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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풀이

옥저의 민며느리제도 옥저 - 민며느리제도 그 나라 혼인 풍속은 여자 나이 10살이 되기 전에 혼인을 약속한다. 신랑집에서는 여자를 맞이하여 다 클 때까지 길러 아내로 삼는다. 여자가 어른이 되면 친정으로 되돌려 보낸다. 친정에서는 돈을 요구하는데 신랑집에서 돈을 지불한 뒤 다시 신랑집으로 돌아온다. - 삼국지 위서 동이전, 동옥저 - 사료해석 : 민며느리제도는 고구려의 서옥제와 비교해서 생활상을 파악하시면 재미있습니다. 더보기
북옥저인의 생활상 북옥저의 생활 북옥저는 치구루라고도 하는데 남옥저와는 8백여리 떨어져 있다. 풍속은 남북이 서로 같이며 읍루와 맞닿아있다. 읍루는 배를 타고 다니며 노략질하기를 좋아하므로 북옥저는 읍루를 두려워하여 여름철에는 언제나 깊은 산골짜기 바위 굴에서 살면서 수비하고 겨울철에 얼음이 뱃길을 통하지 않아야 산에서 내려와 촌락에서 산다. - 삼국지 위서 동이전, 동옥저 - 사료해석 : 동옥저인의 생활에 대한 글입니다. 더보기
동옥저인의 생활상 동옥저의 생활 동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 동쪽에 있는데, 개마대산은 큰 바닷가에 맞닿아 산다. 지형이 동북은 좁고 서남은 길어서 천리 정도나 된다. 북쪽은 움루, 부여와 남쪽은 예맥과 맞닿아 있다. 호수는 5천호인데, 대군왕은 없으며 읍락에는 각각 대를 잇는 우두머리(장수)가 있다. 말은 고구려와 대체로 같지만 경우에 따라 다르기도 하다. 여러 옥저 읍락 거수들은 스스로 삼노라 일컬으니 삼노는 예전에 한나라 현이었을 때 제도다. 나라가 작아서 큰 나라 틈바구니에서 핍박받다가 결국 고구려에 신하가 되었다. 고구려는 그 중에서 대인을 두고 사자로 삼아 함께 통치하게 하였다. 또 대가로 하여금 조세를 한꺼번에 거둬들이게 하여 맥, 포, 어, 소금, 해초류 등을 천리나 되는 거리에서 져 나르게 하였다. 또 동옥저.. 더보기
고구려의 위치 짐작 사료 초기 고구려의 터 그 나라의 말은 모두 몸이 작아서 산에 오르기에 편하다. 사람들은 힘이 세고 전투에 익숙하여 옥저와 동예가 모두 무릎을 꿇었다. 또 소수맥이 있다. 고구려는 대수 유역에 나라를 세워 살았는데, 서안평현 북쪽에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 작은 강이 있어서 고구려의 별종이 이 소수 유역에 나라를 세웠으므로 그 이름을 따서 소수맥이라고 하였다. 그곳에서는 맥궁이라는 좋은 활이 나온다. - 삼국지 위서 동이전, 고구려 - 사료해석 : 보통 대수를 압록강으로, 소수를 혼강(동가강)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혼강의 흐름은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는 소수의 위치와 맞지 않습니다. 최근에는 압록강과 합류한 다음 바다로 흘러가는 장전강을 소수로 보고 있습니다. 삼국사기에는 양맥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더보기
건국기 고구려인의 생활 초기 고구려의 생활 고구려는 요동 동쪽 천리밖에 있다. 남쪽은 조선, 예맥과 동쪽은 옥저와 북쪽은 부여와 국경을 마주한다. 환도 아래 도읍하였는데, 면적은 사방 2천리가 되고 호수는 3만이다. 큰 산과 깊은 골짜기가 많고 넓은 들은 없다. 산골짜기에 살면서 산골짜기에 흐르는 물을 마신다. 좋은 논이 없어 부지런히 농사를 지어도 식량이 넉넉하지 못하다. 동이의 옛 말에 따르면 고구려는 부여의 별종이라고 하는데, 말이나 풍속 따위는 부여와 많이 같지만 기질이나 옷차림이 다르다. 본디 연노부, 절노부, 순노부, 관노부, 계루부의 5족이 있었다. 처음에는 연노부에서 왕이 나왔으나 점점 약해져서 지금은 계루부가 왕위를 차지했다. 백성들은 노래와 춤을 좋아하여 나라 안 촌락마다 저물어 밤이 되면 남녀가 떼지어 모여.. 더보기
부여인의 생활상(삼국지) 부여의 생활 2 은력 정윌에 지내는 제천 행사는 국중 대회로 날마다 마시고 먹고 노래하고 춤추는데, 그 이름은 영고라고 하였다. 이 때는 형옥을 중단하고 죄수를 풀어주었다. 국내에 있을 때 옷은 흰색을 숭상하며, 흰 베로 만든 큰 소매 달린 도포와 바지를 입고 가족신을 신는다. 외국에 나갈 때는 비단옷, 수놓은 옷 모직옷을 즐겨 입고, 대인은 그 위에다 여우, 살쾡이, 원숭이, 희거나 검은 담비 가죽으로 만든 갓옷을 입었으며, 금은으로 모자를 장식하였다. 통역인이 이야기를 전할 때는 모두 꿇어 앉아서 손으로 땅을 집고 가만가만 이야기한다. 형벌은 엄하고 각박하여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하고 집안 사람은 직몰하여 노비로 삼는다. 도죽질을 하면 도둑질한 물건의 12배를 변상하게 하였다. 남녀가 음란한 짓.. 더보기
한나라의 분열정책과 삼한의 책봉 허용 한의 분열정책 - 삼한의 조복과 의책 경초 중에 명제가 비밀히 대방태수 유혼, 낙랑태수 선우사를 보내 바다를 넘어 2군을 평정하고 여러 한국 신지들에게 읍군의 인수를 더 주고, 그 다음 축들에게는 읍장의 인수를 더 주었다. 그 풍속에 의책 입기를 좋아하여 하호들도 군에 알현하러 갈 때는 모두 의책을 빌려 입으며, 자기 인수를 차고 의책을 착용하는 사람이 천여명이나 된다. -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 - 사료해석 : 이 사료는 예, 맥, 한족 중에 마지막으로 한족이 중국 한나라의 분열정책에 넘어갔음을 보여주는 기사입니다. 염사치 사화, 고구려의 책구루 기사와 같이 읽어보면 중국의 분열정책에 대한 내용이 쉽게 이해가 가실 겁니다. 더보기
한나라의 분열 정책과 고구려의 책구루 한의 분열정책 - 고구려의 책구루 한나라 때 북치고 피리부는 재주꾼을 주었다. 언제나 현도군으로부터 조복과 의책을 받아갔는데 고구려가 그 명부를 주관하더니 나중에는 점차 교만하고 방자해져서 다시는 군에 나가지 아니하고 동쪽 경계에 작은 성을 쌓고 조복과 의책을 그 가운데 넣어두면 정초에 와서 가져갔다. 지금은 오랑채들이 오히려 이 성에 이름을 붙여 책구루라 하는데 구루는 고구려말로 성이라는 뜻이다. - 삼국지 위서 동이전 - 사료해석 : 고조선이 멸망하고 예, 맥, 한족들에게 한족인 분열정책을 실시하였습니다. 예족(부여족)과 한족(3한족)은 그 분열책에 넘어갔지만, 맥족(고구려족)은 분열정책에 넘어가지 않고 고대 국가로 확실하게 성장해갑니다. 조복과 의책을 주는 중국의 분열책에 고구려는 성(구루)을 쌓고.. 더보기
한사군 점령기의 법령 증가 기록 한사군 시기 법령 증가 군을 설치하고 초기에는 관리를 요동에서 뽑아왔는데, 이 관리가 조선 백성들이 문단속을 하지 않는 것을 보았다. 장사하러 온 자들이 밤에 도둑질을 하니 풍속이 점차 야박해졌다. 지금은 범금도 많아져서 60여 조목이나 된다. - 한서 지리지 제 8권 - 사료해석 : 초기 고구려는 8조목의 법만 있었고, 풍속이 각박하지 않아 도둑질이 없고, 문을 잠그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한사군이 설치되면서 사회가 새롭게 개편되는데 그중 하나가 법령 조목의 증가입니다. 법 조목이 증가하였다는 자체가 사회가 각박해졌다는 것을 의미하죠. 더보기
한사군 설치에 대한 중국측의 기록 한사군의 설치 원봉(무제) 3년이 되어 조선을 멸망시키고 낙랑, 임둔 현도, 진번 4군을 나누어 두었다. 소제 5년에 이르러. 임둔, 진번을 없애고 낙랑, 현도를 합쳤는데, 현도는 다시 고구려로 옮겨졌다. 단단대령으로부터 동쪽에 있는 옥저와 예맥은 모두 낙랑에 소속시켰다가 뒤에 땅이 너무 넓고 멀다고 해서 다시 영동 7현을 떼어 낙랑동부도위를 두었다. - 후한서 동이열전, 예 - 사료해석 : 한사군의 설치에 대한 자료입니다. 한사군은 낙랑, 진번, 임둔, 현도로서 그 위치에 대한 논쟁이 많았습니다. 민족주의자인 신채호, 정인보 등이 제북설을 주장한 것과 달리, 싫증주의자들은 재남설을 주장하였죠. 한사군은 낙랑군을 중심으로 고조선인을 차별하는 정책을 취했기 때문에 중국계 지배계급은 토착민과 유리되어 있었습.. 더보기