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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풀이/역사 사료와 데이터

발해의 왕계표(고구려 연구회 작.) 발 해 왕 계 표 이 글이 인용된 원문 : http://www.koguryo.org/(사단법인 고구려 연구회 사이트) 더보기
발해의 영토는 어디까지인가? 발해의 영토는 어디까지인가? (1) 서 길 수(서경대 교수, 고구려연구회 회장) 흔히 발해는 단군조선 이후 가장 큰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발해의 강역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이견이 있다. 특히 강역문제의 핵심은 요동지 방의 편입여부에 있다. 우선 지금까지 나온 발해 강역도를 4가지로 분류하고, 이어서 요동반 도가 발해 땅이었다는 것을 확인해 보기로 한다. 발해강역도 1. 요서지방이 일부 들어간 지도 ① 唐晏 纂, 劉承幹 交, {渤海國志}, 求恕齋, 1919 ② {조선전사} 5. 중세편, 1991 2. 요동지방이 들어간 지도 ① 新妻利久, {渤海國史及び日本との國交史硏究}, 東京電氣大學出版局, 1969 한규철, {발해의 대외관계사}, 신서원, 1994 ② 上田雄 孫永健, {일본발해교섭사}, 彩.. 더보기
발해 멸망의 원인은? 발해멸망 원인 金 恩 國(중앙대 강사) 10세기에 들어 발해를 통치한 왕은 제15대 마지막 왕 대인선(大 )이었다. 발해의 멸망은 그가 재위에 오른 지 20여 년 뒤의 일이다. 발해 멸망을 살필 수 있는 기록은 현재 {요사(遼史)} 뿐이다. {遼史} 야율우지전(耶律羽之傳)에 "거란 태조가 그 갈린 마음을 틈타 움직이니 싸우지 않고 이겼다 (先帝因彼離心 乘 而動 故不戰而克 )" 라는 기록이 유일하다 하겠다. 현재까지 발해 멸망에 대한 연구는 이 기록과 함께 진행되었다. 곧 발해는 대인선 통치시기에 내분에 의해 우왕좌왕하던 중, 거란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고 허무하게 멸망하였다는 것이다. 이른바 '발해 내분에 의한 자멸'설은 현재까지도 큰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발해 내분설을 뒷받침할 근거는 전혀 없다.. 더보기
발해 해군 2만명 당나라 등주를 공결(732년) 발해 해군 2만명 당나라 등주를 공결(732년) 발해가 건국한 초기는 동아시아의 국제질서가 전면적으로 재편되는 시기였다 당나라, 국방의 혹수말갈과 신라는 사방에서 신흥국가인 발해르 압박하였다. 이러한 위기상황을 타래하고, 전세를 역전 시키기 위한 몇가지 정책을 취했다. 즉 북으로 흑수말갈을 공격하였다. 또한 해양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옇다.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여 우호관계를 맺은 발해는 신라와 적대적인 일본과 적극적인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732년에는 대규모의 수군을 동원하여 당나라의 등주(현재 산동반도 봉래시)를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당의 배후를 공격하여 해양력을 활용하면 효율적인 군사행동을 할 수 있다는 현실적인 힘과 의지를 당과 신라에 인식시켜 준 것이다. 뿐만 아니라 흑수말갈은 물론 기타 여러 말갈.. 더보기
발해의 성터 - 2 발해의 성터 (2) 길림시 모아산성(帽兒山城 ) 춘혼시 춘화향(春花鄕) 통긍산성 이 글이 인용된 원문 : http://www.koguryo.org/(사단법인 고구려 연구회 사이트) 더보기
연해주 발해 절터 유물 이 글이 인용된 원문 : http://www.koguryo.org/(사단법인 고구려 연구회 사이트) 더보기
부거석성은 동경 용원부 - 북한 학자 주장 서 일 범(연변대 교수) 부거석성은 함경북도 청진시 청암구역 부거리에 있다. 성은 지금으로부터 200년 전인 18세기 후반기에 이미 기초가 드러나 있은 상태였으므로 지금은 원래의 완전한 모습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성벽은 돌로 쌓았으며 현재까지 남아있는 성벽의 길이는 1,236m이고, 성벽의 너비는 4m, 높이 는 2m이다. 성문 초석은 네 곳에서 발견되었으므로 적어도 네 개의 성문이 있은 것으로 인정된 다. 성벽은 밑에 큰돌을 깔고 그 위에 좀 작은 돌로 2∼3단 안으로 조금씩 들여쌓은 다음 다시 곧게 올려 쌓는 이른바 고구려의 '퇴물림식' 축성법으로 쌓았다. 성안에는 성문들을 연결하는 길들이 가로세로 나 있으며, 여러 곳에서 집자리와 두가닥 고래 온돌시설들이 드러났다. 또한 성안에서는 고구려, 발해의.. 더보기
남경 남해부 - 북청 청해토성 남경 남해부 - 북청 청해토성 함경남도 북청읍에서 동남쪽으로 14km 떨어진 청해토성이다. 총길이 2,132m인 흙으로 쌓았다. 문자리는 현재 남아있는 성벽의 중심부에 있고 성벽 서남 모서리와 서북 모서리에는 각루자리 같은 것이 있으며 성벽에는 여러 개의 치가 설치되어 있다. 성안에서 온돌이 달린 집터, 관청터, 병영터, 절터 등이 발견되었고 작두, 삽, 낫, 수레부속품 등 생산도구와 무기류가 다량 발굴되었다. ◀ 남쪽 성벽 치 ▼ 남쪽 성벽 이 글이 인용된 원문 : http://www.koguryo.org/(사단법인 고구려 연구회 사이트) 더보기
동경 용원부 - 팔련성 동경 용원부 - 팔련성 785년(문왕 49년)상경에서 이곳으로 옮긴 뒤 9년간 수도였다가 794년 다시상경으로 돌아갔다. 해양 진출을 통한 대일관계의 새로운 모색과 어염지리(魚鹽之利)를 염두에 둔 천도였으며, 훈춘평야의 비옥한 토지도 큰 변수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성의 둘레는 2894m로 서고성보다 약간 크지만 거의 같은 규모라고 할 수 있다. 현재 팔련성은 혼춘강과 두만강의 삼각충적평원 서북부 혼춘시 삼가자향 국영 우량종농장 남부 경작지 안에 있다. 이불병좌상(동경대학소장) ▶ 석불(사이토컬렉션) ▼ 이 글이 인용된 원문 : http://www.koguryo.org/(사단법인 고구려 연구회 사이트) 더보기
중경 현덕부 - 서고성 중경 현덕부 - 서고성 중경은 3대 문왕 때 천도한 뒤 742년부터 755년까지 13년간이라는 짧은 기간동안 발해의 수도였다. 그러나 서고성 부근에는 정효공주묘를 비롯한 발해무덤떼가 밀집되어 있고, 용해사 고산사 등의 유지가 모여 있어 수도로서의 위상을 높여준다. 장방형의 외성은 둘레가 2790m이고 흙으로 쌓았다. 북쪽 외벽은 연길에서 용정으로 가는 큰길 가에 나란히 이어지고 있다. 외성의 남쪽과 동쪽 끝에 남아있는 해자는 수로로 활용되 고 있으며 남쪽 외성은 인도로 사용된다. 1940년 촬영한 서고성 항공사진 (사이또컬렉션) -小嶋芳孝, [일본 국내의 발해 관계자료], {발해 건국 300주년}, 187쪽 1998년 여름의 서고성 모습 이 글이 인용된 원문 : http://www.koguryo.org/..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