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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풀이

왜와 백제 사이의 칠지도를 통한 논쟁 칠지도 논쟁 52년 가을 9월 정묘의 첫 병자일에 구저 등이 치쿠마나가히코를 따라와서 칠지도 1자루와 칠자경 1개, 여러 가지 귀중한 보물들을 바쳤다. 그리고 계하여 말하기를, 라고 하였다. - 니혼쇼키 권9, 신공황후 섭정 52년 - 사료해석 : 유명한 칠지도에 대한 사료입니다. 문제의 핵심은 칠지도에 대하여 공공이란 글자가 문제시 됩니다. 옛날말로 공공이란 표현은 바치다, 주다, 하사하다 등 여러 가지 준다는 표현의 용어입니다. 따라서 바친 것인지, 준것인지, 하사한 것인지는 해석하기 나름이라는 뜻이죠. 일본의 통설은 신공황후 52년 백제가 일본에 항복의 표시로 바친 것이 칠지도라고 봅니다. 우리나라의 통설은 이것은 백제왕이 일본왕에게 하사한 것으로 봅니다. 이유는 당시 백제가 근초고왕기에 접어들면서.. 더보기
일본이 중국에 임나일본부 승인 요청 일본의 임나부 지위 인정 요청 흥이 죽자 아우 무가 즉위하여 을 자칭하니, 순제 승평 2년에 을 제수하였다. - 송서 권 57, 이만, 왜국 - 비가 죽자 경이 즉위하여 세조 대명 원년(457)에 사신을 보내어 제수를 요청하니 조칙을 내려 허락해주었다. - 송서 권 57, 이만, 백제국 - 사료해석 : 위 1번째 사료는 5세기에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이 정치적 균형을 이루는 시기에 왜가 백제를 통하지 않고 중국 남조와 직접 교역을 하려 했던 증거입니다. 왜는 남조 왕조들에게 한반도 남부의 여러 나라들에 대한 영도적 지위를 인정해야 함을 강요합니다. 중국 남조의 사서에는 찬, 진, 제, 흥, 무로 이어지는 일본 5왕의 이름이 남아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임나 일본부설의 주요한 근거로 작용될 수도 있.. 더보기
백제와 신라의 일본에 보낸 볼모 백제와 신라의 볼모 왜국과 우호 관계를 맺고 태자 전지를 볼로로 보냈다. - 삼국사기 권25, 백제본기 3, 아신왕 6년 5월 - 왜국과 우호 관계를 맺고, 내물왕의 아들 미사흔을 볼모로 보내다. -삼국사기 권3, 신라본기3, 실성이사금 원년 3월 - 사료해석 : 위의 내용은 백제가 왜국과 우호를 다지기 위함으로 해석됩니다. 즉, 광개토대왕이 391년 백제가 왜와 신라를 공격한다는 이유로 백제를 공격합니다. 백제의 아신왕은 고구려왕의 이 될 것을 맹세하지만, 고구려에 복수하기 위하여 아신왕의 아들을 왜에 보내고 왜와 관계를 강화한다는 내용입니다. 밑의 사료는 장수왕이 남진정책을 실시할 즈음의 사료입니다. 백제는 이미 왜와 관계가 돈독하였지만, 신라는 고구려의 침입을 막기 위해 이 당시부터 왜와 친선관계를.. 더보기
일본서기 - 백제와 신라는 공물을 바치다. 백제와 신라의 공물 두나라(신라와 백제)의 공물을 조사하였다. 신라의 공물은 진기한 것이 많았는데, 백제의 공물은 적고 천하고 불량하였다. 백제 사신 구저 등에게 묻기를, 라고 물으니, 라고 대답하였다. - 니혼쇼키 권9, 신공황후기 47년 4월 - 사료해석 : 이 사료는 4세기 근초고왕기에 백제가 성장하자, 신라가 다급해진 나머지 백제와 왜가 연결되는 것을 막고 왜에 대한 관계를 개선하려고 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료입니다. 즉, 신라가 백제의 공물을 가로채었다는 것은 곧 신라가 백제보다 한참이나 경제적 여건이 뒤떨어짐을 보여줍니다. 즉, 신라는 왜와의 관계를 개선하려고 했지만, 경제적인 면 등에서 백제에게 뒤쳐졌고, 이후 왜는 백제와 친선관계를 더하게 됩니다. 역시 일본서기이기 때문에 일본 입장에서만 .. 더보기
백제의 신라 공격 시 왜의 지원 백제의 신라습격과 왜의 지원 신공 49년 3월 황전별과 녹아별을 장군으로 삼아 구저 등과 함께 군대를 거느리고 건너가 탁순국(대구, 창원쪽의 가야국가)에 이르러 신라를 습격하려 하였다. 그러나 군사가 적어 신라를 깨뜨릴 수 없다는 의견이 있어, 사백과 개로를 보내 군사를 늘려달라고 요청하니, 즉시 목라근자와 사사노궤에게 명하여 정예군을 거느리고 사백, 개로와 함께 가도록 하였다. 모두 탁순에 모여 신라를 쳐서 깨뜨렸으니, 비자발, 남가라, 탁국, 안라, 다라, 탁순, 가라 등 7국을 평정하였다. 그리하여 군대를 옮겨 서쪽으로 고해진(전남 강진)을 돌아 남쪽 오랑캐 침미다례(전남 해남)를마구 죽이고 이를 백제에게 주었다. - 니혼쇼키 권9, 신공황후기 49년 3월 - 사료해석 : 이 내용은 4세기의 상황을.. 더보기
백제의 불교 수용 백제의 불교 수용 에 이런 말이 있다. 제 15대 침류왕이 즉위한 갑신년(384)에 인도 중 마라난타가 동진에서 오니, 그를 맞이하여 궁중에 두고 예로써 공경하였다. 이듬해 을유에 새 서울 한산주에 절을 짓고, 중 10명을 두었으니 이것이 백제 불법의 시초인 것이다. - 삼국사기 권 3, 난타벽제 - 사료해석 : 백제의 불교수용에 대한 증거 사료입니다. 더보기
고구려와 백제의 불교를 통한 정보전(007을 능가하는 첩보전이 있었네요) 고대 사회의 정보전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를 치려고 간첩으로 갈 수 있는 자를 구하였다. 이 때 승려 도림이 응모하였다. 왕은 기뻐하여 비밀리에 보내어 백제를 속이게 하였다. 이에 도림은 거짓 죄를 짓고 도망온 것처럼 하고 백제로 들어왔다. 이 때 백제왕 근개루(개로왕)는 바둑을 좋아하였다. 왕이 도림을 불러들여 바둑을 두었더니 과연 국수었다. 그래서 그를 상객으로 받을어 매우 친근히 하였다. 어느 날 도림은 왕을 모시고 있다가 조용히 말하였다. 왕이 이를 옳다고 여겨 국인을징발하여 흙을 쪄서 성을 쌓고 안에는 궁실과 누각 등을 지었는데, 모두가 장대하였다. 이 때문에 창고는 비고 인민은 가난해져서 나라의 위태로움이 달걀을 쌓아놓은 것보다 위태로왔다. 도림이 도망하여 이 사실을 고하니 장수왕이 기뻐하여 백.. 더보기
백제 건국기의 정복 전쟁 백제초기의 정복전쟁 온조왕 13년(기원전 6년) 8월에 마한에 사신을 파견하여 천도를 알리고 영토를 명확히 정하였는데, 북으로 패하에 이르고 남으로 웅천에 이르렀으며 서로 큰 바다에 닿고 동으로 주양에 이르렀다. 24년 7월에 왕이 웅천책을 만드니 마한왕이 사신을 보내 꾸짖어 말하기를, 라 하니, 왕은 부끄러이 여겨 그 책을 헐었다. 26년 10월에 왕이 군사를 내어 겉으로는 사냥한다 하고 몰래 마한을 습격하여 마침내 국읍을 병합하였는데, 다만 원산과 금현 두 성을 고수하여 함락하지 못하였다. 27년 4월에 두 성이 투항하여 그 인민들을 한산의 북으로 옮기니 마한은 마침내 망하였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 1 - 근초고왕 26년(371)에 고구려가 군사를 일으켜 오니, 왕이 듣고 패하 강변에 군사를 매복.. 더보기
백제의 관등 제도 백제의 관등 제도 27년(260) 봄 정월에 내신좌평을 두었는데, 왕명 출납 일을 맡았다. 내두좌평은 창고와 재정 일을 맡았고, 내법좌평은 예법과 의례 일을 맡았고, 위사좌평은 왕궁을 지키는 군사 일을 맡았고, 조정좌평은 형벌과 감옥 일을 맡았고, 병관좌평은 지방 군사 일을 맡았다. 또 달솔, 은솔, 덕솔, 한솔, 나솔과 장덕, 시덕, 고덕, 계덕, 대덕, 문독, 무독, 좌군, 진무, 극우를 두었다. 6좌평은 모두 1품이요, 달솔 2품, 은솔 3품, 덕솔 4품, 한솔 5품, 나솔 6품, 장덕 7품, 시덕 8품, 고덕 9품, 계덕 10품, 대덕 11품, 문독 12품, 무독 13품, 좌군 14품, 진무 15품, 극우 16품이었다. 2월에 명령을 내려 6품 이상은 자주색 옷을 입고 은꽃으로 관을 장식하게 하였.. 더보기
백제의 부역, 노역, 사역 제도 백제의 노역 제도 도림은 말하기를 '대왕의 나라는 사방이 다 산악과 강 및 바다로 되어 있으니 이는 하늘이 마련한 힘지이지 사람의 힘으로 된 형상이 아닙니다. 이웃 나라들도 감히 넘볼 마음을 두지 않고 다만 받들어 섬기기를 원할 따름이온즉, 왕께서는 마땅히 높은 위엄과 막대한 부를 한껏 보여 사람들의 눈과 귀를 놀라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도리어 성곽과 궁궐은 수리하지 않고 선왕의 해골은 텅빈 들에 허술하게 묻혀 있으며 백성의 집들도 자주 강물에 무너지니 신은 대왕을 위하여 저으기 안타깝게 여기는 바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그렇다, 내가 장차 마련하리라' 하고 백성을 모두 동원하여 흙을 구워 성을 쌓고 곧 그 안에 으리으리한 궁실, 누각, 망루를 지었다. 또 큰 돌을 욱리하(한강)에서 가져와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