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즈풀이 썸네일형 리스트형 백제 부흥운동의 실패 사료 백제 부흥운동 - 내분에 의한 부흥운동의 실패 사료 복신 등은 진현성이 강에 바짝 닿아 잇는 데다 높고 험하여 요충지라 하여 군사를 증원하여 지켰다. 유인원이 이에 증원군을 주청하니, 조서를 내려 치, 청, 래, 해주(중국 지명임)의 군사 7000명을 징발하여 좌위위장군 손인사를 파견하여 무리를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웅진으로 가서 유인원을 도와주게 하였다. 이 때 복신은 벌써 병권을 모두 장악하여 부여풍과 점점 시기하여 사이가 나빠지던 터였다. 복신은 병을 핑계로 굴방에 누워서 부여풍이 문병 오기를 기다려 덮쳐 죽일 것을 계획하였다. 부여풍은 이를 알아차리고 오히려 심복들을 거느리고 가서 복신을 덮쳐 죽이고, 고구려와 왜국에 사자를 보내어 구원병을 청하여 관군을 막았다. 구당서 권 199상, 열전 149상.. 더보기 복신과 도침의 백제 부흥운동 백제 부흥운동 - 복신과 도침에 대한 사료 백제 승려인 도침과 옛 장수인 복신은 무리를 거느리고 주류성을 거점을 반란을일으켰다. 그리고 왜국에 사신을 보내어 옛 왕주 부여풍을 맞이하여 왕으로 세우니, 서부와 북부가 모두 성을 들어 호응하였다. 이 때 낭장 유인원은 백제의 부성(사비성)에 머물러 있었는데 도침 등이 군사를 이끌고 포위하였다. 대방주자사 유인궤가 왕문도를 대신하여 무리를 거느리고 지름길로 신라병을 출동시켜 합세하여 유인원을 구원하고 계속하여 싸우니, 이르는 곳마다 항복하였다. 도침 등이 웅진강(공주 앞 금강) 어귀에 책 두 개를 세워 관군에게 저항하자 유인궤는 신라병과 함께 사방에서 협공하였다. 적들은 후퇴하여 책 안으로 달아났지만, 물에 막히고 다리는 좁아 물에 빠지거나 전사한 사람이 1만.. 더보기 백제 멸명 후 백제 부흥운동 사료 백제 멸망후 백제 부홍운동 사료 8월 2일에 백제의 나머지 무리가 남잠, 정현 등지에 웅거하였는데, 좌평 정무가 무리를모아 두시원악(충남 청양)에 주둔하여 당, 신라인을 공격하여 약탈하였다. 26일에는 임존(충남예산 위치)의 목책을 공격하였으나 적병이 많고 지리가 험하여 이기지 못하고 다만 소책을 깨뜨리는데 그쳤다. 9월 3일 낭장 유인원으로 하여금 당나라 병사 1만인을 거느리고 사비성을 머물러 지키게 하고 신라 왕자 인태와 사찬 일원, 그리고 급찬 길나 등으로 하여금 신라 병사 7000인을 거느리고 보좌하게 하고, 소정방은 백제왕과 왕족, 신료 등 93인과 인민 12000인을 거느리고 사비에서 배를 타고 당나라로 돌아갔다. 23일에는 백제의 남은 무리가 사비에 들어와 항복한 백제 사람들을 노력하려 하매.. 더보기 김춘추의 초기 외교와 구토지설(토끼와 거북이 이야기) 김춘추의 초기 미숙한 외교와 구토지설 춘추가 훈신 사간과 함께 고구려에 사절로 가는데 대매현에 이르니 고을 사람인두사지 사간이 청포 300보를 주었다. 고구려의 지경 안으로 들어가니 고구려왕이 태대대로 개금을 보내어 맞아 객관을 정해주고 잔치를 베풀어 우대하였다. 누가 고구려 왕에게 고하기를 [신라 사자는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이번에 온 것은 우리 형세를 살펴보려는 것이오니 왕은 도모하시어 후환을 없애소서] 라고 하였다. 왕은 무리한 질문을 하여 춘추가 대답하기 어렵게 하여 욕을 보이려고 일러 말하기를, [마목현과 죽령은 본래 우리 땅이니 돌려주지 않으면 돌아갈 수 없다]라고 하였다. 춘추가 대답하기를, [국가의 토지는 신하된 사람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은 감히 명령을 따를 수가 없.. 더보기 김춘추의 대당 외교와 외교적 전환점 김춘추의 대당 외교 정관(貞觀) 22년(진덕여왕 2년; 648년)에 진덕(眞德)이 그의 아우인 국상(國相) 이찬간(伊贊干) 김춘추(金春秋)와 그 아들 문왕(文王)을 보내와 조근(朝覲)하였다. 태종이 광록경 유형을 시켜 교외에서 춘추를 위로해 맞게 하였다. 춘추가 도착하자 태종은 춘추의 거동이 법도가 있는 데다 영특하고 뛰어남을보고 후히 대접하였다. 춘추가 국학에 나아가 석정과 강론을 참관하기를 청하니 태종이 이를 허락하고 자기가 지은 온탕비, 진사비와 새로 찬술한 진서를 주었다. 또 직접 춘추를 불러 한가로이 만나보고 금백을 후히 주며 [경은 마음에 깊이 품은 바가 있는가?]고 물었다. 춘추가 꿇어앉아 말하기를, [신의 나라는 바다 한구석에 치우쳐 있으면서도 천조를 섬겨온 지 이미 여러 해입니다. 그런데.. 더보기 김춘추의 왕위 계승 과정 - 진골왕계의 탄생 김춘추의 즉위 배경에 대한 사료 진덕여왕이 돌아가자 뭇 신하들이 알천 이찬에게 섭정을 청하였다. 알천은 짐짓 사양하면서 말하였다. [나는 나이 늙고 이렇다 할 만한 덕행도 없다. 지금 덕망이 높기는 춘추공만한 이가 없으니 실조 제세의 영웅이라고 할 수 있다] 고 하였다. 군신이 드디어 춘추를 추대하여 왕을 삼으니 춘추는 재삼 사양하다가 마지못하여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 권 22, 고구려본기 10 보장왕 하, 보장왕 25년 ------------------------------------------------------------------------------------- 사료해석 : 이 사료는 선덕여왕기 이후 성골계 귀족들이 점차 소멸되면서 새로운 진골계 세력이 대두함을 보여줍니다. 선덕여왕은 [여자.. 더보기 김유신을 유인하려 한 백석의 계책 김유신을 유인하려는 백석의 계책 유신공은 진평왕 17년 을묘년에 태어났다. 유신공은 7요(북두성 : 해,달,화,수,목,금,토)의 정기를 타고났으므로 등에 칠성의 무늬가 있고, 신기하거나 이상한 일이 많았다. 나이 18세 되던 임신년에 검술을 닦아 화랑 국선이 되었다. 이 때 백석이라는자가 있어 어디서 온지는 모르나 여러 해 동안 낭도 중에 속해 있었다. 낭은 고구려와 백제를 정벌하는 일로 밤낮으로 깊이 도모하였은데 백석이 그 도모함을 알고 낭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제가 공과 더불어 몰래 저들을 염탐하고 싶사옵니다. 그런 뒤에 도모하는 거이 어떠실는지요]라 하였다. 낭이 기뻐하여 친히 백석을 데리고 밤에 떠나 고개 위에서 막 쉴 때 두 여자가 나타나 낭을 따라왔다. 골화천(영천)에 이르러 유숙하매, 또 .. 더보기 김춘추의 정치적 위기와 성급한 외교 김춘추의 정치젹 위기와 성급한 외교 선덕여왕 11년 7월에 백제 의자왕이 군사를 크게 일으켜 나라 서쪽의 성 40여개를 탈취하였다. 8월에 또 고구려와 공모하여 당항성을 취하여 당나라로 통하는 길을 끊으려 하였다. 이에 왕이 사신을 보내어 당태종에게 급한 사정을 고하였다. 이달에 백제 장군 윤충이 군사ㅡㄹ 거느리고 와서 대야성을 공격해 빼앗아가니 도독 아찬 품석과 사지 죽죽, 용석 등이 전사하였다. 겨울에 왕이 백제를 쳐서 대야의 일을 보복하려 하여, 이찬 김춘추를 고구려에 보내 군사를 청하였다. 처음 대야에서 패할 때 도독 품석의 처도 죽었는데 춘추의 딸이었다. 춘추가 듣고 기둥에 기대어 서서 종일토록 눈을 깜짝이지 않고 사람이나 물건이 그 앞을 지나가도 알지 못하더니 얼마 뒤에 말하기를, [슬프다. .. 더보기 고구려의 멸망과 남생, 남건, 남산의 내분 남생과 고구려의 멸망 연개소문이 죽자 맏아들 남생이 막리지가 되어 처음 국정을 맡으면서 여러 성을 순행하기 위해, 아우 남건과 남산에게 남아서 뒷일을 맡게 하였다. 어떤 사람이 두 아우에게 말하기를, [낭생이 두 아우가 핍박하는 것을 싫어하여 제거하려고 마음먹었으니 먼저 계략을 세우는 것이 낫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두 아우는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또 어떤 사람이 남생에게 고하기를, [두 아우는 형이 권력을 도로 빼앗을까 두려워, 형에게 거역하여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고 합니다.] 고 하였다. 남생은 친한 사람을 몰래 평양으로 보내 아우들을 살피게 하였는데, 두 아우가 덮쳐 붙잡았다. 이리하여 왕명으로 남생을 불러들였으나, 남생은 감히 돌아오지 못하였다. 남건이 혼자 힘으로 막리지가 되어 군사를 내어 남.. 더보기 백제 멸망에 대한 사료 백제 멸망에 관한 사료 3월에 당 고종(高宗)이 좌무위대장군(左武衛大將軍) 소정방(蘇定方)으로 신구도행군대총관(神丘道行軍大摠管)을 삼고 김인문(金仁問)으로 부대총관(副大摠管)을 삼아, 좌요위장군(左饒衛將軍) 유백영(劉伯英) 등 수군과 육군 30만명을 거느리고 가서 백제를 치게하고, 왕(무열왕)으로 우이도행군총관(?夷道行軍摠管)을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응원하게 하였다. 5월 26일에 왕이 유신, 진주, 천존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서울을 출발하여 6월 18일에 남천장에 다다랐다. 소정방은 내주에서 출발하니 전함이 천리에 뻗쳤는데 동쪽을 향하여 순류를 타고 내려왔다. 21일에 왕이 태자 법민(法敏)으로 병선 백척을 이끌고 덕물도(德物島)에서 정방을 맞게 했다. 정방이 법민에게 말하였다. [나는 7월.. 더보기 이전 1 ··· 164 165 166 167 168 169 170 ··· 220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