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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풀이

계백 장군과 화랑 관창의 이야기 계백장군과 화랑 관창 관창은 신라 장군 품일의 아들로 모습이 우아하였으며, 어린 나이에 화랑이 되어 사람들과 잘 사귀었다. 나이 16세에 말타고 활쏘기에 능숙하였다. 대감인 어느 사람이 태종대왕에게 관창을 천거하여 당나라 현경 5년 경신에 왕이 군대를 내어 당나라 장군과 더불어 백제를 칠 때 관창을 부장으로 삼았다. 황산 밑에 이르러 양쪽 군대가 서로 대치하자 아버지 품일이 말했다. [너는 비록 나이가 어리지만 뜻과 기개가 있으니 오늘은 바로 공명을 세워 부귀를 얻을 때다. 어찌 용맹이 없을 수 있겠느냐?] 관칭은 [알았습니다]라고 말하고는 곧바로 말에 올라 창을 비껴들고 적진에 곧바로 진격하였다. 망을 달리면서 몇 사람을 죽였으나 상대편 수가 많고 이쪽은 군사가 적으므로 볼모가 되었다. 산 채로 백제 .. 더보기
계백 장군과 황산벌 전투 계백의 황산벌 전투 계백은 백제인이다. 벼슬하여 달솔이 되었다. 당나라 현경 5년 경신에 고종이 소정방을 신구도대총관으로 삼아 군대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 신라와 더불어 백제를 치게 했다. 계백은 장군이 되어 결사대 5천을 이끌고 대항하면서 말하였다. [한 나라의 군사로서 당나라와 신라의 대군을 당해내야 하니 국가의 존망을 알 수 없다. 내 처자가 포로로 잡혀 노비가 될까 염려된, 살아서 욕을 보는 것보다는 죽는 것이 통쾌하다] 마침내 가족을 모두 죽이고 말았다. 황산벌에 이르러 세 진영을 설치하고 신라 군사를 맞아 싸울 때 뭇사람에게 맹세하였다. [옛날 구천은 5천명으로 오나라 70만 군사를 물리쳤다. 오늘은 마땅히 각자 용기를 다하여 싸워 이겨 국가의 은혜에 보답하자.] 마침내 힘을 다하여 싸우니 한 .. 더보기
선덕여왕의 축출 선덕여왕의 축출 왕 16년 647년, 봄 정월에 비담과 염종 등이 난을 일으켰다. [여자 임금은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라고 주장하였다. 그들이 군사를 일으키니 여왕은 이기지 못하였다. 8일에 왕이 죽었다. 시호를 선덕이라 하고 낭산에 장사지냈다. 삼국사기 권 5, 신라본기, 선덕왕 16년 ------------------------------------------------------------------------------------- 사료해석 : 선덕 15년 당에 군사적 구원요청을 했으나, 선덕여왕이 실패하자 비담, 염종 등 진골계 유력 귀족들이 난을 일으켜 선덕여왕을 죽인 사료입니다. 그러나, 김춘추 등의 수습으로 다시 진덕여왕이 왕위를 계승하게 됩니다. 이 글에 대한 참조사항 1. 이 글에.. 더보기
선덕여왕의 대당 구원 요청과 여왕의 축출 선덕여왕의 대당 구원 요청 선덕여왕 12년 9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다음과 같이 같이 말하였다. [고구려와 백제가 우리나라를 여러 차례 침번하여 성 수십개를 공격하였습니다. 두 나라가 군대를 연합하여 이 성들을 기어코 빼앗으려고 9월에 크게 군사를 일으킨다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 나라 사직은 보전할 수 없을 것이므로, 삼가 신하인 저를보내 대국에 명을 받들어 올리게 되었습니다. 바라건데 약간의 군사를 내어 구원해 주십시오.] 황제가 사신에게 말하였다. [나는 너희 나라가 두 나라에게 침략받는 것을 매우 안타깝게 여겨 자주 사신을 보내 세 나라가 친하게 지내도록 하였다. 허나 고구려와 백제는 돌아서자마자 생각을 바꾸어 너희 땅을 집어삼켜 나누어 가지려고 한다. 그대 나라는 어떤 기묘한 꾀로 망하는 것을.. 더보기
6세기 말 고구려와 백제의 바람직하지 못한 대립관계 고구려와 백제의 바림직하지 않은 대립 위덕왕 45년(598) 9월, 왕은 장사 왕변나로 하여금 수나라에 들어가 조공하게 하였다. 왕은 수나라가 요동에서 전쟁을 일으킨다는 것을 듣고 사신을 보내 표를 올려 군의 길잡이가 되기를 청하였다. 황제가 조서를 내려 말하였다. {왕년에 고구려가 공물을 바치지 않고 산하로서 예가 없어 장수에게 명하여 죄를 꾸짖게 한 것이다. 그러나 고원(영영왕)의 군신들이 두려워하고 복종하여 죄를 청하기에 짐이 이미 용서하였으니 정벌할 수가 없다} 수나라는 사신을 후히 대접하여 돌려보냈다. 고구려가 이 사실을 알고 군사로써 국경에 쳐들어와 약탈하였다. 삼국사기 권 27, 백제본기, 위덕왕 45년 -------------------------------------------------.. 더보기
간략하게 정리하는 삼국통일의 과정 삼국통일의 과정 1. 6c 신라의 성장과 백제의 부흥 노력 6세기에 신라가 성장한 배경은 551년 신라의 한강 점령입니다. 신라는 나제 동맹을 통해 공동으로 고구려를 공격하여 한강유역을 탈환했음에도 불구하고, 진흥왕이 백제 성왕을 배신하여 한강을 독차지했습니다. 본래 한강의 남쪽을 보장받기로 했던 성왕은 격분한 나머지 3만의 군사를 이끌고 진흥왕을 공격하다가 관산성에서 왕이 전사하는 위기를 맞습니다. 이후 백제는 왕권이 약화되고, 연, 백, 사씨 등 8대성이 정치를 이끌어나가는 귀족체제가 됩니다. 신라는 한강유역을 차지하여 당항진에 당항성이라는 요새를 건축합니다. 이것은 곧 중국과의 직접 교통로를 확보함을 의미합니다. 신라의 한강유역 차지는 고구려, 백제로 하여금 여제동맹을 맺게 하는 결정적 원인을 제공.. 더보기
화랑도에도 파벌이 있었다. 화랑도에도 파벌이 존재하였다. 이 글은 운영자의 글이 아닙니다. 좋은 글이 있어서 퍼왔어요. 출처 : 다음 원형 대백과 사전 신라의 화랑도는 원천적으로 파가 나뉘게 되어 있었다. 사다함에게 낭도가 따랐고, 문노가 일찍이 낭도 5백 명을 거느리고 사다함을 따랐던 사실이 있다. 한마디로 화랑들이 각기 낭도를 거느렸던 것은 처음부터 화랑들을 중심으로 파가 나뉠 소지를 마련한 것이었다. 화랑도에서 파가 나뉜 것은 7세 풍월주 설화랑(설원랑) 때였다. 그 때 문노 일파가 세종을 따라 지방에서 전공을 세웠는데, 위를 얻지 못하여 설화랑에게 불복하고 일문(一門)을 스스로 세웠다. 이 때 낭도들이 나뉘었다고 한다. 설화랑의 낭도들은 운상인, 문노의 낭도는 호국선이라 한 것이 파맥이 나뉘는 출발이었다. 마침내 당파가 나.. 더보기
동아시아의 격동기 - 삼국통일부터 고려건국까지의 동아시아의 변화 동아시아의 격동기 - 삼국통일기부터 고려 건국기까지... 1. 삼국을 통일하는 시기가 오다 삼국의 통일은 6세기부터 시작되어 거의 150년 이상 지속된 대립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삼국통일에서 중요한 점음 신라의 단독 통일이 아니라 당,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 전체의 내전이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거의 200년에 이르는 동아시아 질서의 혼란이 있었고, 삼국통일은 이 혼란 속에서 당, 신라가 백제, 고구려, 왜를 물리치는 과정, 그리고 당과 신라간의 대립, 또한 백제, 고구려인들의 부흥운동과 국가 재건국 및 발해의 출현이라는 엄청난 격동기를 맞이합니다. 그러나 삼국통일이 끝난 후 각국은 서로 관계 개선이 주력하기 시작합니다. 698년 발해가 건국되면서 당과 신라는 발해 견재와 자국의 왕권강화를 목적으로 재 연.. 더보기
신항로 개척을 역사 플래시로 확인해보기 이 플래시 자료는 운영자의 자작 플래시가 아닙니다. 출처 : 부산교육청에서 만든 교육용 플래시 더보기
루터의 종교개혁 - 독일 국민의 기독교 제후에게 고함 루터의 종교개혁 - 독일국민의 기독교 제후에게 고함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93-1546), 교회의 개혁에 관하여 독일국민의 기독교제후에게 告함 (1520) 1) ... 로마敎皇派(敎皇에 충성하는 전통적 카톨릭교도)는 영리하게도 그들의 주위에 삼중의 벽을 쌓았다. 지금까지 그들은 아무도 그들을 개혁하지 못하도록 이 벽으로 스스로를 보호해왔다. 그 결과 모든 기독교세계는 비정상적으로 타락하기에 이르렀다. 첫째로, 세속권력의 압력을 받게되면 그들은 敎令(decree)을 만들어 세속권력은 그들에 대한 지배권이 없으나, 반대로 교회의 권력은 세속권력 위에 있다고 선언하였다. 둘째로, 聖書에 근거하여 그들을 책망하는 시도가 이루어지기라도 하면, 그들은 이를 거부하며 오직 교황만이 聖書를 해석할..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