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퀴즈풀이/역사 사료와 데이터

최충헌의 봉사 10조 최충헌의 봉사 10조 1. 왕은 참위설을 믿어 새로 지은 궁궐에 들지 않고 있는데, 길일을 택하여 들어갈 것. 2. 근래 관제에 어긋나게 많은 관직을 제수하여 녹봉이 부족하게 되었으니 원제도에 따라 관리의 수를 줄일 것. 3. 근래 벼슬아치들이 공․사전을 빼앗아 토지를 겸병함으로써 국가의 수입이 줄고 군사가 부족하게 되었으니, 토지대장에 따라 원주인에게 돌려줄 것. 4. 세금을 거두는데 향리의 횡포와 권세가의 거듭되는 징수로 백성의 생활이 곤란하니 유능한 수령을 파견하여 금지케할 것. 5. 근래 각 지역의 관리들이 공물 진상을 구실로 약탈 행위를 일삼고 사취하기도 하니 공물 진상을 금할 것. 6. 지금 승려 한 두 사람이 궁중에 무상 출입하고 왕이 내신으로 하여금 불사(佛事)를 관장하여 곡식을 민간에게 .. 더보기
고려 시대 전시과 관련 사료 모음 고려 시대 전시과 관련 사료 모음 (가) 처음으로 그는 역분전을 정하였다. 통합시의 조신(朝臣), 군사들에게 관계(官階)는 논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성행의 선악과 공로의 대소를 보아 지급하였는데 차등이 있었다. 식화지, 전제 (나) 고려의 전제는 대개 당나라의 제도를 모방하여, 개간된 토지의 넓이를 총괄해서 그 기름 지고 메마른 것을 나누어 문무 백관으로부터 부병(군역을 책임지는 장정), 한인(관리 신분이면서 벼슬을 못하고 있는 자)에게까지 과(땅을 나누어 주는 등급)에 따라 전지를 주지 않음이 없었고, 또 그 과에 따라 시지(땔감을 얻는 땅)을 주었는데, 이를 전시과라 한다. 죽은 다음에는 모두 나라에 다시 반납해야 한다. 그러나 부병만은 나이 20세가 차면 비로소 땅을 받고 60세가 되면 반환하는데, .. 더보기
고려 시대 불교의 발전 고려 시대 불교의 발전 (가) 가만히 생각하면 성인이 가르침을 편 목적은 행(行)을 일으키려는데 있는 것이므로, 입으로만이 아니라, 몸으로 행동하게 하려는 것이다... 정원 법사는 ‘관(觀)을 배우지 않고 경(經)만 배우면 오주(五周)의 인과를 들었더라도 삼중(三重)의 성덕(性德)은 통하지 못하며, 경은 배우지 않고 관만 배우면 삼중의 성덕을 깨쳐도 오주의 인과는 분별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관도 배우지 않을 수 없고, 경도 배우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내가 교관에 마음을 다쓰는 까닭은 이 말에 깊이 감복하였기 때문이다. (나) 정(定)은 본체이고 혜(慧)는 작용이다. 작용은 본체를 바탕으로 해서 있게 되므로 혜가 정을 떠나지 않고, 본체는 작용을 가져오게 하므로 정은 혜를 떠나지 않는다. 정은 곧.. 더보기
묘청의 난에 대한 신채호의 생각 묘청의 난에 대한 신채호의 생각 西京全域을 역대의 사가들이 다만 王師가 반적을 친 지역으로 알았을 뿐이었으나 이는 근시안의 관찰이다. 실상은 이 지역이 낭,불 兩家 대 儒家의 戰이며, 국풍파 대 한학파의 戰이며, 독립당 대 사대파의 戰이며, 진취사상 대 보수사상의 戰이니, 묘청은 전자의 대표요, 김부식은 곧 후자의 대표였던 것이다.---- 이 전쟁을 어찌‘一千年來第一大事件’이라 하지 아니하랴. 신채호, 조선상고사 사 상 대외 정책 중심 인물 개경파 유교 사상 사대 주의 김부식 서경파 전통 사상 고구려 계승 묘청 이 글에 대한 참고사항 1. 이 글에 대한 관련 사료는 이 사이트 검색창에서 자유롭게 검색가능합니다.(관련 검색어로 검색하세요) 2. 이 글을 운영자 허락없이 가져갈 경우 티스토리에서 제공하는 기.. 더보기
고려의 수취체제 관련 사료 고려의 수취체제 관련 사료 진전을 개간해 경작하는 자는, 사전의 경우는 첫해에 수확의 전부를 가지고 2년째부터는 농지의 주인과 반씩 나누어 가진다. 공전의 경우는 3년까지는 수확의 전부를 차지하고 4년째부터는 법에 따라 조(지대)를 바친다. [고려사] 권78식화지1 전제 광종 24년 l2월 공전의 조(租)는 4분의 1로 하되, 논은 상등 1결에 조 3석 11두, 중등 1결에 조 2석 11두, 하등 1결에 조 l석 11두로 하고, 밭은 1결에 조 1석 12두, 중등 1결에 조 1석 l0두이며, 하등은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고려사] 권78 식화지1 전제 조세, 성종 l1년 처음에 좌창(관리의 녹봉을 맡아 보던 관청)과 우창(왕실의 양곡을 맡아 보던 관청)에서는 곡식의 말을 재는 것을 법대로 하지 않고 .. 더보기
고려의 음서제도 관련 사료 고려의 음서제도 관련 사료 비록 이름이 있는 고관이라 할 지라도 반드시 과목(科目:과거)을 거쳐 진출하는 것만은 아니다. 과거이외에도 천거(薦擧:추천제)와 문음(門蔭), 성중애마(成衆愛馬:왕을 가까이 모시는 관직), 잡로(雜職:궁중의 실무를 담당 )를 통한 길이 있어 관리로 진출하는 길 이 하나만은 아니었다. 양반 5품이상의 자손 중 한명을 입사(入仕:처음으로 벼슬길에 오르는것)하도록 하였다. 고려사, 지 이 글에 대한 참고사항 1. 이 글에 대한 관련 사료는 이 사이트 검색창에서 자유롭게 검색가능합니다.(관련 검색어로 검색하세요) 2. 이 글을 운영자 허락없이 불펌할 경우 티스토리에서 제공하는 기능이 자동으로 삽입됩니다. 3. 네모칸이나 밑줄이 삽입된 단어를 클릭할 경우 사이트 내 연계된 포스트들이 자.. 더보기
고려사에 나오는 고려 시대의 신분 제도 고려사에 나오는 고려 시대의 신분 제도 (가) 왕 16년 12월 5품 이상 관리의 아들 에게 음직을 주었다. (나) 양반 6품 이상 관리의 자손 중 한 명을 입사 (처옴 벼슬 자리에 나감)하도륵 하였다. 선거지 (다) 이자겸은 그 족속을 요직에 널리 앉히고, 관작를 팔고, 스스로 국공이 되어 그에 대한 대우를 왕태자와 같게 하였다. 뇌물이 공공연하게 행해져 바치는 믈컨이 넘치게 모여드니, 썩어저 버리는 고기가 항상 수만 근이었다. 이자겸 (라) 김돈중이 아우 김돈시와 함께 아버지 김부식이 세운 관란사를 중수하고 왕을 위해 복올 비는 것이라고 소문을 내었다. 왕이 김돈중 등에게 말하기를 ‘듣컨데 경들이 과인올 위해 복올 빈다고 하니 매우 가상하다 장차 가저 보겠노라.'하였다. 김돈중 등이 또 절의 북쪽 산.. 더보기
고려 시대의 신분 제도 고려 시대의 신분 제도 옛적에 우리 태조는 후손들에게 훈계하기를, ‘무릇 천인의 무리들은 그 종자가 별다르니 이들을 양인으로 삼지 말라. 만약 양인이 되는 것을 허락하면, 뒷날 반드시 관직에 나아가게 될 것이고, 차차 요직을 차지하여 국가를 흔란스럽게 만들 것이니, 만약 이 훈령을 어기면 사직이 위태롭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의 법은 8대 동안의 호적이 천인의 무리와 관계가 없어야 비로소 벼슬을 할 수 있다. 무릇 천인의 무리에 속한 자는 아비나 어미 한쪽이 천인이면 자기도 천인이 된다. 비록 본주인이 놓아 주어 양민이 되더라도 그가 낳은 자식은 도로 천인이 된다. 또 본주인이 후손이 없이 죽더라도 주인 가문의 노비에 속하게 된다. 이것은 노비를 끝끝내 양민이 되지 못하게 하려는 것.. 더보기
훈요십조 훈 요 십 조 태조 26년(943) 여름 4월에 왕이 내전에 나가 앉아 대광 박술희를 불러서 친히 훈요를 주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내가 들으니 순 임금은 역산에서 농사를 지었으나 마침내 요임금의 왕위를 받았으며 한의 고제 패택에서 일어나 한나라의 왕업을 성취하였다고 한다. 나도 역지 한갖 외로운 평 민으로서 그릇되게 여러 사람들의 추대를 받았다 더위와 추위를 무릅쓰고 19년 동안 노심초사한 끝에 삼한을 통일하여 외람스럽게 왕위에 있은 지가 25년이나 되었고 몸도 벌써 늙었다 후손들이 감정과 욕심에 사로 잡혀 나라의 질서를 문란시킬 듯하니 이것이 크게 근심스럽다. 이에 훈계를 써서 후손들에게 전하노니 아침 저녁으로 펼쳐 보아 영구히 모범으로 삼게 하기를 바란다. 첫째, 우리 국가의 왕업은 반드시.. 더보기
(참고글) 고려사와 고려사 절요 고려사와 고려사 절요 출처: 이성복(sungbok.com), 이성미, 정슬기 외 5인 공저 이 글은 블로그의 운영자가 작성한 글이 아닙니다. 이 글은 이후 포스팅 될 와 의 핵심 내용들을 읽을 때 참조할 수 있는 글로서 위 저작자의 글을 가져왔습니다. 참고만 하세요. 1. 서론 현존하는 고려시대 자료가 빈곤한 상황에서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는 고려시대사 연구 자료로 가장 비중이 있는 역사서일 뿐 아니라, 편찬할 당시인 조선 초의 역사인식과 시대적 상황과 서술을 검토하는 데에도 매우 긴요한 자료로써 일찍부터 학자들의 주목을 받아왔다.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새로운 집권층이 등장하는 경우에 대부분은 이전 시기의 역사(당시로 보았을 때는 현대사)를 정리 또는 왜곡함으로써 자신들의 정당성을 부여받으려고 하였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