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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풀이

사택지적비 - 고대의 도교사상 사택지적비 병인년 정월 구일, 내지성의 사택지적은 해가 쉬이 가는 것을 슬퍼하고 달이 어렵사리 돌아옴이 서러워 금을 캐어 귀중한 당을 짓고 옥을 파서 보배로운 탑을 세웠다. 우뚝 솟은 자애로운 모습은 신령한 빛을 토해 구름을 보내고 뾰족하니 슬픈 모습은 성스러운 밝음을 머금어....... 참고글 : 사택지적비는 1948년 부여읍 관북리(官北里) 도로변에서 발견되어 현재는 국립부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발견된 것은 비의 일부로서, 현존 높이 102cm, 너비 38cm, 두께 29 cm입니다. 양질의 화강암에 가로 세로로 정간(井間)을 구획하여 그 안에 평균 4.5cm 크기가 되는 글자를 음각하였습니다. 1행은 14자로 되어 있는데 현존하는 것은 앞 부분에 해당하는 4행까지로서 모두 56자입니다. 비의.. 더보기
신라의 왕호변천 과정이 보이는 사료 발췌 신라의 왕호 변천 사료 (1) 진나라 말로 왕이라는 뜻이다. 혹은 귀인의 칭호라고도 불리운다. - 거서간 - (2) 방언으로 무당을 뜻하는 말이다. 세인들은 무당의 일을 귀신의 일로 알고 마땅히 제사를 드린다. 옛부터 그것을 경외하고 두려워하였다. 마침내 존장자의 뜻으로 이것을 칭하게 되었다. - 차차웅 - (3) 치아를 뜻하는 말이다. 초기 남해왕이 죽었을 때, 아들이 노례가 왕위를 탈해에게 양보하였다. 탈해가 이렇게 말하였다. 옛부터 이와 같이 전해져 내려오는 말이다. - 이사금 - (4) 방언으로 말뚝이라는 뜻이다. 말뚝은 직접 서야 하는 위치를 표지하는 것이다. 즉, 왕의 말뚝이 주가 되고, 신하의 말뚝이 그 밑에 열을 맞춘다. 이로 인하여 지어진 말이다. - 마립간 - - 삼국사기 발췌 - 더보기
평강공주 전에 나오는 고대 민전 매매 증거 사료 평강공주전 중 민전 매매 사료 평강공주가 이렇게 말하였다. 이에 금가락지를 팔고, 밭과 집을 구입하였다. 노비, 우마, 기물을 구입하니 돈을 사용하여 모두 갖추어진 것이다. - 평강공주전 - 참고글 : 평강공주전은 경제사 파트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데, 이유는 바로 위 대목 때문입니다. 고대 사회는 원칙적인 왕토사상을 기반으로 이루어진 사회였지만, 실제로는 매매가능한 민전(사유토지)와 사유재산이 존재하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료입니다 더보기
무령왕릉 비석 - 매지권, 토지사유제, 왕토사상 등 무령왕 비석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 62세 되는 계묘년 5월 7일 임진날에 돌아가셔서, 을사년 8월 12일 갑신날에 이르러 대묘에 예를 갖추어 안장하고 이와 같이 기록한다. . - 무령왕 지석 - 돈 1만닙, 다음의 건. 을사년 8월 12일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 앞에 든 돈으로 토지신 토왕, 토백, 토부모, 연봉 2000석 이상의 여러 관료에게 나아가서 서쪽 땅을 사들여 묘을 만들었으니 문서를 만들어 남긴다. 현 율령에 따르지 않는다. - 무령왕비 지석 뒷면 - 참고글 : 무령왕은 22담로를 설치하고 왕족을 파견하여 지방통제를 했다는 내용이 교과서에 나옵니다. 또 중국 양과 통교를 하였는데, 사료를 보면 그 관계에 대하여 이견이 있습니다. 영과 통교할 때 영동대장군이라는 관작을 쓴다는 것으로 중국에.. 더보기
삼국사기의 신라에 대한 역사 인식 삼국사기의 역사인식 신라왕으로서 거서간이라 칭한 이가 한 사람, 차차웅이라 칭한 이가 한 사람, 이사금이라 칭한 이가 열여섯 사람, 마립간이라 칭한 이가 네 사람이었다. 신리 말 이름난 유학자 최치원이 지은 에서는 모두를 왕이라 칭하고 거서간 등의 칭호는 사용하지 않았으니, 혹시 그 말이 촌스러워서일까? 과 는 중국 역사책인데도 초나라말인 곡오도, 흉노말인 탱리고도 등을 그대로 보존하였다. 지금 신라의 사실을 기록할 때 방언을 그대로 쓰는 것은 마땅하다. - 삼국사기 권 4, 신라본기 4, 지증마립간 - 지금의 학사, 대부들은 5경과 제자의 글, 진한 역대 역사에는 두루 통하여 상세히 말하는 자가 있어도 우리나라 일에 대하여는 도리어 처음과 끝을 까마득히 알지 못하니 한탄스러운 일이다. 신라씨, 고구려씨.. 더보기
고대 불교를 통한 정보전 - 소지왕과 승려 간첩 소지왕과 승려간첩 제 21대 비처왕(소지왕) 즉위 10년(488)에 왕이 천천장에 행차하였다. 이 때 한 노인이 못에서 나와서 글을 올렸는데, 겉봉에 이렇게 써 있었다. 일관이 아뢰기를, 라고 말하였다. 왕이 그리여겨 떼어보니, 라고 씌여 있었다. 왕은 곧 궁궐에 돌아가 거문고 통을 쏘니 거기에는 궁궐에서 분향 수도하던 중이 궁주와 몰래 간통하고 있어, 두 사람을 사형에 처하였다. - 삼국유사 권 3, 원종흥법염촉멸신 - 참고글 : 이 이야기는 신라 소지왕 대의 이야기입니다. 소지왕은 백제와 손잡고 강력하게 고구려에 대항하려 하였던 왕인데, 고구려는 소지왕을 제거하려고 하였던 것 같습니다. 즉, 궁주와 함께 왕을 암살하려고 했던 승려 간첩을 서출지에서 나온 노인이 알려줘서 막았다는 설화입니다. 더보기
이차돈의 순교 이차돈의 순교 예전에 법흥대왕이 자극전에서 등극했을 때 동쪽 지역을 살펴보시고 말씀하셨다. 이에 조정 신하들은 그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다만 나라를 다스리는 대의만을 지킬 뿐, 절을 세우겠다는 높은 계책은 따르지 않았다. 이 때 사인 내양자가 있었으니, 성은 박이요, 자는 염촉 즉 이차돈이었다. 이차돈은 왕의 얼굴을 쳐다보고 심정을 눈치채어 왕에게 아뢰었다. 이에 대왕은 위엄을 갖추고 무시무시한 형구를 사방에 벌려놓고, 믓 신하들을불러 물었다. 이에 뭇 신하들은 벌벌 떨면서 황급히 맹세하고 손으로 동서를 가리었다. 대왕은 사인(이차돈)을 불러 이 일을 문책하고, 분노하여 베어 죽이라고 명하였다. 옥리가 목을 베너 허연 젖이 한 길이나 솟았다. ..... 드디어 북산 서쪽 고개에 장사하였다. 나인들은.. 더보기
신라 - 불교 전파 - 묵호자 , 아도본비 신라의 불교 전파 (1) 신라본기 4권에 이런 말이 있다. 제 19대 눌지왕 때 사문 묵호자가 고구려로부터 일선군에 이르니, 고을 사람 모례는 자기 집 안에 굴을 파서 방을 만들고 묵호자를 머물도록 하였다. 이 때 양나라에서 사신을 시켜 옷가지와 향물을 보내왔는데, 신라 임금과 신하는 그 이름과 쓰임새를 알지 못하였다. 그래서 사람을 시켜 향을 싸서 널리 나라안을 다니면서 묻게 하였다. 묵호자가 이를 보고 말하였다. 이 때 왕녀가 병이 위급해서 묵호자를 불러다가 향을 피우고 소원을 말하니 병이 즉시 나았다. 왕이 기뻐하며 예물을 후히 주었는데, 잠시 뒤 묵호자가 간 곳을 알지 못하였다. (2) 또 21대 비처왕(소지왕) 때 아도 화상이란 이가 시종을 데리고 역시 모례의 집으로 왔는데 모습이 묵호자와 비슷.. 더보기
효녀 지은전에 보이는 신라 사회상 효녀 지은전 효녀 지은은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어릴 적에 아버지를 여의고 혼자서 어머니를 봉양하면서 서른둘이 되도록 시집가지 않고 아침저녁으로 보살피며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런데 봉양할 거리가 없자 부잣집에 가서 자청하여 몸을 팔아 종이 되고 쌀 10여석을 받았다. 딸이 사실대로 고하니 어머니가, 라고 하면서 소리내어 크게 울고 딸도 울어서 그 슬픈 모습이 길 가는 사람을 감동하게 하였다. 이 때 효종랑이 지나가다가 이 광경을 보고 돌아와 부모에게 청하여 집에 있는 곡식 100석과 옷가지를 실어다 주었다. 또 지은을 산 주인에게 몸값을 갚아주고 양민으로 풀어주니, 낭도 몇 천명도 곡식 한 섬씩 내려주었다. 대왕(정강왕)이 이 속식을 듣고 조 500섬, 집 한 채를 내려주고 잡역을 면제해주었다. 집에.. 더보기
김흠운 김흠운 김흠운은 냇물왕의 8대손이요, 아버지는 달복 잡찬이었다. 어려서 화랑 문노의 문하에 있을 때, 낭도들이 아무개가 전사하여 지금까지 이름을 남기고 있다는 말을 하게 되면, 흠운은 비장하게 눈물을 흘리며 아무개를 흠모하는 모습을 모였다. 같은 문하에 있는 승려 진밀이 말하기를 라고 하였다. - 삼국사기 권 47, 열전 7, 김흠운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