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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풀이/역사 사료와 데이터

상경 용천부 유적지와 유물 상경 용천부 흑룡강성 영안현 발해진 동경성에 있는 발해의 수도로서 중경에서 755년 이곳으로 천도한 뒤 9년간 동경으로 갔다온 기간을 빼놓고 발해가 멸망할 때까지 계속 수도였다. 당나라 장안성을 본 따 만들었다고 하는데 당시 당나라 장안성에 이어 동아시아에서 두번째 큰 도시라고 한다. 상경성은 외성 내성 궁성의 3중으로 된 장방형의 평지성이다. 외성의 길이가 16.3km나 되고 내성만 해서도 3,986m나 되기때문에 중경이나 동경에 비해 그 규모가 월등하게 커 그야말로 해동성국의 수도다운 면모를 갖추고 있다. 제9절터 귀면와 ▶ ▼ 벼루(밑굽직경 25.5cm) 제 2절터 석등 나팔병 (높이 39.7cm) 이 글이 인용된 원문 : http://www.koguryo.org/(사단법인 고구려 연구회 사이트) 더보기
정효공주 무덤 서고성 주위의 발해 유적 - 정효공주무덤 정효공주는 제3대 문왕 대흠무의 넷째 딸이다. 1980년 10월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화룡현 용수향 용해 용두산에서 발굴되었는데, 정혜공주무덤과 마찬가지로 비석이 나왔으며, 특히 벽화가 나와 발해의 사회상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정효공주묘 이 글이 인용된 원문 : http://www.koguryo.org/(사단법인 고구려 연구회 사이트) 더보기
발해의 독특한 건축물 - 24주춧돌 발해의 독특한 건축물 - 24주춧돌 24주춧돌 유적은 지금까지 15군데서 발견되었다. 대부분 한 줄에 8개씩 3줄로 놓인 이 특이한 돌은 건축물의 주춧돌임에는 틀림없으나 어떤 건축물인가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다. 1. 상여가 나갈 때 잠시 보관하는 곳이다. 2. 중앙정부가 관장하는 제례를 지내는 건물이다. 3. 당시 사람들이 숭배하건 종교적 대상물이다. 4. 중요한 길옆에 있는 것으로 보아 역참이다. 5.사원이나 궁전, 또는 관청터이다. 6. 곡식창고이다. 길림성 돈화시 관지진에 있는 24주춧돌 ▶ ▲▼ 길림성 돈화시 시내에 있는 강동 24주춧돌(1) (2) ▲ 김책시 동흥리 24주춧돌 유적에서 나온 쌀 함박 조각 이 글이 인용된 원문 : http://www.koguryo.org/(사단법인 고구려 연.. 더보기
발해의 동모산 유적지 구국주위의 발해 유적(1) - 육정산 동모산과 영승유적에 도읍을 정하고 있었던 초창기에 왕조과 귀족들의 무덤이 자리잡고 있는 곳이다. 영승유적에서 동북쪽으로 3㎞ 지점에 있는 이 무덤떼는 제1무덤지구와 제2무덤지구로 나뉘어 있다. 멀리서 바라보는 육정산 - 산머리 6개가 나란히 있다고 해서 육정산이라고 부른다 이 글이 인용된 원문 : http://www.koguryo.org/(사단법인 고구려 연구회 사이트) 더보기
발해의 영승 유적지 구국(舊國)은 어디인가? 초기학설 = 오동성 현재학설 = 영승유적 오동성 영승유적에서 바라보는 동모산(성산자산성) 영승유적에서 바라보는 육정산 이 글이 인용된 원문 : http://www.koguryo.org/(사단법인 고구려 연구회 사이트) 더보기
대조영이 진을 세운 동모산 대조영이 진(振)나라를 세운 곳은 어디인가? - 동모산은 돈화시 성산자산성 성산자 산성 위치: 중국 길림성 돈화시 현유진 성산촌 둘레 : 2000m 축성재료: 토석혼축 성문 : 2개 (옹성 1개) 유적 이 글이 인용된 원문 : http://www.koguryo.org/(사단법인 고구려 연구회 사이트) 더보기
(인용글) 발해의 5경 천도과정 발해의 五京 천도과정 신 형 식 (이화여대 교수, 고구려연구회 학술자문위원) 발해는 존속기간 229년간(698∼926)에 서울을 여러 번 옮겼다. 수도의 빈번한 이동은 강력한 국가행정 수행에 있어서 막대한 지장(정치적 공백)을 가져올 수도 있으며, 반대로 토착세력의 기반을 억제시켜 효과적인 왕권강화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 다만, 발해를 구성하는 여러 이민족과 그 문화적 전통을 배려한 구체적 타협은 결국 국가적 구심력을 잃게 되었다. 그러나 발해의 천도배경에는 정치·군사·외교적인 요인이 크게 작용하였으며, 고구려·백제의 경우와 달리 사전계획이나 수도보완시설의 고려 없이 추진한 결과 허약한 방어시설(산성)로 인한 수도 기능의 한계 로 문제점을 노출시켰다. 더구나 절대왕권을 지지하는 재지세력(在地勢力)의 부.. 더보기
(인용글) 발해의 연호 1. 발해는 연호를 사용하였다. 연호란 황제만이 쓸 수 있다. 중국 학자들이 주장하듯이 발해가 당 왕조가 관할한 소수민족 지방정권이라면 어떻게 연호를 쓸 수 있는가? 이것은 통일신라, 고려, 조선이 연호를 사용하지 못한 사실을 비추어 보면 쉽게 그 위상이 떠오를 것이다. 발해의 연호 (신당서에 따라 작성함) 대수 왕의 시호와 이름 재위년간 연호(신당서) 1 고왕(高王) 대조영(大祚榮) 698∼719 2 무왕(武王) 대무예(大武藝) 719∼737 仁安 3 문왕(文王) 대흠무(大欽茂) 737∼793 大興 寶曆 4 ?왕(? 王) 대원의(大元義) 793. 3∼793. ? 5 성왕(成王) 대화여(大華璵) 793∼794 中興 6 강왕(康王) 대숭인(大嵩 ) 794∼809 正歷 7 정왕(定王) 대원유(大元瑜) 809.. 더보기
(인용글) 발해 인구구성에 대한 7차 교과서의 오류 한국 교과서의 오류 - 발해의 지배층은 고구려인, 피지배층은 말갈인 - 1. 어디다 근거를 둔 것인가 가. 일본 학자가 제시한 문헌 - {유취국사(類聚國史)} (발해국에는) 2000리다. 주, 현, 관, 역들이 없고 곳곳에 촌리(마을)들이 있는데 다 말갈인 들의 부락이다. 그 백성은 말갈인이 많고 토인은 적다. 다 토인들로써 촌장을 삼는데 큰 촌 의 촌장은 도독이라고 하고 다음가는 촌의 촌장은 자사라고 하며, 그 이하는 다 백성들이 수령이라고 부른다. 토지는 지극히 추워 논농사(水田)에는 마땅하지 않다. 延 兩千里 無州縣館驛 處處有村里 皆靺鞨部落 其百姓者 靺鞨多 土人少 皆以土人爲村長 大村曰都督 次曰刺史 其下百姓皆曰首領 土地極寒 不宜水田 이것은 당나라에 간 일본 중 永忠 등이 보낸 편지 내용이다(796년 .. 더보기
(인용글) 발해는 고구려와 연결되었다는 증거 서 길 수 (고구려연구회 회장, 서경대 교수) 1. 발해를 새운 대조영은 고구려의 별종(別種)이다 - 구당서 [대조영은 본래 고구려의 별종이다 (大祚榮者 本高麗別種也)] 구당서(권 199 하) 발해말갈전의 기록이다. 구당서는 발해가 멸망하고 19년이 지난 945년 편찬한 사서로 중국 사서 가운데는 가장 신빙성이 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별종(별종)]에 대한 해석상의 논쟁이다. 일본과 중국의 학자들 은 고구려 별종이란 '고구려 종족이 아닌 다른 종족'이라는 뜻이라고 보며, 남북한 학자들은 고구려 별종이란 '고구려에서 나온 가지'라는 뜻이라고 새기는 것이다. 그러나 별종이라고 T 는 구당서 발해전에 [(발해) 풍속은 고구려 거란과 같다(風俗與高麗及契丹同)]고 분명히 하 고 있으며, 별종이란 용어도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