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즈풀이 썸네일형 리스트형 경덕왕 대에 안민가를 지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 경덕왕 대 안민가를 지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 1. 안민가의 내용 임금은 아버지요, 신하는 사랑하실 어머니요, 백성은 어리석은 아이라 하실지면 백성은 그 사랑을 알리라 꾸물거리며 사는 물생들 이를 다 먹여 다스린다 이 땅을 버리고 어디 가랴 할지면 나라 안이 유지됨을 아리이다 아아! 임금답게 신하답게 박성답게 할지면 나라 안이 태평하리라. 삼국유사 권 2 경덕왕 충담사 표훈대덕 ---------------------------------------- 사료해석 : 안민가를 경덕왕 대 지은 내용은 신라 사회가 점차 문란해졌기 때문입니다. 신라 중기 전제 왕권 확립 과정에서 신라의 강력한 왕인 신문왕, 성덕왕, 경덕왕 등의 전제적 성향의 왕들은 점차지지세력이었던 진골계 귀족들의 일부마저 내치기 시작합니다. 이것.. 더보기 김유신계 후손 진골들도 점차 정권에서 소외되었다. 김유신의 후손들도 정권에서 소외되기 시작하였다. 김유신의 적손 윤중은 성덕대왕에 벼슬하여 대아찬이 되고 여러번 은호를 입었는데, 왕의 친속들이 질투를 심하게 하였다. 때는 중추 보름날, 성덕왕이 월성 잠두에 올라 경치를 바라보면서 시종관들과 함께 주연을 베풀고 즐기면서 윤중을 부르라 하였다. 그 때 누군가 간하였다. [ 지금 종실과 척리들 가운데 어찌 좋은 사람이 없어 소원한 신하를 부르십니까? 또 어찌 친친(가까운 친척과 친해야 하는 예절)의 경우에 맞다 하겠습니까? ] 왕이 대답하였다. [지금 과인이 경들과 더불어 평안하게 지내는 것은 윤중 조부의 덕이다. 만을 공의 말고 같이 하여 잊어 버린다면, 선한 이에게 잘해주어 자손에게 미치게 하는 의리에 어긋나는 것이다] 삼국사기 권 42 열전 2 김유신 .. 더보기 김흥돌의 난과 관련된 사료 김춘추가 진골계통으로 즉위했다면, 어떤 계통인가? 신문왕 즉위년 8월 16일에 왕은 교서를 내리어 가로되, '공이 있는 자에게 상을 주는 것은 옛 성인에 좋은 규정이요, 죄 있는 자에게 벌을 주는 것은 선왕의 아름다운 법이다. 과인이 조그만 몸과 적은 덕을 가지고 큰 기업을 승수하여, 식사도 폐하면서 또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자면서 신하와 더불어 국가를 편안케 하려 노력하는데, 상중에 난이 서울에서 일어날 줄을 뉘 생각하였으랴? 적괴인 흠돌, 홍원 등은 그 벼슬이 재능으로 높아간 것도 사실상 왕의은혜로 올라간 것이지만, 시종을 삼가거나 부귀를 보전치 못하고 불인과 불의로 위복을 작하고 관료를 모만하고 상하를 속고 포악한 마음을 드러내어 흉사한 자를 불러들이고 근수와 교결하여 화가 내외에 통하고 같은 악인들.. 더보기 김춘추가 진골계통으로 즉위했다면, 어떤 계통인가? 김춘추가 진골계통으로 즉위했다면, 어떤 계통인가? 보통 역사에서는 김춘추의 즉위를 놓고, 성골계통에서 진골계통으로 왕위가 이전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김춘추 계통의 진골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성골과 진골이라는 역사적 용어는 이전에 자세히 정리한 적이 있으므로 여기서는 김춘추를 중심으로 성골과 진골 개념을 정리해보죠. 1. 진흥왕 시기 진골의 성립 진골이라는 새로운 계급이 신라 사회에 성립된 것은 보통 진흥왕 때라고 보고 있습니다. 신라 진흥왕은 정복군주로서, 고구려와 백제를 공격하여 영토를 넓혔으며, 불교교단, 화랑도 정비를 통해 국가체제를 국가체제로 전환시킨 역사의 전환점을 마련한 왕입니다. 진흥왕은 이전 왕들이 각 소속 부족들과 를 내리던 관례도 없애고, 왕 혼자 단독하교를 내리.. 더보기 삼국통일 후 민족융합정책 삼국통일 후 민족 통일 정책과 삼한 일통의식의 표현 문무왕이 고구려의 반란 무리들을 받아들이고, 또 백제의 옛 땅을 점거하여 관인을 보내 지키게 하니, 당 고종이 크게 노하여 왕의 관작을 박탈하고, 당시에 당의 경사(京師)에 있던 왕의 아우 우요위원외대장군임해군공(右饒衛員外大將軍臨海郡公) 인문(仁問)을 세워 신라왕으로 삼아 귀국하게 하고, 좌서자동중서문하삼품(左庶子同中書門下三品) 유인궤(劉仁軌)로 계림도대총관(鷄林道大摠管)을 삼고, 위위경(衛尉卿) 이필(李弼)과 우령군대장군(右領軍大將軍) 이근행(李謹行)으로 부관을 삼아 군사를 발하여 신라를 토벌하게 하였다. (《三國史記》7, 新羅本紀7 文武王 14年) 처음에 신라는 고구려·신라와 경계가 들쭉날쭉 혼란하여 혹은 서로 화친하고 혹은 서로 노략질하였는데, 나.. 더보기 김유신과 신령한 산신 김유신과 삼국통일의 의지 공은 나이 15세에 화랑이 되었는데, 당시 사람들이 기꺼이 따랐으니, 그 무리를 용화향도라고 부른다. 진평왕 건복 28년 신미에 공은 나이 17세로 고구려, 백제, 말갈이 국경을 침범하는 것을 보고 의분에 넘쳐, 침략한 적을 평정할 뜻을 품고 홀로 중악 석굴에 들어가 재계하고 하늘에 고하여 맹세하였다. [적국이 무도하여 승냥이와 범처럼 우리 강토를 어지럽게 하니 평안한 해가 거의 없습니다. 저는 한낱 미미한 신하로 재주와 힘은 헤아리지 않고 화란을 없애고자 하오니 하늘께서는 굽어 살피시어 저에게 수단을 빌려주십시오!] 머문지 나흘이 되는 날 문든 거친 털옷을 입은 한 노인이 나타나 말하였다. [이곳은 독충과 맹수가 많아 무서운 곳인데, 귀하게 생긴 소녕이 여기에 와서 혼자 있음은.. 더보기 고구려 부흥운동 사료 고구려의 부흥운동 사료 3월에 사찬 설오유가 고구려 태대형 고연무와 각각 정병 1만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옥골에 이르렀는데, 말갈병이 먼저 개돈양에 와서 기다렸다. 4월 4일 말갈과 마주 싸워 아군이 크게 이기고 목을 밴 것이 이러 셀수 없었으며 당병이 계속 이르니 아군은 백성에 물러났다. 고구려 수림성(水臨城) 사람인 검모잠(劍牟岑) 대형(大兄)이 유민(遺民)을 수습하여 궁모성(窮牟城)으로부터 패강(浿江)의 남쪽에 이르러 당의 관리와 승려인 법안(法安) 등을 죽이고 신라로 향하여 서해 사야도(史冶島)에 이르러 고구려 대신 연정토(淵淨土)의 아들 안승(安勝)을 만나 한성으로 맞아들여 임금을 삼고 소형(小兄) 다식(多式) 등을 신라에 보내어 호소하였다. … 그리하여 신라의 문무왕은 그들을 나라 서쪽의 .. 더보기 취리산의 회맹 사료 취리산의 회맹 문무왕이 당나라 칙사 유인원과 웅진도독 부여룽과 더불어 웅진 취리산(공주 연미산)에서 화친을 맹약하였다. 당 고종이 부여륭에게 명하여 본국에 돌아가 나머지 무리를무마하는 한편 신라와 화친하게 하였다. 이 때 백마를 희생으로 삼아 서맹을 약속했는데, 천지의 신과 천곡의 신에게 제사하고 피를 입술에 발랐다. 삼국사기 권 6, 신라본기 6 문무왕 5년(665) ------------------------------------------------------------------------------------- 사료해석 : 백제 부흥운동을 진압하면서 당나라는 자신들의 인질인 부여의 왕자 률을 웅진 도독에 임명하였습니다. 이것은 신라의 백제 포용정책을 적극 견재하면서 당나라가 백제의 지배권을 가지.. 더보기 백제 부흥운동의 진압 - 흑치상지, 사타상여, 지수신 지수신과 흑치상지의 부흥운동 이에 손인사와 유인원, 김법민(문무왕)이 육군을 이끌고 나가 유인궤, 두상, 부여륭과 웅진백강에서 합류하였다. 백강 입구에서 왜인을 만나 네 번을 싸워 다 이겨 100척을 불태우고 바닷물을 붉게 물들였다. 부여풍은 탈출하여 달아나고 거짓 왕자 부여층승과 충지 등은 무리를 이끌고 왜인과 함께 항복했다. 우두머리 장수 지수신만은 임존성에 거하여 함락시키지 못했다. 이에 앞서 소정방이 백제를 깨뜨렸을 때, 우두머리 사타상여와 흑치상지가 흩어져 험한 곳에 의거하여 복신과 호응하였는데, 모두 항복하였다. 지수신도 결국 처자를 거느리고 고구려로 달아나니 백제의 나머지 무리가 모두 평정되었다. 손인사 등은 귀국하고, 유인궤는 조칙에 따라 군대를 통수하고 머물러 지켰다. 신당서 권 108 .. 더보기 백제 부흥운동에 대한 신라의 진압 사료 백제 부흥운동에 대한 신라의 진압 사료 백제의 잔적이 사비성을 공격하므로 왕이 이찬 품일을 대당장군에 임명하고 잡찬 문왕과 대아찬 양도, 아찬 충상 등으로 하여금 품일을 돕게 하였으며, 잡찬 문충을 상주장군에 임명하고 아찬 진옹으로 돕게 하였다. 그리고 아찬 의복을 하주장군, 무염, 욱천 등을 남천대감에, 문품을 서당장군, 의광을 낭당장군에 임명하여 사비성을 구하게 하였다. 삼국사기 권 5 신라 본기 5 태종무열왕 8년 2월조(661) 상주장군 품일은 군사를 이끌고 우술성을 쳐서 적의 머리 1000급을 베니 백제의 달솔 조복과 은솔 파가는 무리와 함께 항복하였다. 그리하여 조복에게는 급찬의 벼슬을 내려 고타야군 태수로 삼고, 파가에게도 아찬의 벼슬을 내리고 전택의 의물을 내리었다. 삼국사기 권 6 신라본.. 더보기 이전 1 ··· 163 164 165 166 167 168 169 ··· 220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