 여행 속에서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들이 대서사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일단 왕지비 시타는 을 강조하는 인물로, 동생 바라타는 이 강한 인물로, 악귀 라바.. 더보기
인도인의 셩경 - 마하바라타(위대한 바라타족의 이야기 18편) 마하바라타 1. 마하바라타의 개요 마하바라타는 기원전 4세기 경부터 기원후 4세기까지 산스크리트어로 완성된 총 18편의 대서사시입니다. 마하바라타는 우리말로 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바라타 족의 대전쟁에 관한 서사시로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바라타 족의 왕 드리나타슈트라는 두루요다나 등 100명의 아들이 있었다. 왕의 동생 판두에게는 유티슈트라 등 5명의 아들이 있었다. 드리나타슈트라는 왕을 조카 유티슈트라에게 물려주었다. 두루요다나는 다시 왕위를 차지하기 위하여 유티슈트라에게 도박을 걸어 유티슈트라를 12년간 추방하였다. 방랑 생활을 하던 유티슈트라는 13년이 지난 뒤 왕우를 돌려달라고 요구하였는데, 거절당하였다. 유티슈트라는 18일간의 치열한 전쟁을 겪은 뒤 승리하여 다시 왕으로 돌아왔다. 2. 6.. 더보기
갑골문자에 나오는 은나라 복점 내용 : 국왕이 수년(점찰)을 하다 갑골문자에 나오는 은나라 복점 내용 乙巳 王卜 今 歲商受年 王占曰 을사 왕복 금 세상수년 왕점왈 을사년에 왕이 복점을 치다. 지금 상의 풍흉을 모두 점치고, 왕이 말하길 동,서,남,북 사토가 길하다고 말하다 중국 고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복점 사료입니다. 이 사료의 내용을 해석하면, 당해에 수년을 했다는 내용입니다. 수년이란 풍작 여부를 미리 점을 쳐서 알아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왕이 풍년을 점치는 내용을 보면 동토, 서토, 남토, 북토의 4토를 점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은의 왕이 직접 사토의 풍흉을 점침으로서 사토가 실제 왕의 지배영역이었음을 뜻합니다. 또 세상수년이라는 말에서 왕의 4토와 국가 전체의 복점을 달리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왕의 땅을 이라는 왕기로 인식하고, 나머지 4토.. 더보기
고려사 : 흑리전 서문과 흑리전 사료 모음 고려사 : 흑리전 서문과 흑리전 사료 모음 옛날에는 백성을 다스리는 권한은 맡겼으나 법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한은 맡기지 않았다. 중세(中世)에 이르러 비로소 법(法)을 전임(專任)케 하니 법령(法令)이 더욱 밝아져서 혹리가 나왔다. 그 해독을 논하여 이를 맹호(猛虎)에 비유(比喩)한 자가 있었으나 어찌 지나친 논평이라 하겠는가? 고려(高麗)는 관후(寬厚)하게 다스렸으므로 형(刑)에 참혹함이 없었으나 그 중엽(中葉)에 와서 변고가 많아진 때로부터 일에 밝은 관리(官吏)를 기용하므로 말미암아 잔혹(殘酷)한 풍조가 비로소 일어났다. 옛 역사[舊史]는 빠져서 갖추어지지 않으므로 이제 두 사람에 대한 자료를 얻어서 혹리전(酷吏傳)을 짓는다. 송길유(宋吉儒) 송길유(宋吉儒)는 성품(性品)이 탐혹하고 아첨을 잘.. 더보기
고려사 : 환자전 서문과 환자전 사료 모음 고려사 : 환자전 서문과 환자전 사료 모음 고려의 엄인(人 내시 )은 그 본계(本系)가 백성이 아니면 천한 종이었다. 고려에서는 궁형(宮刑 부형(腐刑) )을 쓰지 않았으므로 어렸을 때 개에게 고환을 먹힌 자가 모두 이런 자가 되었다. 그러나 다만 궁중의 영항(永巷)의 직임에만 채용할 뿐이고, 관원(官員)으로는 제배(除拜)되지 못 하였으니 그 사려(思慮)가 심원(深遠)한 바 있었다. 의종 때 정함(鄭) 백선연(白善淵)이 처음으로 권력을 마음대로 하였다. 그러나 정함이 지후(祗侯)가 되었을 때 재상(宰相)과 대간(臺諫)이 굳이 다투어 왕의 뜻을 받들지 않았으니 대개 아직도 선왕의 유풍(遺風)이 있었음이었다. 제국 공주가 일찍이 원(元) 나라 세조(世祖)에게 몇 사람을 바쳤는데 이들은 규원(閨 궁녀(宮女) ).. 더보기
고려사 : 충의전 사료 모음 고려사 : 충의전 사료 모음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생(生)도 또한 내가 하고자 하는 바요 의(義)도 또한 내가 하고자 하는 바이나 두 가지를 겸할 수 없으면 생(生)을 버리고 의(義)를 취할 것이라. 하였으니 대개 사람이 누가 죽음을 싫어하지 않으리요마는 충신과 의사(義士)는 한번 변고를 만나면 비록 정확(鼎)이 앞에 있고 도거(刀鋸)가 뒤에 있어도 피하지 않는 것은 하고자 함이 사는 것보다 심함이 있는 때문이다. 고려(高麗)는 인종(仁宗)으로부터 이후로는 왕실에 환난이 많았으므로 절의에 죽은 사람도 또한 적지 않았으므로 이제 그 일을 차례로 서술하여 충의전(忠義傳)을 짓는다. 홍관(洪灌) 홍관(洪灌)의 자(字)는 무당(無黨)이요 당성인(唐城人)이니 과거(科擧)에 급제하여 어사 중승(御史中丞)과 문덕.. 더보기
고려사 : 방기전 사료 모음 고려사 : 방기전 사료 모음 정헌대부(正憲大夫) 공조 판서(工曹判書) 집현전 대제학(集賢殿大提學) 지경연춘추관사(知經筵春秋館事) 겸(兼) 성균 대사성(成均大司成) 신(臣) 정인지(鄭麟趾) 봉(奉) 교수(敎修) 대개 한 가지 예능으로써 이름이 나는 것은 비록 군자(君子)로서 부끄러워하는 바이나 그러나 역시 나라를 가진 자에게는 없을 수 없는 것이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 일자열전(日者列傳)과 구책 열전(龜策列傳)과 창편전(倉扁傳)을 세운 이래로 후세의 작사자(作史者)들이 모두 방기전(方技傳)을 술(述)하였음은 어찌 이 뜻이 아니리요? 방기전(方技傳)을 짓는다. 김위제(金謂) 김위제(金謂)는 숙종(肅宗) 원년(元年)에 위위승 동정(衛尉丞同正)이 되었다. 신라 말에 도선(道詵)이란 승(僧)이 있어 .. 더보기
고려사 우애전 서문 - 고려의 효도, 우애 관련 사료 고려사 우애전 서문 - 고려의 효도, 우애 관련 사료 효도와 우애는 사람의 항성(恒性)인데 세상의 풍교(風敎)가 쇠퇴하면서부터 백성이 그 본성(本性)을 상실한 자가 많아졌다. 그러므로 이에 힘을 다한 자가 있으면 표창하여 권장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고려(高麗) 5백년 간에 효우(孝友)로써 사책(史冊)에 쓰이고 정표에 나타난 자가 10여 인이므로 효우전(孝友傳)을 짓는다. 문충(文忠) 문충은 세계(世系)가 자세하지 않으나 어머니를 섬김에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오관산(五冠山) 영통사(靈通寺)의 마을에 살아 서울에서 30 리 떨어져 있었다. 봉양을 위하여 봉록(俸祿)을 받고 벼슬하매 아침에 나가고 저녁에 돌아오면 면전에 고하고 정성(定省)하여 조금도 쇠멸함이 없었다. 그 어머니의 늙음을 탄식하여 목계가를 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