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즈풀이 썸네일형 리스트형 불국사 창건에 대한 이야기 불국사 창건 모량리(牟梁里)의 가난한 여인 경조(慶祖)에게 한 아이가 있었다. 머리가 크고 이마가 평평한 것이 꼭 성(城)과 같아 이름을 대성(大城)이라고 하였다. 집이 빈곤하여 살아갈 수가 없어 그는 부자인 복안(福安)의 집에 가서 품팔이를 하여 그 집에서 얻은 몇 이랑의 밭으로 끼니를 잇고 있었다. 어느날 점개(漸開)라는 스님이 육륜회(六輪會)라는 법회를 흥륜사(興輪寺)에서 열고자 하여 복안의 집에 와서 시주하기를 원하자 복안이 베 50필을 바쳤다. 그러자 점개가 축원해 주었다. "신도가 보시하기를 좋아하면 천신이 항상 보호하여 하나를 보시하면 만배를 얻게 되고 안락과 장수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대성이 이 말을 듣고 뛰어 들어와 어머니께 말했다. "내가 문에서 스님의 말을 들으니 하나를 보시하면 .. 더보기 문무왕과 대왕암 대왕암 - 문무왕 문무왕은 나라를 다스린 지 21년만인 영륭(永隆) 2년 신사(辛巳)에 세상을 떠났는데 유언에 따라 동해의 큰 바위 위에 장사지냈다. 왕은 평시에 항상 지의법사(智義法師)에게 말하였다. "나는 죽은 후에 나라를 지키는 큰 용이 되어 불법을 받들어서 나라를 지키려 하오" - 삼국유사 2, 기이편 2, 문무왕 - 참고글 :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대왕암은 경북 경주시 양북면(陽北面) 봉길리(奉吉里) 앞바다에 있는 신라 문무왕의 수중릉(水中陵)입니다. 삼국통일을 완수한 문무왕이 유언으로, 자신의 시신(屍身)을 불식(佛式)에 따라 고문(庫門) 밖에서 화장하여 유골을 동해에 묻으면, 용이 되어 동해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겠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유해를 동해의 대석(大石)에 .. 더보기 헌덕왕 대의 국가 위기 - 김헌창, 김범문의 난 헌덕왕 대의 위기 - 김헌창, 김범문의 난 40대 애장왕(哀莊王) 10년 7월 왕의 숙부(叔父) 언승(彦昇)이 그 아우 이찬(伊瑗) 제옹(悌邕)과 더불어 군사를 이끌고 궁안에 들어와 난을 일으켜서 왕을 시해하였다. 왕의 아우 체명(體明)도 왕을 시위(侍衛)하다가 함께 해를 입었다. (《三國史記》 10, 新羅本紀 10, 哀莊王) - 삼국사기 10, 신라본기 10, 애장왕 - [헌덕왕(憲德王)] 14년 3월, 웅천주(熊川州) 도독(都督) 헌창(憲昌)은 그 아비 주원(周元)이 앞서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을 이유로 반란을 일으켜 국호(國號)를 장안(長安)이라 하고 건원(建元)하여 경운 원년(慶雲元年)이라 하며 무진(武珍)·완산(完山)·청주(菁州)·사벌주(沙伐州) 등 4주의 도독(都督)과 국원경(國原京)·서원경(.. 더보기 원성왕의 즉위와 원성왕계의 시작 원성왕의 즉위 원성왕(元聖王)이 즉위하니 휘는 경신(敬信)으로 내물왕의 12세손이었다. 어머니는 박씨 계오부인(繼烏夫人)이며 비는 김씨 신술(神述) 각간의 딸이다. 처음에 혜공왕 말년에 반신(叛臣)들이 발호할 때 선덕(宣德)이 상대등(上大等)으로 있으면서 임금 측근의 나쁜 무리들을 제거하자고 먼저 부르짖자 경신이 참여하여 난을 평정한 공이 있었으므로 선덕이 즉위함에 이르러 그는 곧 상대등이 되었다. 선덕이 돌아가고 아들이 없었으므로 군신(群臣)이 후사(後嗣)를 의논하여 왕의 족자(族子)인 주원(周元)을 세우려고 하였다. 주원의 집은 서울 북쪽 20리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마침 큰 비가 와서 알천(閼川)의 물이 불어 주원이 건너오지 못하니 어떤 이가 말하되 "사람이 임금의 큰 자리에 즉위한다는 것은 진실로.. 더보기 선덕왕 김양상의 즉위 선덕왕의 즉위 선덕왕(宣德王)이 즉위하니 성은 김(金)씨요 휘(諱)는 양상(良相)이며 내물왕(奈勿王)의 10세손이었다. 아버지는 해찬(海瑗) 효방(孝芳)이며 어머니는 김씨 사소부인(四炤夫人)이니 성덕왕(聖德王)의 딸이다. 비(妃)는 구족부인(具足夫人)으로 각간(角干) 양품(良品)의 딸이었다. - 삼국사기 권9, 신라본기 9, 선덕왕 - 참고글 : 선덕왕은 혜공왕 대의 혼란을 진압하며 상대등계로서 즉위한 왕입니다. 선덕왕의 즉위는 무열왕의 직계가 아닌 내물계의 왕으로 등장한 것으로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하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사건입니다. 더보기 96각간의 난, 김지정의 난 96 각간의 난과 김지정의 난 혜공왕(惠恭王) 4년 7월 3일에 대공(大恭) 각간(角干)의 적도(賊徒)가 일어나자 왕도(王都) 및 5도(道)·주군(州郡)의 도합 96각간들이 서로 싸우게 되어 크게 어지러워졌다. 대공 각간의 집이 망하매 그 집에 있던 보물과 비단 등 가재(家財)를 왕궁(王宮)으로 옮겼다. 신성(新城)의 장창(長倉)이 불에 탔으므로 역당(逆黨)의 보물과 곡식 중 사량리(沙梁里)·모량리(牟梁里) 등에 있던 것을 또한 왕궁으로 실어 날랐다. 난리는 석달이 지나서야 그쳤다. - 삼국유사 기이편 2, 혜공왕 - [혜공왕 6년] 가을 8월에 대아찬(大阿瑗) 김융(金融)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복주(伏誅)되었다. …… 11년 여름 6월에 이찬(伊瑗) 김은거(金隱居)가 반란을 일으켰다가 복주되었으며, 가을.. 더보기 당나라 빈공과 출신의 6두품들 빈공과 출신의 6두품들 빈공과(賓貢科)는 매월 별시(別試)를 치러 합격자를 방(榜)의 끄트머리에 부쳤는데, 김운경(金雲卿)이 처음 합격한 이후 당말(唐末)까지 58인이었고, 5대(代)에는 32인이나 되었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은 최이정(崔利貞)· 박계업(朴季業)· 김윤부(金允夫)· 김입지(金立之)· 박양지(朴亮之)· 이동(李同)· 최영(崔靈)· 김무선(金茂先)· 양영(楊潁)· 최환(崔渙)· 최광유(崔匡裕)· 최치원(崔致遠)· 최신지(崔愼之)· 김소유(金紹游), 박인범(朴仁範)· 최승우(崔承祐) 등으로, 이들은 이름을 떨친 바 있다. (《東史綱目》5上, 眞聖女主 3年 ) - 동사강목 5권 상, 진성여주 3년 - 참고글 : 당의 빈공과 진출은 원래 신라 중기, 귀족들의 자제를 당의 볼모로서 보내면서 공부를 .. 더보기 독서삼품과 제도 독서삼품과 처음으로 독서삼품과를 정하여 출신케 하였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이나 예기(禮記)나 문선(文選)을 읽어 그 뜻을 능통하고 겸하여 논어(論語)·효경(孝經)에도 밝은 자를 상품(上品)으로 하고, 곡례(曲禮)·논어·효경을 읽은 자를 중명(中命)으로 하고, 곡례·효경을 읽은 자를 하품(下品)으로 한다. 또 혹 오경(五經)과 삼사(三史)와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책을 능히 두루 통하는 자가 있으면 특채해서 등용한다. 이전에는 궁술로써 인물을 서택하더니 이 때에 이르러 개혁하였다. - 삼국사기, 10권, 신라본기 원성왕 4년 - 참고글 : 독서삼품과는 관리를 등용할 때 유학 공부를 기준으로 그 수준을 나누어 3등급으로 나누어 시행하였던 제도입니다. 즉, 골품제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시도로서 골품보다 실.. 더보기 통일신라의 국학 제도 국학 국학(國學)을 설치하고 경(卿) 1인을 두었다. - 삼국사기 8권, 신라본기 8, 신문왕 2년 6월 - 국학(國學)은 예부(禮部)에 속한다. 신문왕(神文王) 2년에 설치하였다. … 교수하는 법은 주역(周易)·상서(尙書)·모시(毛詩)·예기(禮記)·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문선(文?BR> ?으로 나누어 학업을 닦게 하였는데, 박사(博士)나 조교(助敎) 1인이, 혹은 예기·주역·논어(論語)·효경(孝經)을 가르치고, 혹은 춘추좌전·모시·논어·효경을 가르치며, 혹은 상서·논어·효경·문선을 가르쳤다. … 혹은 산학박사(算學博士)나 조교 1인을 명해서 철경(綴經)·삼개(三開)·구장(九章)·육장(六章)을 교수케 하기도 한다. 모든 학생의 관등은 대사(大舍) 이하 무위(無位)에 이르기까지 하며, 나이는 15세에서 3.. 더보기 설총의 화왕계 화왕계 어떤 이가 화왕(모란)에게 말하였다. 화왕이 말하였다. 장부가 다가서서 말하였다. 화왕이 대답하였다. 이에 왕(신문왕)이 얼굴 빛을 바로 하며 말하였다. 라고 하고는 설총을 높은 관직에 발탁하였다. - 삼국사기, 열전 설총조 - 참고글 : 이것은 설총이 신문왕에게 간신을 멀리하고 충신을 가까이 하도록 권고한 글입니다. 7차 교과서 242 페이지에 실려 있습니다. 이것을 통하여 삼국 통일 직후 6두품의 역할이 국왕의 조언자로서 전제 왕권을 뒷받침하였다는 점을 알게합니다. 더보기 이전 1 ··· 185 186 187 188 189 190 191 ··· 220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