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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풀이

포상 8국의 난 포상 8국의 난 나해 이사금 14년(209) 7월에 포상 8국이 가라를 침입하려 하자 가라 왕자가 와서 구언을 청하였다. 왕이 태자 우로와 이찬 이음에게 6부병을 거느리고 가서 구해주도록 명하여, 8국 장수를 죽이고 6천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 - 사료해석 : 포상 8국의 난은 금관국(금관가야)에 대한 가야 소국들의 불만으로 시작된 난입니다. 금관가야는 이러한 가야 내부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적국이었던 사로국에 구언을 요청하였습니다. 진한의 맹주인 사로국은 변한 지역에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대가야를 위한 군대를 보내 8국의 난을 진압하였다고 합니다. 결국 이러한 난을 통해 가야국들은 진정한 적은 외부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금관국을 위주로 연맹체를 형성하여 3세기에 낙랑, 대방, .. 더보기
대가야와 사로국의 전쟁 대가야와 사로국의 전쟁 탈해이사금 21년(서기 77) 8월에 아찬 길문이 가야 병사와 황산진(양산 낙동강 나루터로 추정) 하구에서 싸워 천여급을 얻었다. 파사 이사금 15년(서기 94) 2월에 가야가 마두성을 에워싸자 아찬 길원이 기병 천명을 거느리고 차니 달아났다. 기마 이사금 4년(서기 115) 8월에 장수를 보내 가야를 치게 하고 왕이 정예병 만명을 거느리고 따르니, 가야가 성에서 나오지 않고 굳게 지켰다. 마침 장마가 와서 돌아왔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 - 사료해석 : 이 사료는 금관가야의 전성기에 사로국(진한 신라국)과의 전쟁을 담은 사료입니다. 금관국 가야가 적극적으로 사로국과 전쟁을 벌이려고 했던 이유는 아마도 다른 가야 소국들을 통제하기 위하여 전쟁이라는 수단을 이용했었던 듯 싶습니다. .. 더보기
가야의 중계무역 가야의 중계무역 낙랑군에서 왜로 가는데 해안을 따라 한국(韓國)을 거쳤다. 잠시 남으로 갔다가 잠시 동으로 가면 북쪽 해안인 구야한국(금관국을 말하는 듯)에 이르는 데 7천리였다. 여기서 천리 한 바다를 처음 건너면 대마국에 이른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왜인 - 사료해석 : 이 사료는 김해 지방의 구야한국(금관국)인 대라락의 위치를 말해주는 중요한 사료입니다. 대가야는 낙랑, 대방군과 왜를 연결하는 중계무역(특히 철을 수출하였던 듯합니다.)을 통해 가야 소국들을 통제하면서 연맹왕국을 이끌어 갑니다. 이 사료는 초기 대가야의 중계무역을 제시하는 사료로 인용됩니다. 더보기
가락국기 - 김수로왕 설화(삼국유사 기이편) 김수로왕 설화 천지가 개벽한 뒤로 이 지방에는 아직 나라 이름도 없고, 또한 왕과 신하 이름도 없었다. 이 때 아도간, 여도간, 파도간, 오도간, 유수간, 유천간, 신천간, 오천간, 신귀간 등 9간이 있었다. 이들 수장들은 백성을 통솔했는데 대개 100호 75000명이었다. 그 때 사람들은 거의 스스로 산과 들에 모여 살면서 우물을 파서 마시고 밭을 갈아서 먹었다. 후한의 광무제 건무 18년(서기 42년) 임인 3월 상사일(음력 3월 첫 번째 뱀날)에 그들이 사는 북쪽 구지에서 수상한 소리가 들렸다. 마을 사람들 2-3백명이 거기에 모이니, 사람 소리 같기는 한데 모습은 숨기고 소리만 들렸다. 9간들은 그 말을 따라 마을 사람들과 함께 모두 기뻐하면서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얼마 뒤 하늘을 우러러보니 자.. 더보기
신라 지증왕대의 급격한 사회변화 지증왕대 사회변화 왕검은 요(堯) 임금이 왕위에 오른 지 50년인 경인년에 평양성에 도읍을 정하고 지증 마립간(智證麻立干) 4년(503) 10월에 여러 신하들이 아뢰기를, 라 하였다. 왕이 이에 따랐다. 5년(504) 9월에 역부를 징발하여 팔리(波里)*미실(彌實)*진덕(珍德)*골화(骨火) 등 12성을 쌓았다. 6년(505) 2월에 왕이 친히 국내에 주군현(州郡縣)의 제도를 정하고 실직주(悉直州)를 두어 이사부(異斯夫)를 군주(軍主)로 삼으니 군주란 이름이 여기서 시작되었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 지증왕 - 사료해석 : 신라 역사상 큰 변혁기인 지증왕 대 사회변화에 대한 내용입니다. 지증왕대의 사회변화를 약술하면, 1. 국호를 신라로 바꾸고 왕의 칭호를 사용하였다. 2. 순장을 금지하였는데, 최근 이 .. 더보기
황초령비 황초령비 8월 21일 계미에 진흥태왕(眞興太王)이 관경(管境)을 하고 돌에 새겨 기록하였다. 세상의 도리가 진실에 어긋나고, 그윽한 덕화가 펴지지 아니하면 사악함이 서로 다툰다. 제왕(帝王)은 연호를 세워 스스로를 닦아 백성을 편안히 하지 않음이 없다. 그러나 짐은 태조(太祖)의 기틀을 이어받아 왕위를 계승하여, 몸을 조심하고 스스로 삼가면서 할까 두려워하였다. 하늘의 은혜를 입어 운수를 열어보여, 명명(冥冥)한 중에서도 신지(神祗)에 감응되어 사방으로 영토를 개척하여 백성과 토지를 널리 획득하니 이웃나라가 신의를 맹세하고 화호(和好)를 요청하는 사신이 서로 통하여 오도다. 아래로 하여 신·구민을 육(育)하였으나 오히려 왕도의 덕화가 있지 않았다고 하였다. 이에 무자년 가을 8월에 관경을 순수하여 민심을.. 더보기
단양 적성비 단양 적성비 년 월에 왕이 대중등(大衆等)인 탁부(喙部) 출신의 이사부지(伊史夫智) 이간지(伊干支), [사탁부(沙喙部) 출신의] 두미지, 피진간지, 탁부(喙部) 출신의 서부질지(西夫叱智) 대아간지(大阿干支), 부지(夫智) 대아간지(大阿干支), 내례부지(內__夫智) 대아간지(大阿干支), 고두림성(高頭林城)에 있는 軍主들인 喙部 출신의 比次夫智 阿干支, 沙喙部 출신의 武力智 阿干支, 추문촌(鄒文村) 당주(幢主)인 사탁부(沙喙部) 출신의 도설지 급간지(及干支), 물사벌(勿思伐)[성(城) 당주(幢主)]인 탁부(喙部) 출신의 조흑부지(助黑夫智) 급간지(及干支)에게 교(敎)하시었다. 이 때에 적성(赤城) 출신의 야이차에게 교(敎)하시기를 중에 옳은 일을 하는 데 힘을 쓰다가 죽게 되었으므로 이 까닭으로 이후 그의 .. 더보기
단양적성비 단양 적성비 년 월에 왕이 대중등(大衆等)인 탁부(喙部) 출신의 이사부지(伊史夫智) 이간지(伊干支), [사탁부(沙喙部) 출신의] 두미지, 피진간지, 탁부(喙部) 출신의 서부질지(西夫叱智) 대아간지(大阿干支), 부지(夫智) 대아간지(大阿干支), 내례부지(內__夫智) 대아간지(大阿干支), 고두림성(高頭林城)에 있는 軍主들인 喙部 출신의 比次夫智 阿干支, 沙喙部 출신의 武力智 阿干支, 추문촌(鄒文村) 당주(幢主)인 사탁부(沙喙部) 출신의 도설지 급간지(及干支), 물사벌(勿思伐)[성(城) 당주(幢主)]인 탁부(喙部) 출신의 조흑부지(助黑夫智) 급간지(及干支)에게 교(敎)하시었다. 이 때에 적성(赤城) 출신의 야이차에게 교(敎)하시기를 중에 옳은 일을 하는 데 힘을 쓰다가 죽게 되었으므로 이 까닭으로 이후 그의 .. 더보기
최치원의 낙랑비 서문 최치원의 낙랑비 서문 이 나라는 현묘한 도가 있으니 이를 풍류라 하였다. 이 교의 기원은 선사(仙史)에 상세히 실려 있거니와, 실로 이는 3교를 포함한 것으로 집안에서는 효도하고 밖에서는 나라에 충성을 다하니 이는 공자의 뜻이며, 모든 일을 거리낌없이 처리하고 말하지 않고 실행하는 것은 노자의 뜻이며, 악한 일을 하지 않고 선만을 행하는 것은 석가모니의 교화 그대로이다 사료해석 : 이 자료는 화랑도에 대한 내용을 포함하면서도, 유, 불, 선 3도의 융합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신라 말기 6두품들의 사상 의식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사료입니다. 더보기
모죽지랑 이야기 모죽지랑 이야기 죽만랑(죽지랑)의 낭도에 득오실이라는 급간(후에 급간이 되었다는 말, 당시 급간이 아닌 듯함)이 있었는데, 풍류황권(화랑도 명단을 적은책)에 이름을 올려두고 날마다 출근하더니 열흘 동안 보이지 않았다. 낭(죽지랑)이 그 어미를 불러 아들이 어디에 있는가 물으니 어미가 말하였다. 라고 말하였다. 낭은 라고 말하였다. 낭은 떡 한 합과 술 한 병을 가지고 측근을 거느린 채 가니 낭도 137명이 위의를 갖추고 따라갔다. 부산성에 이르러 문지기에거 물었다. 문지기가 답하길, 라고 하였다. 낭이 밭으로 찾아가서 술과 떡을 먹이고, 익선에게 휴가를 얻어 같이 돌아가고 싶다고 청하니, 익선은 끝내 안된다며 허락하지 않았다. 이 때 세금수취인 간진이 추화군(밀양)의 능절조 30석을 거두어부산성으로 싣고..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