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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로마제국

(블로그 이전_보호글처리) 카노사의 굴욕 사건을 조종한 한 여인의 이야기 카노사의 굴욕을 조종한 한 여인의 이야기 NO. 005 역사를 뒤흔든 마틸다의 복수 이야기 *** 배경 : 11세기 중세 서유럽(1077년 : 카노사의 굴욕) *** 이 이야기는 종교적 영향력이 강했던 11세기를 살아가면서 을 기획한 마틸다라는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세계사 교과서에서 황제 하인리히 4세와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의 이야기만을 배웁니다. 그리고, 교황이 강했는지, 황제가 강했는지를 생각하보는 정도에서 이야기를 끝내곤 하죠. 하지만, 을 이끈 또 한명의 영웅은 따로 있답니다. 카노사의 굴욕 : 하인리히와 마틸데 우리가 교과서에서 보아서 알고 있는 카노사의 굴욕 사진의 의문점. 젊은 황제가 무릎을 꿇고 바라보는 사람은 남자 교황이 아닌 이다. 이 여인은 누구일까? 흔히 중세 서유럽은 봉건.. 더보기
(no 7) 번외편 2 : 마르크스로 <독일철학>과 <사회주의> 이해하기 (2) 근현대사 이야기 (NO.7) 번외편 : 마르크스로 과 이해하기 (2) - 마르크스 이전의 독일 역사 : 칸트, 피히테, 헤겔 - 자, 그럼 이제 가 깊게 감명을 받았다는 의 철학을 한번 살펴볼께요. 마르크스는 대학에 입학했지만, 헤겔 철학을 배우고 싶어서 헤겔이 몸 담았던 대학에서 두 학기 동안 공부를 할 정도로 헤겔의 광신도였답니다. 학위도 헤겔이 교수였던 대학에서 받을 정도였죠. 자, 그럼 이제, 을 좀 알아야 마르크스 철학을 좀 쉽게 이해하겠죠? 근데, 말이죠... 이넘의 헤겔철학은 피히테 철학에서 영향을 받았고... 피히테 철학은 칸트에서 영향을 받았고.... 에휴...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철학을 알기 위해, 쫌쫌쫌~ 위로 올라가서 헤겔 - 쉘링 - 피히테 - 칸트... 등등의 독일 철학자 계보.. 더보기
서임권 투쟁 4 - 서임권 문제 총정리 서임권 투쟁 4장 - 서임권 문제 총정리 지난 장에서 서임권 문제의 배경은 수도원 개혁운동으로, 서임권 문제의 핵심 사안은 토스카나 가문을 중심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이번 마지막 장에서는 서임권 문제를 학문적 입장에서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서임권 문제의 배경 서임권 문제의 배경은 성직자 임명권이 에게 넘어간 것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세속 제후가 서임권을 가진 것은 중세 전체의 사회적 변화에서 원인을 찾아야 합니다. 즉, 노르만 등의 이민족 침입으로 혼란해진 서유럽은 라는 유럽 중세 특유의 제도를 성립시켰고, 봉건제도에서는 등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영지 지배체제(지방분권체제)가 일반적이었습니다. 따라서 각급 하부단위 교회는 봉건제도의 장원안에 설립된 관계로, 영주의 지배체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 더보기
서임권 투쟁 2 - 그레고리우스 7세의 승리, 하인리히 4세의 복수, 마틸다의 재복수 하인리히 4세와 철의 여인 마틸다 - 그들의 복수와 재복수 1. 하인리히 4세의 복수 하인리히 4세는 카노사의 굴욕을 새로운 기회로 생각했습니다. 카노사의 굴욕은 육체적 치욕일 뿐, 히인리히가 황제권을 잃은 것도 아니였습니다. 그리고 한번 머리숙여 빌어서 교황에게 파문당한 것도 회복되었으니까요. 황제를 견제하던 영주들도 교황이 황제를 (비록 치욕적인 굴욕이었지만) 용서함으로서 더 이상 황제를 몰아붙일 구실을 잃었습니다. 훗날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황제 하인리히 4세를 용서했다는 사실을 뼈져리게 후회하게 됩니다. 독일 제후들은 하인리히 4세를 폐위하려고 했지만, 교황이 황제를 용서함으로서 우왕좌왕하게 되었고, 독일은 서로 죽이고 죽이는 내전상태에 빠졌습니다. 교황은 후회합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하인리.. 더보기
서임권 투쟁 1 - 카노사의 굴욕, 그 전말과 토스카나 가문 중세 서임권 투쟁과 카노사의 굴욕, 그리고 토스카나 가문 1. 로마의 몰락과 중세의 시작 로마가 몰락하면서 고대는 끝나고 중세가 시작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점차 옛 로마의 영광을 잊어가기 시작합니다. 2백만이 넘는 고대 초호화 도시 로마는 게르만과 노르만의 침입 이후 인구 2만에 불과한 추억의 도시로 전락하기 시작했습니다. 현대의 역사가인 프로카치는 로마의 역사를 이렇게 말합니다. 그 동안의 경위를 설명하자면 복잡하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드높이 쌓아올렸던 것들이 끝도 없이 무너져서 소멸해갔다. 로마 제정 말기의 엄청난 경제, 사회적 위기와 이민족의 침입, 그리고 6세기 고트족과 동로마 제국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 이탈리아를 망가뜨렸다. 그리고 롬바르드족이 이탈리아 반도에 남하하여 정착하였다. 이러한.. 더보기
중세 독일의 발전 3편 - 12c 호엔쉬타우펜 왕조 ~ 15세기 합스부르크왕조 중세 독일의 발전 3편 - 12c 호엔쉬타우펜 왕조 ~ 15세기 합스부르크왕조 중세 독일사 1,2편에서 다루었던 핵심적인 내용은 작센제후의 신성로마제국이었습니다. 오토 1세의 신성로마제국은 보편적인 황제권과 독일 국민의 국왕권이라는 2중적인 성격을 가지고, 독일내 통일국가 + 로마제국의 세계국가를 동시에 실현항려고 하였죠. 그 결과 교황권과 크게 충돌하게 되었고, 결국 카노샤의 굴욕, 보름스 협약 등을 거치면서 교황권과 어느 정도 타협하게 됩니다. 교황권과의 대대적인 마찰이 끝난 후 신성로마제국은 이제 국내 문제를 해결하는 단계로 접어들었습니다. 하지만, 이제국의 국내문제라는 것도, 항상 교황청이 있는 와 연관이 되는 관계로, 역사가 평탄치만은 않습니다. 그럼 12-13세기의 신성로마제국의 왕들인 프리드.. 더보기
중세 독일의 발전 1편 - 동프랑크 왕국의 분열과 신성로마제국 중세 독일 봉건국가의 발전 1. 9세기 - 동프랑크 왕국에서 분리된 형식상의 통일 국가 독일의 역사는 프랑스, 이탈리아와 함께 프랑크 왕국의 분열이라는 역사적 상황에서 출발합니다. 베르됭-메르센 조약으로 프랑크 왕국이 분열된 후 독일지방은 동프랑크 왕국으로서 수많은 소국들이 난립한 후진국이었습니다. 특히 이 지역은 프랑스(과거 로마의 갈리아 지방)와 달리 로마 문화에도 속하지 않은 변방이었고, 프랑크 왕국의 중심지도 아니였습니다. 이곳은 로마의 행정제도도 볼 수 없고, 영주제도 미약한 말 그대로 어리버리한(?) 지역이었죠. 단순히 족장 수준의 귀족과 대대로 농사를 짓고 살아온 자영농이 거주하는 자유 지역이었습니다. 9세기 이후 프랑크 왕국의 핏줄로 내려오던 카롤링거 왕조가 약해지자, 각 지역을 다스리는 .. 더보기
11-14c 중세사 : 중세 시대 도시가 발달하기 시작하다. 11-14c 중세사 : 중세 시대 도시가 발달하기 시작하다. 이번 포스트에서는 전 포스트와 연결되는 내용으로, 상업발달로 인한 도시 경제의 활성화와 이것이 14-15세기에 미치는 영향을 간단히 정리해 보겠습니다. 1. 도시가 생겨나다 도시가 출연하게 된 배경은 11세기 이후 노르만, 마자르, 이슬람과 같은 외부 세력이 유럽에서 물러난 뒤 중세 정치, 경제가 안정되었기 때문입니다. 정치, 경제의 안정은 유럽 사회의 개간, 개척 사업의 신호탄이었고, 유럽사회는 이제 생산력이 증가하고 시장이 발전하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상업이 발전 속에서 중세 도시의 발달이 촉진되는 것입니다. 중세 도시라는 것은 상인들이 모이는 거류지에서 출발합니다. 상인들은 중세 장원, 장원의 교회, 교회의 교구, 영주의 성곽 등에서 머물.. 더보기
십자군 전쟁의 배경 : 십자군 전쟁은 교황이 애초 기획한 프로젝트 사업이였다. 십자군 전쟁이 시작되다. 십자군 전쟁은 11세기부터 거의 200년간에 걸쳐 서유럽 세계와 이슬람 세계가 정면으로 충돌하였던 사건입니다. 이 사건의 배경을 이번 장에서 다루어 보겠습니다. 1. 왜 십자군 원정을 해야 했는가? 십자군 원정을 유럽이 강행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사항은 유럽인의 때문입니다. 서유럽은 11세기 이전에는 주변 아프리카, 서아시아, 중앙아시아에 비해 너무나 후진지역이었습니다. 5세기 이후 게르만의 침입으로 서로마가 망하면서 성립한 중세는, 9세기 이후 남으로는 이슬람 제국의 침입으로 지중해와 남부 유럽을 잃었고, 북으로는 노르만족(바이킹)의 침입으로 홍역을 치루었으며, 동으로는 마자르족과 흉노족 등 아시아계 민족의 준동으로 전혀 힘을 쓰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거기에 중심을 잡아.. 더보기
중세유럽사4 - 샤를마뉴(카롤루스, 카알) 대제 시대의 프랑크 왕국 샤를마뉴 대제(카롤루스 대제, 카알 대제) 1. 광대한 영토 확장 사업 샤를마뉴 대제는 피핀의 아들입니다. 그는 피핀이 교황령을 분배하여 적극적인 교황 옹호자가 되었고, 교황의 지지를 바탕으로 서유럽 정복사업을 추진하였습니다. 그는 정복전쟁에 성직자를 동반하였습니다. 그것은 민심을 수습하는 동시에, 정복지에 새로운 교구를 설치하는 작업을 하기 위함입니다. 로마 제국이 제국의 행정구역과 교회의 교구를 일치시켰던 것과 같은 맥락이네요. 또 국경에는 변경주라는 것을 설치하여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국경을 경계하고 서유럽을 크리스트교의 전초기지로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샤를마뉴는 우선 교황령을 위협하는 롬바르드족을 완전 소멸시키고, 북으로는 섹슨족을 정벌하여 카톨릭으로 개종시킵니다. 동쪽으로는 엘베강 유역으로 진출하..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