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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풀이

신라 내물 마립간기의 발전 마립간 시대의 발전 내물이사금 26년(381)에 위두를 부진에 보내 특산물을 전하였다. 부견이 위두에게 라고 물었다. 대답하기를 라고 말하였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 - 내물 이사금 37년 (392) 정월에 고구려에서 사신을 보내오니 왕은 고구려가 강성한 까닭으로 이찬 대서지의 아들 실성을 보내 볼모로 삼았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 - 부견과의 대화는 신라가 이제 점차 예전과 달리 국왕이 위상을 가지고 있는 국가로 발전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료입니다. 이제 대군장이라는 칭호를 쓰면서, 경주평야를 벗어나 낙동강 하류까지 진출하게 되며, 김씨가 왕위 세습을 하는 보다 진화된 국가체계를 마련하는 것을 보여주는 사료입니다. 더보기
신라 나해 이사금 이사금 시대의 발전 나해 이사금 14년(209) 7월에 포상팔국이 가라를 침략하려 하니, 가라왕자가 신라에 와서 구원을 청하였다. 왕이 태자 우로와 이벌찬 이음에게 명하여 6부 병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게 하여 8국의 장군을 쳐죽이고 그들이 노략질한 6천여인을 빼앗아 돌려보내 주었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 - 더보기
신라 이사금 시대의 발전 이사금 시대의 발전 조분 이사금 년(231) 7월에 이찬 우로를 대장군으로 삼아 감문국을 쳐서 깨뜨리게 하여 그 땅을 군으로 삼았다. 7년(26)에는 골벌국 왕 아음부가 무리를 거느리고 항복해 오자, 저택과 전장을 주어 살게 하고, 그곳을 군으로 삼았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 조분이사금 - 더보기
신라 이사금과 김수로 이사금 시대의 발전 음즙벌국이 실직곡구과 더불어 땅을 다투다가 왕(신라 파사이사금)에게 와서 결정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왕이 이를 난처히 여겨, 금관국의 수로왕이 연세도 많고 식견도 깊이니 불러 물어보자고 하였다. 수로가 논의하여 그 땅을 음즙벌국에 속하게 하였다. 이에 왕이 6부에 명하여 수로왕에게 향연을 베풀게 하였는데, 다섯 부에서는 모두 이찬을 주로 삼았으나 한기부만이 지위가 낮은 자를 주로 삼았다. 수로왕은 노하였다. 노비인 탐하리에게 시켜 한기부주 보제를 죽이고 돌아갔다. 노비는 도망하여 음즙벌주 타추간의 집에 숨었다. 이사금이 사람을 시켜 노를 찾아오라 하였는데, 타추가 이를 보내주자 않자 군사를 일으켰다. 파사이사금 23년(102) 8월, 왕이 노하여 군사를 일으켜 음즙벌국을 치니 그 왕.. 더보기
남당 남 당 봄과 여름에 비가 오지 않자 왕이 남당에 군신을 모으고 몸소 정사와 헝벌의 득실을 묻고 또 다섯 사지를 파견하여 백성의 고충을 살폈다. - 삼국사기 권 2, 신라본기 2, 미추 이사금 7년 - 정월 초길에 왕이 남당에 앉아 정사를 보았다. - 삼국사기 권 24, 백제본기 2, 고이왕 28년 - 사료해석 : 남당은 부체제의 초기 국가 속에서도 국왕이 어느 정도 지위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료입니다. 즉, 국왕은 공식적으로는 최고의 지위자로서 위치를 가지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예로 고구려는 독자적 가신을 거느릴 수 있음에도 가신들 명단을 국왕에게 보고해야만 했다고 하며, 국왕은 가신들의 서열을 정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신라의 국왕은 남당에서 직접 중요한 일들을 묻고 처리하는데, 이를 통해 국왕권도 .. 더보기
태종 무열왕 대 신라 율령격식의 변화 신라의 율령격식의 변화 율령을 반포하고 백관공복 제도를 처음으로 제정하였다. -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 4, 법흥왕 7년 정월 - 이방부령 양수 등에게 명하여 율령을 자세히 참작하여 이방부격 60여조를 수정하도록 하였다. - 삼국사기 권 5, 신라본기 5, 태종무열왕 원년 5월 - 2월 21일 군신을 모아놓고 교령을 내렸다. - 삼국사기 권 6, 신라본기 6, 문무왕 9년 2월 21일 - 사료해석 : 신라는 법흥왕 때 율령을 반포하였습니다. 법으로 나라를 통치하겠다는 것이죠. 그런데 통일기 무열왕은 율령을 임시 중단시키고 임시법인 격을 발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법원리를 격으로 제시하는 데 그것은 바로 고대법과는 다른 새로운 법원리였습니다. 즉 고대 8조의 법처럼 사람을 죽인 자는 죽이고, 상처를 입힌 .. 더보기
초기 신라의 중앙, 지방의 관직 신라의 중앙, 지방 관직 집사성의 전대등은 2명으로 진흥왕 26년에 두었는데 경덕왕 6년에 고쳐서 시랑이라 하였다. 나마에서 아찬까지의 관위에 있는 사람들이 이에 오른다. - 삼국사기 권 38, 잡지 7, 직관 상, 집사성 - 도독부의 사신 혹 사대등이라고도 하는데 5인이다. 진흥왕 25년에 처음 두었다. 급찬에서 파진찬까지의 관위에 있는 사람들이에 오른다. - 삼국사기 권 40, 잡지 9, 직관 하, 외관 도독 - 이찬 철부를 상대등으로 삼고 나라 일을 총괄하여 주재하도록 하였다. 상대등이라는 관명은 이로써 비롯된 것이니 지금의 재상과 같다. -삼국사기 권 4, 신라본기 4, 법흥왕 18년 4월 - 사료해석 : 교과서에 제시된 신라의 중앙, 지방 관직과 관련된 사료입니다. 더보기
가야의 멸망 가야의 멸망 법흥왕 19년 금관국주 김구해가 왕비와 세 아들, 곧 첫째 노종, 둘째 무덕 셋째 무력과 함께 국고 보물을 가지고 항복하였다. 왕은 김구해를 예로 대우하여, 상등의 위를 주고 본국을 식읍으로 삼게하였다. 진흥왕 23년(562) 9월에 가야가 반란을 일으켰다. 왕은 이사부에게 교를 내려 공격하게 하였다. 사다함은 그 부장으로 기병 5천기를 거느리고 먼저 왕궁 정문으로 달려 들어가서 백기를 세우니 성안의 사람들은 두려워 하였다. 이 때 이사부가 군사를 이끌고 나타났고, 모두 항복하였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 - 구형왕은 신라와 대적하여 싸울 수 없게 되자 동기 탈지 이질금을 보내어 나라에 머물러 있게 하고 왕자 상손 졸지공 등과 신리에 투항하였다. - 삼국유사 권 2, 기이편 하, 가락국기 - .. 더보기
후기 가야 연맹체의 전성기 후기 가야 연맹체의 전성기 계체 천황 7년(513) 6월 백제가 저미문귀 장군과 주리주이 장군을 호즈미노오미오시야마에게 딸려 오경박사 단양이를 바쳤다. 그러면서 아뢰기를, 하였다. -니혼쇼키 17, 계체기 - 사료해석 : 이 사료는 6세기 대가야의 전성기에 대가야(사료의 반파국)이 백제를 크게 무찌르고 영토를 많이 획득하였음을 보여주는 기사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가야의 확장은 신라와 백제를 자극하여 양국의 협공을 받아 가야가 망하게 되는 원인을 제공한 사건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일본 니혼쇼키는 백제의 대부분 기사를 백제 사신이 일본왕에게 애걸하는 듯한 표현으로 서술하고 있는데, 실제 그런 것인지 아니면 그런 관점으로 편찬한 것인지에 대하여 의심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더보기
후기 연맹체 가야 - 대가야 설화 후기 연맹체 대가야의 설화 가야산신 정견모주가 천신 이비가지에게 감응되어 대가야왕 뇌질주일과 금관국왕 뇌질청예 두사람을 낳았다. 뇌질주일은 이진아시왕의 별칭이고, 청예는 수로왕의 별칭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29, 고령현조 - 사료해석 : 이 사료는 후기 가야연맹체인 미오야마국(대가야)의 설화입니다. 후기 가야 연맹의 맹주국을 내세운 대가야는 자기 시조가 산신과 천신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설화를 통하여 전가 가야의 전성기 때 금관국과 미오야마국이 형제의 국가임을 알리고 새로운 맹주의 전통성을 강조하려고 내세운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후기 가야 연맹체를 복원하면서, 가야는 장수왕의 남하를 막고자 하는 신라, 백제와 모두 연합하여 하나의 세력으로 성장하려고 하였습니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