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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풀이/역사 사료와 데이터

계곡선생집 - 장유 - 내가 상투를 틀면서 문필에 종사하였는데 지금 벌써 머리가 희끗희끗해지고 있다. 세상에서는 문인들이 많이 뻐기면서 혼자 좋아하고 있다고 일컫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실제로 다듬어지지 않고 촌스럽기 때문에 작품이 한 편 이루어질 때마다 사람들이 혹 잘못 칭찬하기라도 하면 찬찬히 옛사람들의 작품과 비교해 보고는 너무도 불만족스러워 멍해지지 않는 때가 없으니 그야말로 조금 잘 되었다고 자만하는 것[臨深以爲高]은 원래 나의 뜻이 아니다. 어렸을 때 지은 것은 어른이 되고 나서 문득 불태워 버렸고, 중년에 잡고(雜稿)와 시문(詩文) 약간 권을 직접 뽑아 두었었다. 그런데 10여 년을 지나 다시 문형(文衡)으로 있으면서 지은 것들이 또 몇 배나 되기에 글은 계유년(1633 인조 11) 이전의 것을 취하고 시는 갑술년.. 더보기
계곡선생집 서 - 이식 - 세상에는 영특하고 순수하고 총명하고 예지에 넘치는 자질의 소유자가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여기에 다시 후천적으로 크고 넓으며 공명정대한 학문을 닦아야 한다. 그런 뒤에야 문사(文詞)로 발현이 될 때 마치 흰 비단 위에 붉은 색칠을 하듯 샘 물줄기가 못에 흘러 들어오듯 본말(本末)이 서로 응하고 화실(華實)이 부합하여 좋은 글을 만들려 하지 않아도 자연히 좋은 글이 되는 것이다. 옛적에 성현(聖賢)들이 모범이 될 만한 의견을 세워 후세에 드리운 것도 모두 이 도(道)에 입각한 것이었다. 이 도를 벗어나 글을 지을 경우에는 비록 이상야릇하게 지어 옛맛이 나게 하고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화려하게 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편패(偏?)나 윤통(閏統 비정통)에 비유될 수 있을 뿐 전체(全體)나 정종(正宗)이라고 말할 수.. 더보기
계곡선생집 서 - 김상헌 - 동쪽 나라의 풍속이 대국(大國)에 알려진 것은 오래 전부터의 일이고 은(殷) 나라 태사(太師 기자(箕子))가 문교(文敎)를 일으키기 시작한 지도 천여 년이 지났는데 그동안 유림(儒林)과 문원(文苑)을 조금도 볼 수 없었던 것은 어찌된 연고인가. 신라(新羅) 이후로 중국에 유학하는 인사들이 점점 많아졌지만 오직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이 세상에 이름을 날렸고, 고려(高麗) 때에는 느지막하게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나왔는데 그의 깊고 넓은 학식은 능히 겨룰 자가 없었다. 이렇게 본다면 글로 기예를 떨친다는 것도 어려운 일이라 하겠다. 그러다가 아조(我朝)에 들어와서는 문운(文運)이 옛날에 비해 훨씬 융성해지고 문장에 종사하는 인사들이 손가락을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나왔지만 그 사이에 성대하게 대가(大.. 더보기
계곡선생집 서 - 이명한 - 덕이 있는 자는 반드시 말을 남기게 마련이지만 말을 남겼다고 해서 그가 꼭 덕이 있는 자라고는 할 수가 없으니, 이는 말이란 덕에 비해 한 자리 아래에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말은 곧 글이니 일단 글을 갖춘 데다가 덕까지 구비하고 있다면 정사(政事)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성문(聖門)의 4과(四科 덕행(德行), 언어(言語), 정사(政事), 문학(文學))도 여기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최상의 것은 덕을 세우는 것[立德]이요 그 다음은 공을 세우는 것[立功]이요 그 다음은 말을 세우는 것[立言]이다.’고 하였는데, 공이란 정사(政事)를 미루어 한 말이니, 그렇다면 말하는 방법이 틀리긴 해도 그 뜻은 4과와 매한가지인 것이다. 그런데 최상의 것이야 놔두고 논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말을 세우고 공을 세우는 .. 더보기
계곡선생집 서, 박미 고(故) 계곡(谿谷) 장 상군 지국(張相君持國)은 어린 나이에 아비를 여의고 자라나 겨우 15세 소년 때에 이미 사부(詞賦)로 이름을 떨쳐 한 시대를 떠들썩하게 하였다. 이에 여러 어른들과 선배들이 다투어 초대하고 칭찬들을 하였으며 다른 집 자제들은 물론 선비들까지도 잇따라 찾아와 마치 난봉(鸞鳳)을 대하는 것처럼 그의 자태를 한번 보려고 하였다. 그러고는 하룻동안이나마 기쁨을 만끽하고 그와 교유하는 인사들의 말석에라도 끼이고 싶어하면서 오직 자기들을 무디고 거칠다 하여 내치지 않을까 걱정들을 하였는데, 공은 온화함이 감도는 분위기 속에서 자신을 단속하며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더듬거릴 따름이었다. 그러다가 과거 시험장에 들어가서는 반걸음도 자리에서 떠나지 않은 채 계속 질문하러 오는 자들을 .. 더보기
경세유표 - 방례초본 인 - 여기에 논한 것은 법이다. 법이면서 명칭을 예라 한 것은 무엇인가? 선왕(先王)은 예로써 나라를 다스렸고, 백성을 지도하였다. 그런데 예가 쇠해지자 법이라는 명칭이 생겼다. 법은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며, 백성을 지도하는 것도 아니다. 천리에 비추어서 합당하고 인정에 시행해도 화합한 것을 예라 하며, 위엄으로 겁나게 하고 협박으로 시름하게 하여 이 백성들이 벌벌 떨며 감히 범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을 법이라 이른다. 선왕은 예로써 법을 삼았고, 후왕(後王)은 법으로써 법을 삼았으니, 이것이 같지 않음이다. 주공(周公)이 주(周) 나라를 경영할 때에 낙읍(洛邑)에 있으면서 법 여섯 편(篇)을 제정하고 예[周禮]라 이름하였다. 그것이 예가 아니었으면 주공이 어찌 예라 일컬었겠는가. 세속에, 당우(唐虞)시대.. 더보기
경세유표 - 방례서문 서 옛날 성왕(聖王)은 천하를 다스리면서 백성들은 욕심이 있다는 것을 알았는데, 그 욕심을 고르지 않으면 반드시 어지럽게 되는 까닭에 예(禮)로써 조절하였으며, 그 욕심을 징계하지 않으면 반드시 어지럽게 되는 까닭에 법으로써 제어하였다. 조절함은 방탕하게 됨을 막는 것이요, 제어함은 그 지나치고 과람하게 됨을 방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절, 제어하는 것은 모두 천칙(天則)의 본연에 따른 것이고 사람의 사사로 할 수 없는 것이다. 진실로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이라면 곧 음일(淫佚)해질까 두려운 것이니, 어찌 예와 법을 할 수 있겠는가? 《서경(書經)》에, “하늘이 오륜(五倫)을 서(敍)하여 법을 두고, 하늘이 등급을 질(秩)하여 예(禮)를 두었다.” 하였다. 질서의 근본은 함께 하늘에서 나온 것이니, 질.. 더보기
다산 정약용 연보 1762년(영조 38, 1세)6월 16일 사시(巳時) 광주군 초부면 마현리(지금의 양주군 와부면 능내리)에서 4남 1녀 가운데 4남으로 출생했다. 본관은 압해(押海)로, 압해는 나주의 속현이므로 나주 정씨라고도 한다.관명(冠名)은 약용(若鏞), 자는 미용(美鏞)ㆍ송보(頌甫), 호는 사암(俟菴)ㆍ다산(茶山)이다. 다산은 사도세자의 변고로 시파에 가담하였다가 벼슬을 잃은 부친 정재원(丁載遠)이 귀향할 때 출생하였기 때문에 자를 귀농(歸農)이라고도 했다. 1763년(영조 39, 2세) 완두창(豌豆瘡)을 앓았다. 1765년(영조 41, 4세)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1767년(영조 43, 6세) 부친인 정재원이 연천현감으로 부임하자 그곳에 따라가 부친의 교육을 받았다. 1768년(영조 44, 7세) 오언시를..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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